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의 생활화를 논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불법의 세속화다. 불법을 자신의 살림 수준으로 끌어 내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제 편한 대로 단정지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자가 아니라 외도다.
그런데 스스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발원한 사람 중에도 더러 그런 사람이 있다. 끊임없는 정진으로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르려 하지 않고, 언덕을 제 쪽으로 끌어 당기고자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정진을 포기하고 마치 피안에 도달한 양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기만하기도 한다. 하지만 피안은 항상 거기에 그렇게 있을 뿐이다.
스스로 불자라면서 믿음의 대가를 바라는 경우도 많다. 일이 잘 되게 해 달라,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 빨리 진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빌고 호소한다. 장단이라도 맞추듯 한쪽에선 그래야만 복을 받는다고 부추기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불법과는 무관하다. 비록 불법의 이름으로 했다 해도 그건 허사다. 공염불인 것이다.
모름지기 불자라면 스스로 피안의 뗏목을 만들고 제 힘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보시·지계·인욕·정진의 배를 타고 선정·반야의 다리를 건너 영원한 자유의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곳에 이르는 바른 길일까. 먼저 자의식의 죽음이라는 통행증을 발급 받아야 한다. 피안으로 가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다.
자의식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관념의 죽음이다. 관념의 죽음은 좀처럼 수용키 어려운 자아 부정의 처절한 작업을 요구한다. 더 이상 ‘나’, ‘나의 것’이라는 의식이 사라질 때까지 나를 부정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거든 반대로 자의식을 확장하라. ‘나’라는 울타리를 타인까지 확장하고, 나아가 일체의 유정물·무정물까지로 넓혀 가라. 일체 만물이 모두 다 그 울타리 속으로 들어 오도록 ‘나’란 존재를 확대 해석하라.
그래서 마침내 전체와 하나가 되라. 그것 또한 나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자아 부정과 자아 확장은 그렇게 ‘죽음’에서 만난다. ‘나’란 의식이 죽어야 비로소 건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