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aqB-qPnd7Rw
1. 廬原君臣
대왕의 꿈에서 묘사한 일본군 지휘관
백제가 멸망하고 난 뒤에 복신 도침 등에의해 백제 부흥군이 일어났으며, 일본에서는 부여 풍과 호송군 5000을 파견하여 지원하였습니다. 백제 부흥군의 활동을 제압하기 위해 당나라와 신라는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백제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공격하려 합니다.
그때 일본에서 배를 타고 군대와 식량을 가지고 온 사람이 廬原君臣이었고, 이를 부여풍이 직접 맞이하러 갑니다.
이후 주류성 근처 백강구(현 금강하구)일대에서 당나라와 일본군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지만 일본군이 패하였고(廬原君臣 생사 불명), 주류성도 함락이 되어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을 갑니다.
백강구전투에서 부여풍을 호송할 때 일본에서 같이 왔던 사람도 참전했는데 패색이 짙어지자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朴市田來津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2. 세토겐(薛闍干)
충렬왕 17년(1291) 원나라의 내전이었던 나얀대왕의 반란군 잔당인 카다안(哈丹. 고려사에는 哈丹賊)이 쌍성총관부를 넘어 쳐들어 왔는데, 고려에서는 자력으로 이를 막지 못하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는 강화도로 피신, 원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때 원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온 지휘관이 세토겐이었고, 충남 연기(현 세종시 정좌산 일대)에서 세토겐과 고려 한희유의 연합작전으로 카다안 군을 대파합니다.
1997년에 연기대첩비를 건립, 2000년 부터 매년 10월 '연기대첩제'라는 축제를 거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적이 연기(燕岐)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밤을 낮 삼아 행군해 불의의 기습을 가함으로써 두 번 다 적을 대파한 것은 모두 그의 힘이었다"
"세토겐[薛闍干]이 원나라로 귀환하려 하자 왕이 그를 맞아다가 잔치를 베풀려고 했지만 세토겐은, 명령을 받고 일을 마쳤으니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즉시 귀국길에 올랐다"
3. 이여송(李如松)
1592에서 묘사한 이여송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1달만에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1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까지 함락시켰고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간 위태로운 상황에 놓입니다. 용인전투에서 하삼도의 조선군까지 와해 된 상황에서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그때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그 군대를 지휘한 인물이 바로 이여송 입니다.
이전에 원군으로 왔다가 패한 조승훈과 영의정 유성룡등으로 부터 지난 2차례에 걸친 평양성 수복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던 상황 및 평양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일의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평양성을 수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벽제관에서의 패배가 있고난 뒤 부터 직접적인 전투에는 소극적으로 임하기는 하지만, 평양성 수복을 통해 육상에서의 전세가 반전 되었다는 것까지 부정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여송이 우리 나라에 올 때, 그 아버지인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추후에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하였는데, 이여송이 언젠가 그 글을 사적으로 접반사(接伴使)에게 보이기를, "아버님이 이처럼 분부하셨는데, 감히 귀국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4.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에 의해 사흘만에 수도가 함락되었고, 이승만 행정부는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피난을 갔으며 대한민국 군대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하여(워커라인) 북한군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주둔중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북한군의 주력이 낙동강에 묶여있는 동안 적의 배후를 타격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성공시켜,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었고, 수도를 되찾았으며 38선을 돌파 평양을 함락시키기 까지 합니다.
물론 중공군 개입을 경시하였고, 중공군 개입이후에도 상황을 오판하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지만, 그가 실행한 인천상륙작전이 한국전쟁, 그리고 나아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지는 의미까지 퇴색되지는 않을 것 입니다.
5. 팽덕회(彭德怀)
38선 돌파이후 북한 정권은 수도인 평양을 빼앗겼으며 평안도와 함경도의 주요 지역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이때 중국에서는 인민의용군이라는 명칭하에 북한을 지원하였고 이때 북한군을 지휘한 인물이 팽덕회였습니다. 적의 정찰을 피하면서 함경도 산악지역을 통하여 은밀히 병력을 이동시켰으며, 유엔군의 빠른 진격 및 중공군의 개입을 경시하여 드러난 허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반격에 성공합니다.
열악한 장비와 제공 및 제해권, 주요 요해처가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평양 등의 주요 북한 지역은 물론 서울까지 다시 점령하고(1.4후퇴) 유엔군이 37도선까지 물러나는 등 팽덕회의 전략과 전술이 당시 매우 주효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대한민국에게는 비극이었지만요.
쓰고보니 고대 중세 근세 근대 이후 다 한번씩은 있었네요. 그래도 백제 말고는 구원군을 통해서 살아남는데 성공은 했으니 무조건 굴욕적이라고만 볼 필요는 없지 않나 싶네요. 외국에서 천문학적인 돈과 많은 병력을 쏟아부어도 '구하지 못할 정권은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남베트남을 통해 알기도 했고, 우리가 아프간 사태에서 실시간으로 봐오기도 했으니 말이죠.
어쨌든 그래도 이제는 우리가 천군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누군가에겐 천군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격세지감이지요 ^^
첫댓글 팽덕회요??? 뭔가 이상한데요?
다음날 마티즈 대기하고 있는거 아닐지 심히 걱정 됩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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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저는 외국에 있는지라 마티즈 겁나지 않
앗 당신들 누구야 읍읍
@배달민족 앗 죽은 회원이 쓴 댓글이 보여요.
'한반도 정권'에 '북한'도 포함인가요?
'대륙' 정권은 아니잖여유 ㅎㅎ
제목은 '한국 역사상'이 아니라 '한반도 정권'입니다 ^^;;
제가 모르던 사람도 많네요.
잘 읽었습니다.
사실 구한말 청군 일본군도 포함시킬까 하다가 게을러서 포기 ^^;;
우리나라 엿먹인 팽덕회는 결국 천벌을 받았죠
그러고 보니 맥아더도 결국 대권은 실패했고, 이여송은 귀국한뒤 다른 전쟁터에서 전사했고, 일본은 생사불명, 원나라 세토겐만 유일하게 돌아가서 평장정사가 되는 거 보면, 한반도가 그다지 운이 없는 땅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