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이나 종규에게도 좁기만한 허름한 다락방을 보이기 싫어 녀석들이 아무리 떼를 쓰고 졸라도 단 한 번도 방 안으로는 데려오지 않았었는데, 지금 은경이가 다락방에 앉아 있는 모습은 나를 무척이나 당황스럽게 한다.
은경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도 녀석도 차가운 목각 인형 같다.
우리 집에 있는 것인데도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
책 가방 조차 제자리에 정리 해 놓지 못 할 정도로 멍하기만 하다.
은경이의 새까만 눈동자를 피해 연이에게 말 한다.
"연아, 오빠가 혼자 다니지 말랬잖아. 비도 계속 오는데..."
내 목소리는 조금 전 보다 한 껏 작아졌다.
"웅 오빠, 은경이 언니네 집에서 놀다 왔어"
아마도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연이를 은경이가 데려간 것일 게다.
은경이는 텔레비젼 앞에 앉은체로 비스듬이 고개를 돌려 나와 연이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
나를 보고 있는 녀석을 느끼지만 녀석의 눈과 마주하기가 산수 숙제 보다 더 어렵다.
"그래도, 오빠 한테 말 하고 갔다 와야지. 혼자 그렇게 다니면 어떻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나무라는 듯한 말이 이어지자 연이는 다소 시무룩해진다.
"웅, 이제 안 그럴게 오빠"
연이의 표정이 가라 앉아 옆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던 은경이가 그제서야 전과 같은 얼굴을 하고 내게 쏘다붙인다.
"야, 동생 한테 왜 그러냐? 내가 같이 가자 그런거란말야"
우리 반에서 내게 이렇게 대들수 있는 녀석은 은경이 뿐이다.
계집 아이 따위와 상대하는 것이 귀찮아서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 번번히 녀석의 재잘거림을 듣고만 있었다.
물론, 지금도 난 녀석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토록 짜증스럽게만 들리던 은경이의 목소리가 지금은 왠지 반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가 왔냐?"
방문이 열리고 문턱 바깥에서 엄마가 우리를 보고 서 있다.
오늘은 야근을 하지 않았나보다.
엄마가 해가 지기전에 공장에서 돌아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연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엄마에게 달려가 안긴다.
오늘은, 비록 늘 먹어오던 단촐한 반찬이 오르더라도 엄마가 차려주는 제대로된 저녁 상 앞에 앉을 수 있을 게다.
연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온 엄마를 본 은경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쏘아붙이던 때와는 달리 상냥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엄마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그래, 넌 누구니? 우리 현이 친구야?"
한달 전에 목욕탕에서 만난 은경이를 엄마는 알아보지 못 하는 모양이다.
하긴, 하얀 김이 가득한 탕 안에서 얼핏 녀석을 보았을 뿐이니 몰라 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엄마, 오빠네 반 언니야"
엄마에게 폭 안긴 연이가 나와 은경이를 대신해 대답한다.
매일 마주치다시피 하는 영준이와 종규에게도 시큰둥 할 만큼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 연이가 은경이와는 꽤 친해진 듯 하다.
연이의 말에 엄마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은경이 머리에 손을 얹으며 활짝 웃는다.
"아, 그때 목욕탕에서 봤었지? 네가 현이 짝이구나?"
"네"
학교 선생님이나 반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오지 말라던 엄마에게 야단을 맞게될줄 알았는데 엄마는 오히려 웃는 얼굴로 은경이를 반기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면 어리광을 부리는 연이를 돌볼 틈도 없이 늘 바쁘게 집 안 일을 하고 방에 누워 연신 팔과 다리를 주물러대기만 하던 엄마가 우리를 텔레비젼 앞에 앉히고서는 부산을 떨기 시작한다.
방 문 밖으로 찬장을 여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간간히 석유곤로의 철재 국물 받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현아, 연이랑 네 친구랑 방에서 놀고 있어"
이리저리 찬장 안을 살피던 엄마가 석유곤로 앞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무릎에 손을 얹고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다락을 내려간다.
"엄마, 어디가?"
연이가 엄마를 불러보지만 엄마는 이미 나무계단을 내려가고 보이지 않는다.
교실보다 훨씬 좁은 다락 방에서 은경이와 함께 앉아 있기가 머쓱하다.
즐겨보는 만화 영화가 텔레비젼 화면에 그려지고 있지만, 가까이에 앉아 있는 은경이가 신경쓰이는 통에 만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은경이와 연이가 만화 영화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 슬그머니 일어나 방을 나간다.
엄마가 올때까지는 아무래도 마루로 나가 있어야겠다.
한 여름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루 바닥은 나무계단과 다락 방 창문 사이를 오가는 비에 젖은 서늘한 바람으로 등을 붙히고 눕기에 알맞을 만큼 식어있다.
마루에 누워 선홍빛 백열 전구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샌다.
백열 전구의 연분홍 불빛이 꼭 내 마음을 비추고 있는 것만 같다.
엄마가 다락을 내려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랫 층에서 엄마와 현숙이 이모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현숙아, 봉급 날에 줄테니까 돈 천원만 빌려줘라. 애가 처음으로 친구 하나 데려 왔는데 뭘 해줄것이 있어야지. 내가 봉급 타면 꼭 갚을테니까 천원만 빌려다오"
"아이고, 현이 엄마는 뭘 그걸 빌려달래? 그냥 갖고 가"
"아니야, 만날 우리 애들 챙겨 주는 것도 미안한데..."
"걱정 말고 갖고 가셔. 나는 돈 쓸 곳도 없어 뭘"
갑자기 방 안에 있는 은경이를 얼른 보내고 싶어진다.
"그래도 그런게 아니지. 내 봉급 날 꼭 갚을게"
"아따, 그 아줌마도 참. 얼른 애들 먹일거나 사다가 해줘"
현숙이 이모의 핀잔 섞인 말과 함께 직직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아직도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빗 소리에 묻혀 금세 사라지고만다.
첫댓글 오늘은 좀 짧네요... ㅋㅋㅋ 그래도 재미있게 읽고 가용*^^*
재미있게 읽었어요>ㅁ<!! 다음편이 점점더 기대되는데요+ㅁ+?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