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몽니가 만든 ‘대법원 강태공’
“강태공처럼 세월을 낚고 있습니다.”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는 최근 주변에 이 같은 심경을 밝혔다고 한다. 낚시를 하며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나기까지 때를 기다리다 70대에 재상에 등용돼 뜻을 펼쳤던 춘추전국시대 인물인 강태공에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8월 29일 오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렸지만 55일째 임명동의안이 처리되지 않고 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7∼10층에는 한 층에 대법관실이 3개씩 있다. 하지만 임명이 아직 안 된 오 후보자는 그곳 대신 1410호에 있는 ‘대법관후보자실’로 출근하고 있다. 매일 출근한 뒤 하루 종일 자료를 읽고 대법원 직원들과 번갈아 오찬도 한다. 그러나 대법관 업무는 볼 수 없다.
언론계에선 기사만 안 쓰면 기자가 제일 좋은 직업이라는 말이, 법조계에선 판결문만 안 쓰면 판사가 제일 좋은 직업이란 말이 있다. 여기에는 기사를 쓰고 판결문을 쓰는 게 그만큼 고된 일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것이 업의 본질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타의에 의해 55일째 업무를 못 하는 오 후보자가 강태공을 언급한 것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사청문회에선 오 후보자가 과거 내렸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판결 등이 논란이 됐다. 다만 결정적 흠결은 없었다는 게 세간의 평가인 것 같다. 오 후보자는 2011년 운송수입금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17년간 일한 버스기사를 해임한 고속버스 회사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판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은 “근래 본 가장 비정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치우치지 않은 잣대로 엄격하고 공정하게 판결하는 게 판사가 갖춰야 할 자질이다. 다정함은 장점은 될 수 있지만 좋은 판사의 핵심 역량은 아니다. 이 사건에서 노사가 합의한 단체협약에는 “회사의 재산을 횡령하거나 운송수입금을 부정 착복한 증거가 확실한 자는 노조 지부와 협의 없이 해고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오 후보자의 판결은 금액과 관계없이 이를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격 미달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169석을 가진 민주당이 계속 임명동의안 처리에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윤 대통령의 첫 대법관 임명에 딴지를 걸기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국회 문턱을 통과하지 못해 장기간 대법관 임명이 지연된 게 처음은 아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이상훈 전 대법관의 후임이 140여 일 만에 임명된 게 최장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재형 전 대법관이 9월 퇴임한 뒤 대법관 13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는 주요 사건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관 1인당 연간 3500건 이상의 사건을 처리하는 만큼 50여 일 공백은 500여 건의 사건 처리 지연으로 이어진다.
야당의 ‘몽니’로 인한 재판 지연은 결국 국민들의 피해로 돌아간다. 국민들도 대법관 후보자가 지방법원장급 급여를 받으며 강태공처럼 세월만 낚기를 바라진 않을 것이다.
황형준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