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울려고 할 당시 청은 압록강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하
려고 하였다.
다만 이때 청은 비碑에 두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청측에서 불리는 토문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비에 새겼었다. 그런데 사실 토문이라는 강은 이것 말고도 더 있었는데 두만강 북쪽의 강이름도 토문었
다.
그리고 비석은 그 북쪽에 있는 토문강근처에 세워졌다(청측의 실수에 의해)
그리고 세월은 흘러 어느덧 19세기 중후기가 되었다.
조선에 큰 흉년이 들어 북쪽지방의 먹을것을 찾아 좀더 북쪽으로 가다가 도강을 하였고 봉금지대에 들
어가게 되었다. 나중에 이것이 청측에 의해 발견되었고 추방당하게 생겼다.
그러자 어떤 조선인이 백두산정계비를 찾아내고 관아에 연락하여 이 곳은 조선의 영토라고 하였다.
조선관아도 청측에 이곳은 조선의 영토라고 하였다. 그리고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이에 청측이 백두산정계비를 확인해보니...동쪽의 경계가 토문이라고 되어 있었다.
(여기서 제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는데...이 당시에도 청에서는 두만강을 계속 토문이라고 불렀는지
...아니면 토문이라는 명칭은 사용되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두만강이라는 이름이 더욱 널리 사용되어 왔
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에 지금까지 이곳을 봉금지대로 설정해온 청은 무색하게 되어 버렸다. 비문의 내용대로 라면 청과 조
선의 영역은 두만강이 아니고 더 북쪽의 강이되어 버리는 것이 된다. 게다가 비도 두만강에 세워져 있지
않고 토문강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결국 청과 조선은 감계담판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청은 비문에 나온 토문은 두만강을 가리킨다고 주장
하였고 조선은 그건은 억측이고 비문의 토문은 두만강의 북쪽에 있는 강의 이름이 토문이라고 주장하였
었다.
네..여기까지입니다.
출처: 대한황실재건회(大韓皇室再建會) 원문보기 글쓴이: 김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