2001년 10월24일 서울 광화문에서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연약한 체구를 지닌 덕성여대 학생들이 곱게 기른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자르고 있었다. 한참 멋을 부릴 나이의 여학생들이 '삭발'을 하게 된 이유는 당시 분규로 몸살을 앓던 덕성여대의 현실을 알리고 학교 정상화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대생의 삭발 광경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 눈시울을 적셨다. 삭발한 학생의 선배도 후배도, 이들을 가르치던 교수들도, 이들을 취재하던 기자들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동생 같은 조카, 딸 같은 여대생들이 삭발하는 모습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며 고개를 떨구던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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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단비리와 재단이사진 문제로 학내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01년 10월24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뒷마당에서 덕성여대생들이 현이사진 퇴진과 관선이사 파견을 요구하며 삭발식을 치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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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여대는 사학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학교이다. 선배에서 후배로 내려오며 이들은 투쟁의 역사를 공유했다. 사학 민주화 투쟁은 1∼2년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1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이 모아져도 사학 민주화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부패사학 구성원의 땀과 눈물…2005년 사학법 개정 원동력
일반적으로 사학에서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 넘는 사학비리가 밝혀지고 일부 언론에 보도돼도 '부패사학'의 영향력과 위상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언론보도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되지만 사학재단의 권한과 힘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패사학을 비호하던 일부 정치인과 언론의 '힘'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약자의 위치에 선 학생과 교사들은 법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당시 사학법은 부패사학 비호법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교육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사학법 민주적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됐고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5년 12월9일 사학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당시 "학교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소중한 단초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통과된 사학법의 내용은 교육시민단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내용이었지만 한 단계 진전된 법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나라당-보수언론-사학재단, 사학법 재개정 여론몰이
그러나 국회에서 사학법이 통과된 직후부터 재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언론이 사학재단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사학법 재개정 여론몰이에 앞장섰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장외투쟁을 불사하며 사학법 재개정에 총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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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김충환 이군현 신상진(사진 왼쪽부터) 의원은 26일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촉구하는 삭발 기자회견을 열었다. ⓒ류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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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부패사학을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사학법 재개정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민생 법안과 시급하게 통과돼야 할 법안도 사학법에 막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사학법 재개정과 다른 법안 처리를 연계시켰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사학법 재개정 투쟁(?)은 2007월 2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2월26일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나라당 소속 김충환 이군현 신상진 의원이 사학법 재개정을 위한 삭발 투쟁에 나선 것이다.
한나라당 의원 "자라나는 세대 특정사상 물들이려 한다"
2001년 10월24일 덕성여대 학생들이 사학법 개정을 위해 삭발을 했다면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은 개정된 사학법을 다시 개정하기 위해 삭발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무엇일까.
이들 의원들은 "정부 여당은 지난번 날치기 사학법 개악으로 사학에 족쇄를 채웠다. 자유를 구속으로, 다양성을 획일성으로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며 "개방형 이사제라는 미명 하에 폐쇄적 코드형 이사제를 교묘하게 도입해 사학을 말살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색깔론'도 빼놓지 않았다. 그들은 "불순한 정치세력이 사립학교를 탈취하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게 됐다"며 "날치기 사학법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를 부정하고 자라나는 세대의 정신을 특정사상으로 물들이려는 나쁜 의도를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눈시울 적시는 사람 없는 한나라당 삭발 투쟁
한나라당 의원들의 삭발 투쟁은 많은 언론의 관심 속에 진행됐다. 2001년 10월 그 날의 삭발도 많은 취재진들의 관심 속에 이뤄졌다. 그러나 한나라당 의원들의 삭발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삭발을 하고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지만 현장 분위기는 무덤덤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삭발에 대해 씁쓸한 웃음을 짓는 기자들도 있었다. 국회를 견학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어린 학생은 본회의장 위에서 현장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간절한 뜻을 행동으로 표시하기 위해 삭발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의 '간절한 뜻'에 부패사학을 경험한 학생들의 절박한 사연과 눈물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다. 2001년 10월 그 날의 삭발 여대생들이 2007년 2월 '삭발투쟁' 의원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류정민
첫댓글 ‘사학비리의 종합선물세트’라는 불명예를 계승한 대학은 덕성여대이다. 원래 덕성여대는 독립운동가이고 여성운동가인 차미리사 여사가 건립하였으나, 차미리사 여사가 세상을 떠날 때 학교를 후배인 송금선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송금선은 덕성학원을 사유물로 취급하여 자신의 아들인 박원국에게 물려주었다. 박원국 지배하에 덕성여대는 가장 악질적으로 교수재임용제도를 악용하여 재단에 비판적인 교수들을 해직시켜왔다. 1991년 성낙돈 교수 재임용 탈락에 이어 1997년 한상권 교수의 재임용 탈락, 2001년 남동신 교수 등 5명의 재임용 탈락 등이 꼬리를 물고 발생한 것이다.
특히 박원국은 한상권 교수의 재임용 탈락 이후 전개된 학내 분규와 관련하여 교육부의 감사에 의해 그동안의 비리 146건이 적발돼 이사장 승인이 취소되었으나 2001년 초 승인취소 과정에서의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대법원의 승인취소처분 취소 판결을 받아 내 이사장으로 복귀했다. 박원국의 복귀로 덕성여대 민주화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고, 재단에 밉보인 비판적 교수 5명이 해직되는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남동신 교수가 덕성여대의 원설립자인 차미리사 여사의 초상화 봉정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총장의 경고를 받았고, 이 문제가 해임의 중요한 사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사립학교를 탈취한 자들이 학교 내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박원국에 의해 해직당한 한상권 교수나 남동신 교수는 각각 한국학계에서 권위있는 월봉저작상과 한국사상사학회의 ‘올해의 논문상’을 수상한 빼어난 학자들이다.
학교를 발전시키려면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초빙해와야 할 우수한 학자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이 오늘의 비리사학의 현실이다. 박원국의 덕성여대는 학내 분규가 계속되고 학생들이 농성 과정에서 책걸상을 모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자 아예 책걸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용접을 하고 쇠사슬로 묶어버리기까지 했다. [발췌 : ‘민립대학’에서 ‘개인왕국’으로 전락한 비리사학의 역사적 뿌리를 다시 본다 - 한홍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