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 롬15:1-13
- 제목 : 인내와 소망, 그런데 여기는.
◇ 기도
아버지, 100일 결사의 묵상이 삼사일 남짓 남았습니다. 말씀 앞에 나가지 않고는 살아날 방법이 없어 창세기부터 폈습니다. 아버지의 창조주 되심부터 인정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읽어나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를 조직신학 책이 아닌 공동체를 향한 서신으로 보고, 진리를 담지한 자가 마땅히 살아야 할 자세와 모습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모든 일에는 의사가, 약사가, 전문가가 필요하듯 성경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것은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님의 전권이오니, 주어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오늘도 마땅히 살 바를 살게 하소서.
◇ 본문살핌
성도는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배려해야 한다. 본인을 기쁘게 하려 말고 서로 이웃을 기쁘게 해야한다. 선과 덕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다(15:1-3). 성경은 지금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들이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신자들은 훈계와 인내, 위로의 소망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께선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간에 뜻을 일치하게 하여 주셔서, 한마음과 한 목소리로 아버지께 영광 돌리기에 이르도록 하시기 원한다. 그러므로 신자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신 것 같이(요17:9-10) 우리도 서로 서로 하나되어 받아줌이 마땅하다(15:4-7). 바울은 예수께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셔서 할례를 받은 분으로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가 되셨으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신 것을 강조한다. 민족이나 기타 다른 점으로 불일치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간의 합일을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제 소망의 하나님을 말한다. 그분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신자 들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을 부어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 원하신다 (15:8-13).
◇ 묵상
성도들의 마음과 뜻이 서로 합하여지는 일은 쉽게, 초반에, 단박에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성도의 아름다운 연합에 대해 본문의 사도는 '인내와 위로, 소망'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을 붙여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았듯이 우리도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이 일 끝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란 소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선 적절한 때를 따라 위로와 힘을 주셔서 우리의 인내가 마침내 소망을 만날 때까지 동행해 주실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공동체 안의 믿음들이 크고 작기 때문이다(15:1). 믿음이 다른 이보다 성장한 이는 그보다 작은 이를 섬길 것이며, 그 작은 이도 자신보다 더 믿음이 작은 이를 섬겨야 할 것이다. 사도는 권면이 아니라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임을 예수님의 예로써 명시해 놓고 있다(15:3). 즉 교회의 운명이자 책무다. 하나님의 뜻이 성도의 연합과 일치로써 영광 받기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 부부도 공동체로 나가야 되겠다. 가나안 성도의 삶을 마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믿음이 작은 자는 누구인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아는 것 없이 가르치려는 사람,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막상 하면 못 해내는 사람,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사람,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강한 자는 남에게 상처를 받아도 소망으로 감내할 수 있는 사람, 남을 가르치는 것의 엄중한 책임을 아는 사람, 스스로 아무것도 모름을 아는 사람, 맡겨진 일에는 충성을 다하는 사람, 전체를 알기까지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겠지?
서로가 서로에게 큰 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작은 자이기도 한 그런 곳이 교회라는 것이구나. 이제사 인정하고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회심한 후에도 수없이 인생의 똥을 싸지르면서 살고 나서야, 구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 안에도 저마다 작고 약하고 다른 다양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또한 나도 그렇게 살았음을 스스로 목격하고 나서야 이를 체감하게 된다. 이토록 되기까지 인내하시며 소망으로 기다려 주신 하나님이심도 체감하는 오늘이다. 인내와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을 처음으로 뵙습니다! 나를 참아주고 기다려주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오늘이다. 마음에 감사와 송구한 마음, 부족한 내 모습이 근심되어 아롱진다.
아... 나는 믿음이 약한 자다. 누가 이런 나를 받아줄까. 이런 나를 받아 인내와 소망으로 대해줄 공동체가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아픔과 상처는 고사하고, 내면의 성숙도도 고려하지 않은 채 조직 안의 일(봉사)을 시키려하던 그런 무섭고 소름끼치는 교회는 더이상 가고싶지 않다. 대학원에서 심리상담을 공부하며 유형론에 대해서도 배웠다. MBTI 같은 가진 성격 검사가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많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활동적이며 성과와 일을 좋아하는 유형들은 거기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관계적이지 못하고 일 위주의 삶을 산다. 소통은 안되도 일이 되었으면 잘된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고, 그런 자신의 여린 내면을 몰라준다며 혼자 씁쓸해한다(사실 다 티가 난다). 성과가 필요했던 상위 보스는 그를 아낄 것이나, 어디까지나 그가 성과를 낸다는 전제 하에서다. 일할 힘이 없어지면 보스의 머릿 속에서 그는 금새 지워질 것이다.
이런 모습이 교회여서는, 공동체 여서는 안되지 않을까? 그러나 위와 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빈번히, 자주, 당연하게 일어나는가? 나는 그와 같이 굴러가는 교회를 공동체가 아니라 「조직체」라고 부른다. 상명하복, 위계질서, 성과제일주의가 가치가 되는 조직문화에 점철되어 있는데 그걸 어찌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어서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누가 믿음이 작고 약한 자를 인내로, 소망으로 참고 받아줄 것 이며, 그것도 예수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마음먹고 받아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피맺힌 울분이 아니라 자조섞인 한숨이다. 과연 나같은 이를 '받아줄' '공동체'는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의 자조다. 그런, 힘없이 긴 숨이다.
◇ 기도
아버지... 공동체가 절실함을 요즘 느낍니다. 그러나 두렵습니다. 어딜가나 사람 모자란다고, 일해야 한다고 그런 곳들을 많이 봐서 이젠 어디 가기도 겁납니다. 저도 일을 싫어하지 않고 무엇이든 서로 돕는 것이기에 일을 안할 수는 없겠으나 교제가 없고 서로 받아줌이 없는 곳이 싫습니다. 주님...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잘 인도해 주세요. 저는... 이건 제 소관이 아니네요. 주께 맡기니 긍휼히 여겨 주소서. 소망을 갖고 기다리겠습니다. 혼자 거지로 살던 나사로도 천국 갔는데요. 제 영혼도 주님께서 선하게 이끄실 것을 믿습니다. 다만 소망을 가질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서로가 서로에게 큰 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작은 자이기도 한 그런 곳이 교회라는 것이구나. 이제사 인정하고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회심한 후에도 수없이 인생의 똥을 싸지르면서 살고 나서야, 구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 안에도 저마다 작고 약하고 다른 다양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또한 나도 그렇게 살았음을 스스로 목격하고 나서야 이를 체감하게 된다. 이토록 되기까지 인내하시며 소망으로 기다려 주신 하나님이심도 체감하는 오늘이다. ”
너무도 깊이 아멘이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믿음이 작은 자 임에도 큰 자인 줄로 착각하며 마음으로 칼을 휘둘렀던 저를 보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 가정이 있기 원하시는 공동체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작은 마음으로나마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염치없으나 기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