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그러하게 / 이순희
언제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화분에
하얀 날개 같은 꽃이 피었다
볼품없는 잎을 달고 제구실도 못 하던 싸구려 그 화분엔
물도 잘 주지 않았다
예쁜 꽃을 피우는 화분들에게 정성 들여 물을 주다가
남은 물 선심 쓰듯 조금 끼얹어 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화분 잎 끝마다 뽀오얀 속살을 내밀더니
천사 날개 같은 꽃을 피웠다
자꾸 시선이 간다
그러다가 스치는 무엇
무심해져야
꽃도 꽃잎 무심하게 지우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꽃 하나 피웠다고
호들갑 떨지 말아야겠다
* 이순희 시인
단국대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2년 <심상> 등단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
2016년 동국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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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싸고 품질이 나쁜 물건 같은 화분이 하나 있다. 거저 준다고 해도 마다할 것 같은 화분이 하나 있다. 남은 물을 내던지듯이 뿌릴 뿐이었던 화분에 어느 날 꽃이 와서 피었다. 꽃잎을 천사의 날개처럼 펼쳤다. 시선과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그 화분에는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나날이 자라고 꽃봉오리가 벌어져 꽃핌이라는 절정을 맞은 생명이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꽃의 개화에 뒤늦게 자꾸 눈길이 쏠리지만 무심해지자고 마음을 먹는다. 낙화의 때에 꽃에서 꽃잎이 지고, 사랑이 지고, 결별이 오는 때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연과 삶의 이치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전혀 손대지 않은 것의 가치와 인위적이지 않은 것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도 스스로 자유로운 한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치우친 생각 없이 믿고 아끼고 돌보고 사랑했으면 한다.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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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삶을 배운다는 것은 제목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게” 되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더 부유해지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많은 욕망을 가지고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속삭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각박해지고 결국 불행과 파멸의 늪을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시인은 꽃을 키우면서 그러한 삶의 방식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잊혀 진 존재,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존재,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존재인 싸구려 화분처럼 그냥 내버려두고 자연에 맡겨둘 때 비로소 “천사 날개 같은 꽃을 피”우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자연의 흐름에 삶을 맡길 때 삶의 고통도 소외도 수많은 갈등도 극복하고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시인은 하고 있다.
이렇듯 자연의 삶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언어를 회복할 때, 시는 우리를 치유하는 오래 된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 황정산 문학평론가
Anonymous Romance / Ernesto Cortaz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