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일이 제 뜻과 맞지 않는 방향으로 흐를 때,
일이 아니라, 영혼을 생각한다면 언제나 십자가가 답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그 첫 마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면 자기의와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다시 구약으로 돌아왔습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묵상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본문 주해)
1절 : 열왕기하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로 시작한다. 아합이 죽은 후 아하시야가 왕이 되자 이스라엘의 국력이 쇠약해진다.
아합 때 이스라엘을 섬기던 모압이 때를 놓치지 않고 배반한다.
2절 :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심각하게 다침으로 병이 되어 심각한 지경이 된 듯하다.
그러자 그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려고 사자를 보낸다.
아하시야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이방신에게 물으려 한 것은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영향을 받고 자라온 그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어떤 말씀을 주실지 짐작했던 터,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4절 :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아하시야가 보낸 사자에게 엘리야가 말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책망하면서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전한다. 그리고 엘리야는 다른 곳으로 간다.
5~8절 : 사자들이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을 아하시야가 보고 왜 돌아왔느냐고 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만난 선지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엘리야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한다.
그러자 왕이 그의 외모에 대해 묻자, 이들이 ‘허리에 가죽띠를 띤 털이 많은 사람’이라 특징을 말하자 아하시야는 그가 엘리야인 줄 안다.
(나의 묵상)
아하시야는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바알세붑을 찾음으로 더욱 하나님께 범죄한다.
아합과 이세벨이 아들의 이름을 아하시야- ‘여호와께서 붙드시다’-로 지은 것은 의외이다.
이는 그들의 여호와 신앙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이방신을 향한 양다리, 세 다리 걸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아하시야는 이름값을 못하고 하나님의 붙드심을 무시하고, 이방신을 찾는다.
아하시야의 인생에 대해 어떤 평가가 있었는지는 이미 열왕기상 끝에 나타나 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왕상22:51~53)
그런데 그냥 내버려두어도 죽을 아하시야에게 하나님께서 굳이 ‘너는 죽을 것이다’ 라고 엘리야를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시는 것이다.
모든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인 것은 아니지만, 아하시야의 병은 우연이 아니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진 사건은 오므리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서곡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하시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라는 사인을 엘리야를 통해 주시고, 에그론을 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막고 돌려보낸 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작은 신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이렇게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저 무감각하다. (내일 본문을 보면 아하시야는 무감각한 것을 넘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를 죽이려고 든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나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태어난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도 ‘너는 죽는다’라는 사망 선고가 이미 내려졌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내가 받은 사망 선고를 물려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라는 말씀에 아하시야는 오히려 발끈하여 죄 위에 죄를 더 지었지만,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느냐?’ 하는 말씀을 받은 나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십자가를 붙든다. 이는 물론 내 힘이나 능력이 아니다. 어찌 되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니, 이는 오직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곤경에 처했을 때 나는 누구를 붙드는가?
복음을 몰랐을 때는 돈으로, 사람으로, 인간적 지혜로 그 곤경을 벗어나 보려고 아등바등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점점 알아가니 곤경에 처했을 때만이 아니라, 기쁜 일이 생겼을 때도 찾을 이는 주님밖에 없다.
주님께서 내게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종노릇하던 나의 옛 생명은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고, 나는 이제 아들의 생명으로, 흔들리지 않는 아들의 나라를 사는 자가 되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만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어떤 큰일 때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삶의 매순간마다 주님을 떠올리는 순간이 많아짐을 느낀다.
그러면 사탄은 또 귀에 찰싹 붙어 말한다.
‘네 모양을 봐라. 그게 매순간 주님을 떠올리며 사는 자의 모습이냐?’
잠시 풀이 죽지만, 나는 아주 속지 않는다. 그놈의 참소하는 말 때문에 뒷걸음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릴 뿐이다.
“예수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묵상 기도)
주님,
저는 매일 굉장한 신앙고백을 하며 삽니다.
그러나 저의 삶의 모습은 널뛰기를 합니다.
이 괴리가 하나님 나라에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런 중에도 저를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사탄의 정죄를 뒤로 하고,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늘 승리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금세 제 잘난 줄 알고 끄떡거릴 테니
생사화복의 모든 순간을 인정하며 오직 성령님만 의지합니다.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