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上堂)
9-1 삼구(三句)
上堂에 僧問, 如何是第一句오
師云 三要印開朱點窄[側]하고 未容擬議主賓分이로다.
問, 如何是第二句오.
師云, 妙解豈容無著問이며 漚和爭負截流機리오.
問, 如何是第三句오.
師云, 看取棚頭弄傀儡하라 抽牽都來裏有人이로다.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삼요(三要)의 도장[印]을 찍었으나
붉은 글씨는 그 간격이 좁아서 숨어 있으니,
주객이 나누어지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이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묘해[문수]가 어찌 무착 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방편상 어찌 뛰어난 근기[무착]를 저버릴 수 있으랴.”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무대 위의 꼭두각시 조종하는 것을 잘 보아라.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이
모두 그 속에 사람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강설》
이 삼구법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구구하다.
우선 임제 스님이 직접 말씀하신 삼구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면
구구한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제일구(第一句)[제일의 소식, 제일의 도리]는,
여기에 삼요라는 도장[제대로 갖춘 진리의 도장, 제법실상의 도장]이 하나 있다.
그 도장을 찍었을 때 찍은 도장이 종이에서 떨어지기 직전이라
붉은 글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주관에 해당되는 도장과
객관에 해당되는 붉은 글씨가 아직 나눠지기 전이다.
“주객이 나눠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그 뜻이다.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기 이전의 소식이다.
음양 이전의 태극이나 무극의 경지라고 보면 쉽다.
그러나 무극이나 태극송에는 이미 음과 양이 잠재되어 있다.
주객이 나눠지기 전에도 주객은 이미 잠재되어 있기는 하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一念不生]의 소식이다.
무생(無生)의 경지다.
마치 ‘도장을 허공에다 찍은 것과 같다’라고도 표현한다.
한순간도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본래 그대로 여여한 자리다.
부처니 보살이니 조사니 성인이니 범부니 중생이니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소리가
아이들의 동화처럼 들리는 경지다.
그래서 제일구의 소식을 알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된다고도 했다.
또 조사선(祖師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제이구(第二句)[제이의 소식, 제이의 도리]는,
무착 선사가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장안에서 오대산까지 일보일배(一步一拜)를 하면서
정성을 다해 갔다.
오대산 입구에서 한 거지노인의 모습을 한 문수보살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이 벽암록 35칙에도 보인다.
이러한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불교에서는 대부분 뜻을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알면 그뿐이다.
문수가 무착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남방에서 옵니다.”
“남방의 불교는 어떤가?”
“말세의 비구들이 계율이나 조금 지키며 삽니다.”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
“혹 3백 명, 혹 5백 명씩 모여 삽니다.”
이번에는 무착이 문수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불교가 어떻습니까?”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느니라.”
“대중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이니라.”
문수보살이 무착의 그와 같이 선사답지 못한 질문을 받고
방편으로 일일이 대화를 받아준 것은
무착선사 같은 그 정성스런 근기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객이 나눠지긴 했으나 그렇게 흔적이 오래 남지는 않는다.
제이구의 경지를 “물에다 도장 찍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찍을 때 찍히는 것이 있으나 도장을 떼면 흔적이 없다.
허공에다 찍은 것과 비교해 보라.
또 제이구의 소식을 알면 세상 사람들의 스승이 된다고 했다.
여래선(如來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제삼구(第三句)[제삼의 소식, 제삼의 도리]는 ,
꼭두각시나 인형을 움직일 때 잘 보면 모두가 무대 위에서
사람이 조종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인형으로 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다.
허수아비다.
사상(事相)과 경계와 상황들에 끌려 다니는 삶이다.
불교라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수처작주, 즉 환경이나 대상이나 경계에 끌려 다니지 말고
어디서나 주재자로 있으라는 가르침이 절실히 요구되는 경지다.
마치 도장을 진흙에다 찍은 것과 같다.
걸음 걸음이 상(相) 투성이요, 흔적 투성이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은 것과 물에다 찍은 것과 함께 비교해 보라.
제삼구의 뜻은 알아봐야 자기 자신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의리선(義理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삼구를 경절문(徑截門)과 원돈문(圓頓門)과 염불문에 비교해 보아도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삼구, 이구, 일구의 차원과는 멀리 벗어난 향상일구(向上一句가 있다.
무엇이 향상일구인가? "할!"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9-1 삼구 (三句)
上堂(상당)에 僧問(승문), 如何是第一句(여하시제일구)오
師云(사운), 三要印開朱點窄[側](삼요인개주점착[측])하고
未容擬議主賓分(미용의의주빈분)이로다.
問(문), 如何是第二句(여하시제이구)오.
師云(사운), 妙解豈容無着問(묘해기용무착문)이며 漚和爭負截流機(구화쟁부절류기)리오.
問(문), 如何是第三句(여하시제삼구)오.
師云(사운), 看取棚頭弄傀儡(간취붕두농괴뢰)하라.
抽牽都來裏有人(추견도래이유인)이로다.
그 다음에 앞에서도 다 어려웠지만 더 어려운 대목이 나왔는데
삼구니 삼현 삼요니 하는 내용입니다.
‘上堂(상당)에 僧問(승문), 如何是第一句(여하시제일구)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師云(사운), 三要印開朱點窄[側](삼요인개주점착[측])하고,
어떤 본에는 기울을 窄(착) 자, 어떤 본에는 이런 곁 側(측) 자, 이렇게 돼 있는데.
이것이 다 삼요인개주점착이라, 이건 뭔 말인고 하니
三要라고 하는 세 가지 비밀, 세 가지 욧점이라고 하는 도장이 있어요.
그럼 도장은 朱點, 붉은 인주에다가 찍어서 그걸 묻혀 가지고 찍었을 때
그게 도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는 어떤 경우인고 하니
주점(朱點)에다가 찍기는 찍었는데 아직 떼지를 않은 상태입니다.
側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窄이라는 것이나 側이라는 말이나.
三要印이 열렸어, 그런데 도장밥이 묻었으니까 틀림없이 표현은 됐는데
이게 안 뗐으니까 남이 모르는 거야.
주점칙이라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찍기는 찍었는데 들어가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未容擬議主賓分(미용의의주빈분)이로다’,
이 말이 그 말입니다.
主賓, 주인과 객을 주관과 객관, 나누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거긴 아직도 도장밥과 도장과 그것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찍기는 찍었어요, 지금 도장밥하고 도장하고 혼연일체입니다.
주객이 나눠지기 이전이여.
그러니까 미용의의주빈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제일구의 소식이고, 그것을 如人印空 그랬어요.
쉽게 이해하려고 하면 도장을 허공에다가 찍었다.
허공에다 찍으면 어떻습니까, 아무 흔적이 없죠.
찍으나마나입니다.
그게 제 일구 소식이여.
그 다음 제 이구 소식은 ‘如何是第二句(여하시제이구)오’ 그랬죠.
‘師云(사운), 妙解豈容無着問(묘해기용무착문)이리오마는
漚和爭負截流機 (구화쟁부절류기)리오‘ 그랬습니다.
妙解, 문수보살이죠.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그러나 漚和(구화), 방편상,
어찌 截流機(절류기), 아주 뛰어난 근기를, 저버리겠는가, 이 말입니다.
그래서 무착문희 선사가 일보일배하면서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서 문수보살을 만났어요.
소 먹이는 노인이었습니다.
문수보살을 만났는데 그게 문수보살인 줄 몰랐죠.
무착 선사가 오대산까지 일보일배하면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는데
문수보살이 그냥 있을수 있나요.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해 가지고 무착을 떠억 맞이하는 거라.
그게 ‘漚和爭負截流機 (구화쟁부절류기)리오’ 그 말입니다.
방편상, 그게 사실은 엉터리지만
일보일배하면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하는 게
그게 상근기 일은 아니야.
그렇지만 그만한 근기도 드물어.
그래서 그를 방편으로 맞아 주는 거요.
두 사람 대화입니다.
요즘 어디서 왔느냐 그랬어요.
무착이 말하기를 나는 저 남방에서 왔습니다.
그래 문수보살이 묻다가 남방불법은 어떠냐, 그랬어요.
그러니까 무착이 말하기를 남방 말세 비구들이
그저 계율이나 좀 지키고 그렇게 삽니다 그랬어요.
문수보살이 또 묻기를
그럼 대중들은 몇이나 되느냐 그러니까
무착이 말하기를 글쎄요, 총림에서 삼백 명도 살고
그저 많은 데는 오백 명도 살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 다음 무착이 문수보살에게 묻는데
여기는 불법이 어떻습니까,
여기의 불법의 분위기는, 불교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문수보살이 말하기를
凡聖(범성)이 同居(동거)하고 龍巳(용사)가 混雜(혼잡)이다,
범부와 성인이 같이 어울려 살고 용과 뱀이 막 뒤섞여 있다.
아주 대답이 다르지요.
또 묻습니다.
대중들은 그럼 몇이나 됩니까 하니까
前三三 後三三이니라.
그 유명한 전삼삼 후삼삼이 거기에서 나오는 대목이죠.
그걸 무착 선사는 이해를 못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라도 받아 준거요.
그 정도라도 문수보살이 받아줬다 하는 이야긴데
그건 예컨대 도장을 가지고 물에다 찍은 거와 같다 그랬습니다.
물에다 도장을 담그면 요철로 돼 있으니까
들어간 곳은 물이 들어갔을 것이고 밖으로 나온 양각 쪽은 나와 있을 거고.
그러니까 표시는 있다 이거야.
물에 담그고 있는 동안에는 표시가 있는 거야.
그 요철 모습 그대로 표시는 있어.
그러나 떼면 표시가 없어져 버려.
이게 제이구 소식입니다.
제일구 소식은 허공에다 찍으니까 아예 흔적이 없지만
제이구 소식은 물에다 찍으니까 찍어 있는 동안에는 소식이 있어.
그게 뭔가 표시가 있다고요.
그게 제이구 소식이라.
여기 그 알쏭달쏭한 임제 스님의 그 게송을 가지고 견주어서 보면 짐작은 갑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묻습니다.
‘如何是第三句(여하시제삼구)오’, 어떤 것이 제삼구냐.
‘師云(사운), 看取棚頭弄傀儡(간취붕두농괴뢰)하라.
抽牽都來裏有人(추견도래이유인)이로다‘ 그랬어요.
간취, 잘 살펴 보아라.
붕두농괴뢰, 저기 무대 뒤에서 허수아비 조종하는 것을 잘 지켜 보아라.
인형극을 상상하세요.
인형극은 줄로 당기든지 뒤에서 나무로 조종하든지 하는 거죠.
다 뒤에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
붕두는 무대입니다.
무대 뒤에서 괴뢰, 허수아비, 허수아비를 희롱하는 사람을 잘 살펴 보아라.
지금 우리가 허수아비가 말하고 듣고 하는 거에요.
抽牽이 都來裏有人 이다, 밀고 당기는 것이 모두 다 뒤에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어서 인형을 밀고 당기고 하듯이
우리도 가자면 가고 오자면 오고 듣자면 듣고 말자면 말고,
뭔가 그 주인공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이거는 이제 如人印泥(여인인니)라 그랬어요.
마치 도장을 가지고 진흙에다가 찍는 거와 같아서,
찍으면 어떻습니까 잘 찍히죠.
진흙 이겨놓고 한번 찍어 봐요.
도장을 떼어도 흔적이 요철로 남아 있습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 성인이 나와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해 봤자
그것은 다 흔적이 남는 일이고 본래부터 불필요한 일이고
하나마나한 일이고, 그런 차원으로 본 거에요 이게.
그러니까 이건 불교하곤 다르죠.
내가 (계속) 선은 불교하고 다르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제일구를 터득할 거 같으면
제일구 도리를 깨달은 사람은 佛祖,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된다 그랬어요.
그것도 禪에서 하는 소리지.
불조의 스승이 된다.
그 다음에 제이구를 터득한 사람은 人天爲師야,
이 세상 사람들의 스승이 된다.
그 다음 제삼구에 터득한 사람은 自求도 不了라,
자기 구제도 할 수가 없는 경지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려운 대목인데,
그보다 더 어려운 대목이 다음에 나오는 삼현삼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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