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동 난장이는 오래 전에 죽었다. 철거반의 햄머질 몇 번에 살던 집이 폭삭 주저앉은 그 날, 난장이는 벽돌 공장 굴뚝 위에서 달나라를 향해 검은 쇠공을 쏘아 올리고는 떨어져 죽었다. 난장이에겐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다. 그 중 맏인 영수는 곧 죽었다.
영수는 다니던 은강그룹의 회장 동생을, 회장으로 오인하여 칼로 찔렀다. '거인'을 죽인 난장이네 큰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이후 난장이의 부인과 작은 놈 영호, 아파트입주권을 훔쳐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가랭이를 벌렸던 영희의 행방은 알려진 바 없다. 여기까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행복동 난장이 일가의 기구한 삶의 궤적은.
- 자, 이제 정리를 해 보자.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살기가 좀 나아진 거야, 어떤 거야? 월급 명세서 열 두 번에 성과상여금 지급명세 두 번 받는 동안, 마누라 가계부 수입란 메워가듯 우리에게도 뭔가 '의미로운 진전'이란 게 있었던 거냐구.
- 변한 건 어디에도 없어. 손바닥 굳은살이 두텁다 못해 각질화 되고 이마에 주름살이 조금 더 패였다는 걸 빼고는. 그 또한 박 터지게 일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에 조금의 변화도 허용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메타포아인 게지.
- 그래도 정리는 해야 해.
- 필요하다면, 말해주지. 비극적인 한 해였어. 이것 말구 더 적절한 수사가 있다면 자네가 찾아주게.
누군가는 87년 여름, 창원대로 어디쯤에서 작은 놈 영호를 보았다고 했다. 머리띠를 두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무수한 깃발을 따라 거리를 질주하더라고 했다. 성장기의 영양결핍과 초과근로로 발육이 덜 된 사지를 휘저으며 더없이 씩씩하게 달리는데, 영락없는 영호라고 했다.
97년 겨울에는 영희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은강의 기름바다에 팬지꽃을 던지며 줄 끊어진 기타로 꿈을 노래했던 영희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어디론가 잰걸음을 치더라고 했다.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심의 불빛 속으로 그 모습까지 숨겨버렸다고 했다.
- 비극의 시작은 발전산업동지들의 패배였네. '패배'라는 단어에 혹시 이의가 있다면, 이렇게 해 두세. 패배의 궁극적인 귀결은 승리다, 대저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승리의 싹을 잉태하지 않은 패배란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따지지는 마세.
- 그래, 비극의 절정은 무엇이었나?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탄압이었나?
- 어느 파업참가자에 대한 31억짜리 급여가압류 통장을 보았나? 그 자가 평생을 발전소에서 뒹굴어도 벌 수 없는 돈이 한달 남짓한 불법파업 참여의 대가로 청구되어졌네. 나는 한 집안의 가장에게 들이밀어진 이 통장이야말로 안전가옥의 흰색 욕조보다 훨씬 두려운 폭력이라고 생각하네. 살인범에게도 참작되어야 할 정상이란 게 있고, 고려되어야할 양형의 기준이 있는 걸세. 그러나 이 불쌍한 게릴라들의 법정에는 변론마저 허용되지 않았네.
변호인은 자기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피고인은 집에서는 한 집안을 이끌어가는 장남, 좋은 형, 좋은 오빠였고, 공장에서는 책임감 강한 산업전사, 이해심 많은 동료, 어려운 사람들을 앞장서 도와 고통을 나누어지는 신의의 동지였고…, 이러한 피고인이 어느날 갑자기 저 끔찍한 살인을 생각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그러니까 임금·휴가·부당해고자 복직 문제들을 놓고 회사와 개선점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한 외에…, 사용자가 힘으로 짓밟아 노사협조를 일방적으로 파기함은 물론 산업평화를 스스로 깨뜨려 노사의 불이익을 초래함을 목도하는 순간, 은강그룹을 이끌어가는 총책임자, 즉 회장을 살해하겠다는 우발적인 살의를 품게 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난장이의 큰아들은 밭은기침을 했다. 밭은기침을 하며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가 머리를 떨어뜨린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의 여동생이 울음을 참기 위해 입에 손수건을 대었다. 그의 여동생은 참았는데 뒤쪽의 몇 명이 못 참고 소리를 내었다. 정리가 여공들을 말렸다. 난쟁이의 큰아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우발적인 살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변호인이 말했다. "방금 한 말을 다시 해주시겠습니까?"
"우발적인 살의가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조세희, p.288∼289, 2000, 문학과 지성사)
- 국회에 일하는 친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네. 제주한라병원파업에 대한 국정감사 증인신문이 있었다고 했네.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전원이 해고되었네. 단체협약 위반은 물론이고, 징계절차의 정당성에도 의문이 남았네. 병원은 골치 아픈 조합원들의 빈자리를 수십명의 계약직들로 채웠네. 병원 입장에선 노조무력화와 완벽한 구조조정의 일석이조를 이루어낸 셈이지.
- ….
-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판정이 나면 구제명령에 따르겠냐는 어느 의원의 질문에 원장이 그랬다더군. '대법원까지 가겠다'라고. 나는 그 얘기를 전해들으면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어. 당장 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해고의 현실적 조건과는 무관하게 우리의 법률은 무려 수삼년에 이르는 길고 긴 유예기간을 두고 있지 않은가. 그 때처럼 법이 현실로부터 이탈해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또 있었는지.
- 사용자에 대한 처벌도 법에 나와 있네만.
- 그 얼마나 가증스러운 법의 외피인가 말일세. 수백명의 가장들이 구속되는 동안 부당노동행위로 구속된 사용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내게 가르쳐 주게. 검사들에게 '진정 부당노동행위를 반사회적 범죄라고 생각하시오?'라는 설문조사라도 해보게. 당초부터 처벌가능한 메커니즘이 아닌 게야.
- 법전 속의 죽은 범죄라는 말인가?
- 법도 때로는 알리바이가 필요하거든.
변호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 당시의 심적 상태를 간단히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철도 들고, 고생도 많이 해본 공장동료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려, 엉엉 소리내어 우는 현장에 저는 서 있어보았습니다. 웬만한 고생에는 이미 면역이 된 천오백명이, 그것도 일제히 말입니다. 교육도 받고, 사물에 대한 이해도 깊은 공장밖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 그럴 수 있을까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들이었습니다. 제가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아뇨, 내가 믿겠습니다"
"그 분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살해 동기입니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조세희, p.288∼289, 2000, 문학과 지성사)
- 경제자유구역법이 통과되었더군. 비극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지. 외자유치를 위해 자국 근로자의 최저근로기준이 희생된 세계 최초의 사례가 아닌가.
- 통탄할 일이었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한 거지?
- 사회는 진화하고 있어. 경제동물로의 유전자 변이가 이미 완성단계에 와있는 것 같아. 경제동물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아.
"제가 은강으로 간 것은 지금 피고석에 서 있는 김영수군과 임원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한 직후였습니다."
"치료를 받다말고 서울로 오려고 출발했었다는 데 그것도 알았습니까?"
"알았습니다"
"왜 서울로 오려고 했을까요?"
"본사로 올라가 높은 분들을 만나봐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영수 군은 공장에 나와 있는 사용자측 사람들이 이미 이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그러나 버스터미널에서 예의 그 폭력배들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모두 공장 원면 창고로 끌려가 또 한차례 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영수 군에게 들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조세희, p.293∼294, 2000, 문학과 지성사)
- 폭력배들이 가세하고 있네. 주먹이 아닌 볼펜으로 심장을 파내는 자들이지.
- 비극의 대단원쯤 되겠구만.
- 가뭄도 파업권 제한의 사유가 된다고 믿는 얼치기들일세. 얼마 전에는 그들 가운데 유독 돈독이 오른 꼬붕이 총대를 맸더군. 사용자단체의 헌금으로 노조에 대한 악담을 퍼부어 놓았더군. 경제적, 법적 영역에서의 우위를 이제 이념의 영역까지로 확장시키려는 저의인 셈이지. 어떤가, 이것이야말로 총체적 억압구조라 할만 하지 않은가?
변호인은 피고측 증인으로 나온 지섭이 말한 억압이란 말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은강그룹회장이 산하 회사 공장종업원들에게 쓰는 억압은 언제나 생존비 또는 생활비와 상관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인 핍박을 의미한다고 지섭이 말했다. 그는 계속해 이런 억압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그 억압을 정면으로 받는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저항권 행사를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이든가 생존을 포기한 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보기에 영수의 살인은 강요된 행위였다고 말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조세희, p.291∼292 재구성, 2000, 문학과 지성사)
- 자네의 비극론에 대해 '법과 원칙이 존중되는 노사관계 정립의 해'였다는 반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 공무원들의 페이퍼와 언론기업의 싸구려 공산품을 제외하고 그러한 반론이 존재한다면 성의를 갖고 읽어볼 생각이네.
- 그만 나가자구. 갑자기 광장이 떠올랐어. 갑자기 여기가 지긋지긋해졌어. 한 몸 의탁할 밀실이야 없을라구.
- 최인훈의 말처럼 광장은 대중의 밀실인 셈이지. 지금 우리는 광장에서 마저 갇혀있네. 돌아갈 밀실은 없어. 나는 남아야겠어. 올해 내내 갈아두었던 칼이 있거든. 난장이에게서 산 거야.
행복동 난장이는 오래 전에 죽었다. 철거반의 햄머질 몇번에 살던 집이 폭삭 주저앉은 그 날, 난쟁이는 벽돌공장 굴뚝 위에서 달나라를 향해 검은 쇠공을 쏘아 올리고는 떨어져 죽었다. 난쟁이에겐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었다. 그 중 맏인 영수는 곧 죽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영수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죽어 짜부라 들기는커녕 형형한 눈빛으로 가족들을 찾아다니더라고 했다. 도심의 미망으로 숨어 들어간 여동생과 노조공화국의 마타도어 속으로 함몰해버린 남동생을 찾으러 수없이 많은 난장이의 큰아들들이 살기마저 번득이며 도심을 활보하더라고 사람들은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