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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문화 속에서 종교의 영성
-틱낫한스님의 강연과 질의응답 오랜만에 다시 듣습니다.
큰스님의 열반을 맞이하여 왕생극락하시기를!
나무아미타불
일시: 2003년 3월 19일 오후 4:30
장소: 세검정 구 올림피아 호텔
주최: 명진출판사. (주)환경재단
들이쉬며 내쉬며 들이쉬며 내쉬며
꽃처럼 피어나네 이슬처럼 맑으네
산처럼 단단하고 땅처럼 든든하네
자유 자유 자유
Breathing in, breathing out
Breathing in, breathing out
I am blooming like a flower
I am fresh as the dew
I am solid as a mountain
I am firm as the earth
I am free I am free I am free/ 틱낫한 작사.
우리가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호흡을 느낀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즐겨야 한다. 우리의 호흡은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즐거워하고 숨을 내쉬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깊히 느낀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평화란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가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매일의 일상생활을 하면서 평화를 자라나게 할 수 있다. 걸을 때, 앉을 때, 움직일 때 평화를 자라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요소에 의해 가능하다. 처음은 이해하는 것이고 다음은 자유로운 마음이다. 평화를 자라나게 하는 것은 이해를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자비를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자신 안으로 돌아가는 순간 평화를 자라나게 할 수 있다. 숨쉬는 시간마다 내 자신에게로, 지금 여기에로 돌아가는 기회가 된다. 우리가 매일 숨을 쉰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모아 깨어있는 숨을 쉬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렇게 깨어있는 숨쉼은 우리 자신이 “지금 여기에”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숨쉴 때, 숨을 들이쉴 때 내가 숨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깨어있음을 아는 것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자라나게 할 수 있다. 마음모아서 하는 숨쉼은 집중하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숨을 들이쉰다는 것은 숨들이쉼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한걸음 디딜 때마다, 한걸음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디딘다. 이러한 깨어있는 발걸음은 나로 하여금 다시 더 깨어나게 하고 충분히 활짝 깨어있게 도와준다.
프랑스에 있는 우리의 공동체 플럼 빌리지에서는 깨어있는 숨쉼과 깨어있는 걸음을 하고 있다. 어떨 때는 수백 명의 사람이 깨어있는 걸음을 같이 하고 어떨 때는 혼자서 한다. 따라서 우리는 깨어있는 걸음을 연습한다. 우리가 명상실을 향해 갈 때, 부엌을 향해 갈 때, 깨어있는 걸음걸이로 걷는다. 우리가 두세 걸음 걷는다고 할지라도 항상 깨어있는 걸음으로 걷는다. 우리가 아침을 만들 때 그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만든다. 설거지를 할 때에도 깨어있는 마음으로 한다. 깨어있음으로 호흡한다.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바닥을 닦거나 무엇을 할 때도 깨어있는 숨쉼을 계속한다. 수행을 할 때는 모든 것이 깨어 있음이다. 걷는 것, 일하는 모든 것이 깨어있는 수행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깨어있음의 기운을 하루종일 나타낼 수 있다. 깨어있음은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것과 우리 자신이 항상 연결되게 도와준다. 여러분이 물을 마실 때 깨어있음으로 마신다. 깨어있음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그리고 여기에” 충분히 있게 한다. 여러분이 깨어있으면 여러분의 손 안에 들고 있는 이 물이 얼마나 진짜인지 알게 된다. 여러분이 그 물을 마실 때 그 어떤 생각도 여러분을 침범할 수 없다. 오직 “물마심”이 있을 뿐이다. 깨어있음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충분히 알게 도와준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숨쉬는 것, 걷는 것, 내가 물을 마시는 것이다. 이 깨어있음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진짜인 것, 그것과 만나게 한다. 그것을 깊히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깨어있음은 우리를 집중하게 하고 집중함은 삶이 제공하는 수 많은 경위와 만나게 한다. 내가 깨어있을 때, 푸른 하늘과 농부와 만날 수 있다. 깨어있음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내가 깨어 있을 때 정토와 하나님의 왕국을 알고,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의 경위는 하나님의 왕국, 부처님의 정토에 속한 것이다. 내가 오렌지를 내 손에 들때마다 내가 깨어있음으로 그 오렌지를 보면 오렌지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오렌지를 깊히 들여다보면 오렌지 꽃과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다. 나에게는 파란 하늘과 오렌지가 하나님의 왕국과 정토에 속한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이나 정토에 들어가기 위해서 죽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충분하게, 100%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깨어있음”과 “집중함”에 달려있다. 내가 만약 깨어있음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기운, 성령의 기운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왕국을 만나게 한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거나 아니면 영원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과 부처님의 정토가 바로 지금 여기에 함께 하기 위해 수행한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이 가능하게 와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열려있느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 깨어있음에 의해서 지금 여기에 의해서 서방정토를 가르쳐준다. 나의 하나님의 왕국의 정의란 고통이 없는 곳이 아니다. 나는 고통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고통이 없이는 이해와 자비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깊숙히 들여다보고 고통을 느낄 때 바로 자비심을 배울 수 있다. 나는 나의 아이들을 고통이 전혀 없는 곳에 보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의 경험으로는 고통 없이는 이해와 자비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연꽃이 아름답다면 그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 꽃피웠기 때문이다. 그 진흙탕 같은 고통 때문에 이해와 사랑의 꽃이 피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고통으로부터 깊은 이해를 배울 수 있기를 가르치셨다. 고통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고통은 불교의 첫 번째 진리이다. 이해는 두 번째 진리이다. 이 고통에 대한 이해없이는 네 번째 진리, 곧 고통으로부터 자유로 가는 진리를 배울 수 없다.
테러리즘을 고통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테러리즘을 깊히 들여다보면 두려움, 분노, 잘못된 이해가 들어있다. 여러분이 테러리즘의 원인을 깊히 들여다보면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려움, 분노, 잘못된 이해가 들어있다. 여러분 안에, 두려움, 분노, 잘못된 이해가 들어있다면 그것이 테러리즘의 씨앗이 된다.분노, 두려움, 잘못된 이해를 우리는 정의인 양, 하나님의 뜻인 양 이해하고 있다. 9.11 테러 사태를 일으킨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이 정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행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바그다드와 아프카니스탄에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정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분노로 분노를, 폭력으로 폭력을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자신이 바그다드의 시민이라고 생각해 보라. 군대가 여러분을 언제든지 공격하려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한 바그다드에서 두려움에 가득 차 하룻밤을 지샌다고 생각해 보라. 그 두려움이 우리 몸을 병들게 할 것이다. 우리 어린이들이 그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지난 몇 달간 이러한 두려움, 고통, 분노 속에서 이라크 국민들이 살아오고 있다. 아직 미국이 폭탄을 던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벌써 피해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군대가 이라크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만약에 미국의 시민들이 진정으로 이라크 인들이 어떤 두려움과 분노에 떨고 있는지를 안다면 미국인들은 이러한 정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국에 깨어있는 많은 친구들을 알고 있다. 이라크 공격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소수자들이다. 이들은 미국을 깨어있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미국 정부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 해결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될 일은 미국의 깨어있는 자들을 지원하여 그 소수자들이 미국의 시민들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우리는 잘 알고 있다. 테러리즘의 근거에는 두려움과 잘못된 생각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미국에 있는 친국들에게 왜 그들이 미국의 쌍둥이 빌딩을 폭파하였는지 그것을 먼저 이해하라고 하였다. 미국의 내 친구들은 이렇게 물었다. “왜 그들이 우리를 미워할까요? 왜 폭탄을 던졌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폭탄을 던진 사람들은 미국이 자신들의 문화와 조국과 시민을 폭파하려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만약에 미국이 그런 의도가 없다면 폭탄을 던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당신들의 문화와 조국과 시민을 폭파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미국은 아마도 그들이 미국을 폭파하도록 그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거나 인상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잘못된 생각, 그것이 테러리즘의 씨앗이다. 여러분이 진정 테러리즘을 없애려고 한다면 잘못된 그 모든 생각을 없애야 한다. 나는 그 폭탄으로 잘못된 생각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대가 잘못된 생각을 없앨 수도 없다. 이 잘못된 생각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대화와 소통을 여는 것이다. 대화와 소통을 여는 것은 깊히 상대를 듣는 것, 깊히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 당신들(9.11 테러 당사자들)은 그들(미국 혹은 9.11 희생자들)에게 그런 행동을 했는가? 당신이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는 오랫동안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우리에게 당신의 고통, 분노, 절망에 대해 말해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미래에는 더욱 더 좋은 방편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우리에게 당신의 고통과 두려움을 나누어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언가 도움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당신이 무엇 때문에 절망하고 고통했는지 알고 싶다. 그 여정을 듣고 싶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깊은 들음과 사랑이 있는 언어로 그들과 대화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들은 무력을 이용해서 해결하려 했다.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정치학에 대해 공부했지만 어떻게 하면 평화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깊은 영적인 지도를 해주어야 한다. 미국정부는 왜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굶주리면서도 핵을 개발해야 했는지 묻지 않았다. 마음을 다하여 질문하면 그 안에 대답이 다 있다. 북한은 말한다. “우리는 배고픕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렵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언젠가 우리를 공격할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국정부와 남한 정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의 두려움을 형제애로 바꿀 수 있다. 바로 평화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깊히 들여다봄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서로를 가르쳐야 한다. 북한과 남한은 한 형제라는 것, 한 어머니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도록 서로를 도와야 한다.
남한의 정부와 남한의 사람들은 사랑이 들어있는 말을 할 수 있다. “북한에 있는 동포 여러분, 우리는 당신들이 우리의 형제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당신들이 더 이상 고통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들의 형제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먼저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겠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당신과 내가 형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해가 있는 한 형제를 공격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다른 사람들이 당신들을 공격하려고 한다면 당신의 형제로서 당신들을 보호하겠다.” 남한의 정부와 남한 사람들이 북한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북한 사람들은 많은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다. 남한의 정부와 사람들은 미국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도록 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그러한 약속을 받았을 때 더 이상 핵을 개발하거나 무기를 개발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자기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남한에 있는 기독교인 불교인이 그러한 문서를 만들어서 남한의 국회에 제출하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주 좋은 성능의 핸드폰을 사서 북한의 지도자에게 선물로 보내기를 바란다. 북한에 있는 지도자에게 이 핸드폰으로 매일 몇 분씩 남한의 지도자와 통화하라고 청하라. 남한의 지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성능 좋은 핸드폰을 사드리겠다고 하라. 그래서 두 분이 하루 3분씩 대화하도록 하겠다고 하라.
대화와 소통이 있을 때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이 평화를 만들기 위한 좋은 방편이다. 이것은 북한과 남한의 사람들에게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일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면 몇 주 안에 평화의 수확이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여기 계신 종교지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들이 매일 몇 분씩 통화하면서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심어가도록 도우라는 것이다.
질의 응답시간/
질문1/고통을 견디거나 수용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응답/ 고통과 행복은 같이 가는 것이다. 고통이 없이 행복이 없다. 행복이 없이 고통이 없다. 이 둘은 같이 연결되어 있다.
이별의 고통이 없다면 어떻게 만남의 기쁨을 알 수 있겠는가. 배고픔의 아픔이 없다면 배부름의 기쁨을 알 수 있겠는가? 이 고통이라는 배경 때문에 행복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무아이다. 따라서 행복이란 고통이 없이 만들어질 수 없다. 행복이란 행복이 아닌 요소에 의해 만들어지고 고통이란 고통이 아닌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마치 꽃과 같다. 꽃은 꽃이 아닌 것에 의해 만들어졌다. 꽃이 아닌 요소들에는 하늘, 땅, 씨 같은 것들이 있다. 꽃이 꽃이 아닌 것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분리되어진 자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불교는 불교적이 아닌 요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불교에서 불교 아닌 것을 제거한다면 불교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꽃을 만들어졌고 그 흙더미 속에서 꽃이 만들어졌다. 어려분이 명상하는 분이라면 그 꽃 안에 그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 썩은 많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쓰레기더미를 보았을 때 그 안에서 이미 상추, 도마토가 자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쓰레기 더미에서 이미 신선한 채소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을 깊히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 안의 쓰레기를 보게 된다. 두려움, 질투, 폭력의 쓰레기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쓰레기 더미를 정원사처럼 들여다보고 가꿀 때 꽃이 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그 고통속에서 고통을 변화시켜서 건강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좋은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여러분은 그 고통이 가장 적당한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분에게 너무 많은 고통이 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죽게 된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서 적당한 고통을 해결해 나간다. 만약 우리의 사회에 있는 고통이 너무 많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우리 사회의 고통을 꽃으로 변화시키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이분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과 고통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하나님의 왕국의 정의는 이해와 자비가 있는 그것이다. 우리 안에 얼마나 이 이해와 자비심이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고통을 행복으로 건강함으로 바꿀 수 있다. 나는 건강한 종교란 우리의 자비심과 이해에 의해서 우리의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어주는 법을 가르쳐주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질문 2 김경재/ 나는 한국의 한 종교인으로서 수치심 죄책감 굴욕감을 갖고 있다고 고백한다. 첫째는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대통령과의 전화를 통해 파병을 약속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미국 정부가 한국민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이 한국민의 의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협박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전후 복구 과정에서 당시 미국에 대해 빚진 마음을 갖고 있다. 한미동맹의 과정에서 과거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예측하게 해주고 있다. 스님은 50년간의 수행을 통해서 평화에 대한 깨달음과 소통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한반도의 분단과 핵 위협이라는 오늘의 과제는 남북한 두 지도자가 대화와 소통을 못해서 오는 문제도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 국회의원들도 많이 오셨는데 우리는 당장 이라크 파병안을 국회에서 처리해야 할 입장이다. 이 긴박한 한국의 상황에 대해 지혜의 말씀을 듣고 싶다
응답/깨달음이란 시간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즉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나에게 깨달음은 우리의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우리 사회 안에는 차별이 있다. 나뉘어짐, 깊은 고통이 어디에든 있다. 미국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차별과 부정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리되어있는 마음, 분노, 고통은 미국인들 마음에 깊히 자라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소통이 되지 않는 데서 오는 몰이해와 자비심 없음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불교안에서도 기독교안에서도 분열, 고통이 있다. 가정속에서도 분노 고통과 좌절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소통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소통하게 하는 것이 바로 평화를 위한 가장 즉각적인 해결이다. 만약에 우리가 수치심과 불행함을 느낀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진정으로 잇닿아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수행자들은 우리와 우리 몸 안의 요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 안에 있는 감정과 몸에 소통이 되도록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면 소통하는 법을 낼 수 없다면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도울 수 없다. 소통과 조화를 만들어냄으로써 가정과 사회를 도울 수 있다. 우리가 가정 안에서 조화와 소통을 가질 수 있다면 가정과 사회를 도울 수 있다. 사회에 많이 분리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그 요소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조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남한에 있는 분열을 소통으로 바꿀 때 북한과 소통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남북한이 진정으로 소통한다면 이 세상의 어떤 나라도 여러분의 나라를 위협할 수 없을 것이다.
질문3 박광수 교무/ 고통이 없이는 행복이 없다는 말은, 전쟁이 없이는 평화는 없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업보가 아닌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단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만 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응답/ 전쟁이란 우리 위에 떨어지는 폭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 몰이해에 가득 차서 무섭게 말할 때 바로 그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에 이미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미 전쟁을 만들고 우리 주변사람들과 전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전쟁을 밖으로 투사시킬 때 우리자신도 고통 받고 주변 사람들도 고통받게 한다. 우리가 잠시라도 몇 분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휴전이다. 그 몇 분 이외에는 계속 전쟁 중에 있는 것이다. 어떤 부부가 매일 싸운다고 하자. 그들은 매일 전쟁 중에 존재하는 것이다. 잠시 지쳐서 싸우지 않는다면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잠시 휴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부부에게 당신은 왜 전쟁 속에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부부는 “나는 모르겠다. 어떤 것이 평화인가? 평화를 얻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요?”라고 되물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몸의 긴장을 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잠시 평화의 맛을 볼 수 있게 할 것인가? 수행자(돕는 자)에 의해서 매일 매일 평화를 만들 때 아! 평화란 이렇게 좋은거군요 라고 말할 것이다. 평화에 대한 이해 없이 평화에 대한 맛봄 없이 어떻게 평화를 만들 수 있겠는가? 나는 진흙탕을 감사한다. 진흙탕 없이 어찌 연꽃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겠는가? 전쟁을 통해서 평화를 알 수 있다. 수 십년 간 전쟁을 겪은 사람은 전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수 많은 전쟁의 경험과 전쟁의 요소들이 평화의 깊은 의미에 대해, 지금 내게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내게 평화에 대한 수행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수많은 전쟁 속에서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수많은 고통 속에서 우리 모두에게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방식에 따라 전쟁에 기여할 수도 있고 평화에 기여할 수도 있다. 깨어있음이 그것을 알게 해준다. 깨어있음, 마음모음이 아! 내가 전쟁의 길로 가고 있구나, 평화의 길로 가야겠다고 알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깨어있음을 성령이라고 번역하였다.
질문4 참석자 중/ 바그다드에 가서 하룻밤 잔다고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제 저녁 매국 부시의 연설을 신문을 통해서 읽었다. 나는 어제 북한산을 헤멨다. 두려움이나 무서움은 없었다. 다만 답답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나도 위로의 말을 듣고 싶었다. 바그다드 시민과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에게 스님께서 위로의 말씀이나 위로의 행동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응답/여러분 안에 자비심이 항상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답답함, 분노, 좌절감이 여러분을 사로잡게 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평화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 사랑이 담긴 편지를 보낼 수 있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말할 수 있다. 또한 여러분의 친구나 동료들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생명의 빛과 자비심이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러분 안의 빛을 높은 곳에 두어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하라” 그 빛은 이해와 자비의 빛이다. 여러분의 일상 생활이 이해와 자비를 나타낼 수 있는 삶으로 살아 보십시오. 평화를 자라나게 하는 것은 이 세대와 저 세대까지 연결되게 하는 긴 여정이다. 여러분의 자손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도우십시오. 여러분이 행복한 사람인 것을 보여 주십시오. 자비와 이해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진짜 문제는 여러분이 얼마나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고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하면 이미 하나님의 왕국과 정토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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