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오늘의 교회가 매우 견고한 체제와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긴 하지만 원래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으로부터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예수가 교회를 세웠나? 세우라고 명령했나? 그런 암시라도 있나? 우리가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복음서를 읽는다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찾기는 힘들다. 물론 마태복음 16장18절에서 예수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가 직접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특히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보는 게 옳다. 성서학자들의 주석이 더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론에 대한 예수의 생각과 사도들의 생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해명하고 있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물론 예수 사건 없이는 교회 출현도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예수와 교회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관계는 어떤 사람이 회사를 설립하는 것과 같은 인과관계 안에서 해명되는 게 아니라 예수가 선포했다가 결국 동일시됐던 하나님 나라의 신학적 인식 가운데서 해명될 수 있다. 이 말은 곧 오늘의 교회는 그것 자체로 존재론적 근거를 갖추고 있는 게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완벽하게 의존해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교회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서도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이런 성격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미 분명했다. 예수의 부활 승천 후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이 나사렛 파 일행은 자신들끼리 일정한 모임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유대교로부터 분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 당시 바리새파, 사두개파 처럼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매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경건한 무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선생인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의 종교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1) 여전히 성전을 출입했으며, 2) 율법을 준수했고, 3) 구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시 한 번 더 이 문제를 정리한다면, 기구로서의 교회는 사실 매우 역사 우연적인 결과다. 어떤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와 그의 가르침과 인격과 사건, 특히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하던 일단의 무리들에 의해서 우연하게 등장한 기구다. 이 말은 곧 교회가 자기 스스로 존재 근거를 갖거나,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게 아니라 잠정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간혹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1. 교회론의 오류
첫째, 교회의 절대화는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벌어진 잘못이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유명한 도스토옙프스키의 통찰에 의하면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한다. <형제들>에는 세 명의 형제들과 배다른 동생이 등장한다. 제일 큰 형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저 생각 없이 술 잘 마시고 정열적으로 살아가며, 둘째 이반은 가장 이지적인 불가지론자로서 시대와 종교와 전통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셋째 알료사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늘 전형적인 성직자 상으로 등장하는 인격의 인물로서 당시 정교회의 승려다. 오랜 전에 읽어서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배다른 동생은 아마 정신이 좀 모자라는 여자를 아버지가 겁탈함으로써 태어난 것 같다. 카라마조프라는 한 가족 안에 그 시대의 모든 인물상이 묘사되어 있다. 어느 날 이반은 자기 동생 알료사 장로에게 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심문관’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러시아에 와서 옛날 그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이를 고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교회의 조직을 확대하는 일이 아니라 온전히 사람들에게 기쁨을 알려주는 일만 했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정교회 집행부가 예수를 체포해서 감금했다. 어느 날 밤 정교회 대주교가 감옥으로 예수를 찾아와서 이렇게 흥정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내려왔소? 당신 없이도 이 땅의 일은 우리가 잘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당신은 당신의 나라인 하늘로 돌아가시오.”
이 이야기에서 도스토옙프스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아주 명확하다. 이 땅의 현실적인 교회는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잘 굴러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예수가 없어야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status quo)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말하지만 진심으로는 예수를 귀찮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정교회의 대주교의 흥정처럼 “당신은 하늘나라만 관장하고 이 땅은 우리가 관리하겠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받아온 교회의 자기 유혹이며 위기였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그의 삶 전체는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가르침이나 행위가 온전히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즉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교회는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흡사 구원을 나누어주는 기관처럼 자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우리의 한국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운영되는가를 약간만 들여야 보아도 이런 현상은 아주 명확하다. 교회를 개척하기만 하면 그 즉시로 교회당을 짓는 일이 지상 목표가 되어버리고, 그 일이 끝난 다음에는 수양관을 건축하고, 복지관을 짓고, 혹은 교회 공동묘지를 준비하는 일에 매달린다. 물론 노숙자, 결식자, 장애인, 외국 노동자, 미혼모 같은 이들을 돕기도 하지만 그런 일도 대개는 교회 확장과 연계될 때만 힘을 얻고 있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겨우 형식적으로만 운영된다.
둘째, 교회 해체론 역시 교회론의 오해에서 나온 주장이다. 이 교회 해체론은 다시 적극적인 입장과 소극적인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적극적인 해체론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친 니체나 종교를 집단적 히스테리라고 비난한 프로이트, 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일갈한 마르크스 같은 이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기독교 비판은 상당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 자체에 반론을 펼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인간들에 의해서 벌어진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머무르는 게 좋을 것이다. 요즘 인터넷 세계에서 소위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상당히 크게 활동하는 것 같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가 내포하고 있는 허구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문을 물고 늘어지면서 교회 해체 주장에 한몫 거들고 있다. 이런 안티 사이트가 발생하게 된 이유가 우리 교회의 잘못에 기인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한편으로는 학문적 진정성이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선정적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본격적으로 상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성서의 역사비평에서 이미 다루어진 문제인 성서 테스트와 신화의 문제를 대단한 발견인 것처럼 주장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벌어진 스캔들이나 재정 사고 같은 것들을 부풀려 전달하는 그들의 행동은 정당한 기독교 비판으로서의 무게를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소극적인 해체론은 여러 소종파 형태로 발생한 ‘무교회주의’이다. 이들은 종교적 기구로서 자기를 목적으로 삼는 교회를 비판하면서 오직 성령이 지배하는 영적인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목표로 무교회주의를 제창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교신과 함석헌을 중심으로 이런 운동이 한동안 힘을 얻었지만, 그들이 세상을 뜬 다음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로 접어들은 것 같다. 우리는 일단 기성교회에 제기하는 그들의 비판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구체적인 조직으로 교회가 작동하다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자기 조직을 확대해야만 한다는 조직 원리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한 보이는 교회, 조직, 카리스마를 무시할 수는 없다. 비록 그런 것들의 본질이 인간학적 원리에 의해서 훼손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교회가 이미 구원을 담보한 공동체라기보다는 여전히 구원을 기다리는 공동체이며, 또한 구원을 시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할 공동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종말론적 지평에서 자기를 개혁해나가기만 한다면 그런 흠이 있는 교회가 그것을 포기하는 교회보다는 훨씬 바람직한 교회라고 볼 수 있다.
첫댓글 너무 흥미진진하게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맥이 빠지는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솔직한 촌평입니다. ^^ 암튼 흥미롭게 읽었네요... 특히 교회의 존재의 근거를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나라라는 문맥 가운데 보지 않으면 그 존재의 의미가 아예 없다라는 주장에 동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은 교회에 대한 언급은... 앞서 풀어놓으신 내용의 무게를 생각할 때, 수습이 안될 정도로 맥이 빠진다고 느껴지네요... 동의는 하는데 마땅히 설명이 부족하니 납득이 쉽지 않다고 해야하나요?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요?
동감이요^^*
죄송합니다...답글에 다시 올립니다...~~~
님, 좋은 글이신데, 논리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입니다. 아직은 결론 도출이 안나온 거 같은데요. 좀 더 보완해서 정리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