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규 시몬 신부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마르코 11,27-33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떠들썩하게 하셨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 일이 쉽게 넘어갈 단순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로 인해 오늘 예수님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들을 하셨냐며 따집니다. 그들의 따짐에 예수님은 도리어
반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의 권한으로 하는 것이냐?”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신께서 대사제와 율법학자, 원로들의 원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권한으로 그와
모든 일을 하는 것임에도 그러한 사실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한
그들의 무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대답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지 못함을 아시고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신 것입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 원로들은 율법의 규정을 잘 이해하고 따르기에,
다른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치고 이끌며 그들의 잘못을 판결하는 모든 권한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에서부터 났고,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기에 모든 권한은 당신 자신이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당신 자신에게 내려진 것이라 늘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 위에 서있고 그리하여 그들의 모습 안에서
윤리적인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와 세상 사람들을 위한
자기 희생일 뿐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뜻과 말씀과
그 진리의 참 빛이 드러내기 위한 당신의 온전한 희생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심,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권한입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처럼 고귀한 사명을 지닌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권한 또한
지닌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 선포의 고귀한 사명, 그에 상응하는 권한이란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며,
예수님처럼 세상의 불신과 불의에 맞서서 자신을 내던지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 믿음 안에서 바로 구원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생각하고, 사람의 고귀함과 진정한 아름다움과 참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끊임없는 말씀과 그 삶 안에서 머무르고자 하며,
또한 거기에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을 찾고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바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큰 자유와 평화, 그리고 주님의 주시는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부산교구 김종규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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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유다서 17.20ㄴ-25 마르코 11,27-3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 28)
결코 믿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의심과 의심이로 불안이 더욱 자라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권한은 살아있는 사랑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능력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능력입니다.
사랑의 실행 보다 더 소중한 권한은 없습니다. 권한이란 다름 아닌 사랑의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위로하시고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권한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소금과 빛의 권한은 우리 마음을 용서와 화해로 바꾸어 놓습니다.
받아들여야 평화로울 수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서로를 이끌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사랑의
예수 성심 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권한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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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유다서 17.20ㄴ-25 마르코 11,27-3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
성전 뜰을 거닐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마르 11,30)
그들은 그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나의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칫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지게 해 주십시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해 주십시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지 말게 하해 주십시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깨우쳐 주십시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보게 해 주십시오.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시고,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게 해 주십시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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