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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야호♬ (lil_ili@hanmail.net)
친정 ★ 야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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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빌려주세요!
Please, Lend me your name. <11>
“안녕하세요!”
우렁차게 인사를 내뱉으며 사무실 문을 열자 벌써 이틀째 정지화면이라도 보는 듯 같은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느긋한 표정으로 편하게 앉아 신문을 읽는 한채수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하며 눈치만 살피는 사무실 덩치들.
내가 ‘에휴’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 문을 닫자 덩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는가 싶더니 쪼르르 내게로 다가온다.
그러더니 애써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오바스럽다 느껴질 정도의 큰 목소리로 내게 말을 꺼냈다.
“아, 안녕. 한이야. 오늘은 어떤 야식을 해 줄 거니?”
마치 국어책을 또박또박 한글자씩 읽듯 내뱉어진 덩치의 말에 분위기는 더 썰렁해졌지만 그는 꿋꿋하게 두 눈을 빛냈다.
난 매고 있던 책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애써 활기차게 대답해주어야 했다.
아마 나까지 침울하게 대답하면 그들은 새우만한 눈으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테니까.
“오늘은 골뱅이 무침이에요. 기대하세요, 저 골뱅이 무침 진~짜 잘해요! 킹왕짱! 대박! 작살! 신의 손, 신의 손!”
나 스스로 민망하다 느껴질 정도의 자화자찬을 내뱉으며 ‘음화화화화!’하고 웃자 덩치들도 그제야 안심한 듯 날 따라 웃었다.
애써 크게 웃으며 힐끔 한채수를 바라보자 그는 신문을 다 읽은 듯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신문을 던지더니만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시선은 다른 곳으로 휙 돌아가며 웃음은 멈추었고 덩치들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웃음을 뚝
멈추었다.
이런 짓을 한 일주일만 반복하면 파블로스였나 파트라슈였나 하는 심리학자의 개처럼 한채수만 보면 자동 정지하게 생겼다.
“골뱅이는 어디서 났냐?”
“아, 아까 사무실 앞에서 달수 형이 전해주고 가셨어요. 제가 학교 끝나기 전에 골뱅이 좀 준비해달라고 문자 했거든요.
그랬더니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더라구요. 같이 들어가자니까 달수 형님은 무섭다고 바로 엄마 포장마차로 출근을……합!”
뒤늦게 입을 막아보았지만 한채수는 ‘달수가 그랬단 말이지?’하고 두 눈을 번쩍였다.
엄마 포장마차 때문에 금새 친해진 달수 형님한테 한채수가 괜히 무어라 할까 걱정스러워 도와달라는 눈으로 덩치들을 보았으나
그들은 ‘오늘의 첫타자는 달수인가……’하는 표정으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날 도와줄 사람은 커녕 다들 내가 도와줘야 할 분위기길래 한숨을 푸욱 내쉬며 한채수를 다시 바라보자 그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 달수 형님은 그냥 농담으로……. 에, 에이씨! 좋아요, 솔직히 말할게요. 한채수씨가 한번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요.
어제부터 사무실만 오면 오전이고 오후고 가릴 것 없이 다섯명 이상은 쥐어터져 나가는데 누군들 안무섭겠어요?
솔직히 나도 이런 분위기의 사무실 오는거 싫다, 이거에요. 숨막혀 죽을 것 같잖아요. 막말로 한동이씨가 돈 갖고 튀었지,
우리가 갖고 튀었……읍, 읍!”
에라이 모르겠다. 죽이려면 죽여봐라 하는 심보로 한채수를 향해 삿대질까지 서슴치 않으며 말을 쏟아내고 있는데
느닷없이 크고 투박하고 거친 손이 내 입을 터억 막았다.
입과 코까지 막아버린 거대한 손바닥에 놀라 ‘읍!’하고 소리를 내보았으나 내 입을 막은 덩치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더 꽉 막으며 ‘하하, 하하하’하고 어색한 웃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혀, 형님 얘가 요즘 공부를 많이 한다더니 그래서 그런가봅니다. 버, 벌써 졸린가? 응? 그렇지 한이야?”
“하이고마! 얘가 조크를 아는 애네, 조크를! 행님, 조크 뭔지 아시죠잉? 노~옹담 말입니다. 노~옹담!”
“한이야, 고, 골뱅이 무침 한다면서? 내 골뱅이 무침 매니아다, 매니아! 자, 가서 얼른 만들어 온나.”
한채수를 향해 ‘나 긴장했음’ 또는 ‘나 지금 떨고 있음’ 등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투와 표정 그리고 목소리로
덩치들이 말을 주루룩 내뱉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여전히 한채수를 향한채 몸만 내 쪽으로 돌려 날 부엌으로 재빨리 들이밀려 하고 있었다.
입을 막고 있는 손을 풀어준다 싶더니 한채수를 향해 무어라 더 반박할 수 없게 덩치들은 날 부엌쪽으로 팍 밀었다.
그것도 거친 발길질로 엉덩이를 차면서.
멍들었기만 해봐라, 사진 찍어서 고소할꺼야. 멍들면 전치 4주야, 4주! 뭐, 곽수리가 말해준 거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쳇! 불쌍해보여서 도와줬더니만, 도와줘도 난리야! 어휴, 덩치는 산만하면서 왜저렇게 소심한가들 몰라.”
나 이제 덩치들은 하나도 안무섭다.
사실 예전엔 한채수 및 사무실 덩치들 모두가 무서웠으나 이곳에서 무서워해야할 사람은 한채수뿐이라는 것을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덩치들은 사실 덩치만 산만하고 마음은 모두 한채수 양심만해서(깨알) 소심하고 겁많고 삐지면 겁나 오래가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알게되었냐 하면, 한동이씨가 문제의 돈을 갖고 나른 엊그제 이후. 그러니까 어제부터 한채수는 사무실에서 아주 작은
트집이라도 잡힌 덩치는 복날의 개패듯 팬 후 ‘한동이 찾아와 이새끼야!’라며 사무실 밖으로 쫓아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덩치들이 벌벌 떠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날 돕겠다며 부엌으로 슬금슬금 도망쳐오기까지 했다.
손, 발 가릴 것 없이 덜덜 떨면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것들이 정말 조폭이 맞나 싶기도 하고…….
“한동이 어디있는지 아무도 몰라?”
한채수가 나즈막히 내뱉은 목소리가 부엌까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오늘도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힐끔 보자 오늘은 어제보다 쫌 빠른 시간에 시작했다. 하긴 오늘은 내가 ‘한동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으니까 나 때문에
빨리 시작한 걸수도 있겠다.
힐끔 고개를 돌려 한채수를 바라보자 오늘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덩치들을 씹어먹을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의 가엾은 덩치들은 한채수 눈치만 살피며 ‘그게 아직……’이라는 말을 슬그머니 내뱉었으나 결국 그 끝은 흐리고 만다.
“아직 몰라? 이 새끼들아, 니들 놀고 먹냐? 잠자는 시간도 쪼개서 찾아오라는 말이 우습게 들려?”
오늘도 한 놈 잡았나보다.
한채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억! 형님, 제발!’ 부터 시작해서 ‘형님! 차라리 죽여주십쇼!’하는 절규까지 들려온다.
요즘들어 느끼는 건데 한채수라는 사람이 10할로 이루어졌다면 1할은 멋있는 모습일지 몰라도
나머지 9할은 분명 괴팍, 이기심, 폭력, 폭언, 타고난 조폭, 돈, 기타등등 세상에서 안좋은 것 전부! 일 것이다.
오늘 걸린 놈도 참 안쓰럽지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 있는데 슬그머니 누군가 부엌으로 숨어들었다.
오늘은 또 누구냐? 하는 표정으로 보자 사무실에서 가장 왜소한 체격의 양가 형님이었다.
“얼레? 오늘은 양가 형님이 부엌에 숨는 날입니까?”
“응? 에이, 순서가 으디있냐? 걍 먼저 자리 맡은 놈이 임자지~! 안그냐?”
“예예.”
건성으로 대답하며 골뱅이 무침 만드는 것에 다시 집중했다. 빨리 만들어서 내놓지 않으면 한채수가 분명 시비를 걸 테니까.
오늘은 기필코 트집 잡히지 않고 빨리 야식 만들어주고 빨리 청소하고 빨리 퇴근할테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골뱅이 무침을 만들고 있는데 어느새 내 옆까지 슬그머니 다가온 양가 형님이 날 빤히 쳐다봤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요리 만드는 것에 집중하려 해도 누군가의 시선이 빤히 얼굴에 닿자 더이상 요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 아니……. 나 뭐 도와줄꺼 없는가 해서.”
“없어요. 가만히 계시는게 도와주시는 거에요. 어제 철수 형님도 그러셨어요.”
“그려? 걔는 원래 요리 몬해서 그려~! 난 잘혀.”
그렇게 말하고나서 자기도 머쓱한 지 양가 형님이 껄껄 웃더니 힐끔 한채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채수가 부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걸린 놈 패는 것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다닥 고개를 돌려
다시 날 바라보았다.
에휴, 사무실 덩치들도 참 인생 가엾다. 나도 그렇고……. 전부다 한채수 때문이야! 에라이, 한 재수야!
“에휴, 동이 새끼 뭣땜시 돈을 갖고 튀어가꼬……에휴. 그걸 잡을 수도 없고…….”
“워메? 양가 형님,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옛말에도 있지 않습니까. ‘잡을 수도 없고’가 아니라 ‘잡히지도 않고’죠.”
내가 그렇게 말하며 골뱅이 무침에 들어갈 양념을 열심히 버무리며 낄낄 웃자 양가 형님이 양념을 비비고 있던 바가지를
휙 뺏어가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녀. 안잡는겨. 우리가 채수 형님 밑에서만 몇년을 굴렀는데 그걸 못잡을까. 다들 동이 잡히면 채수 형님 손에 죽을까봐
무서워서 잡지를 않고 있는겨. 그래봤자 일주일이여. 우리가 일주일 이렇게 줘터지면서 토끼는 동안 그새끼 멀리 도망 몬가면
그땐 형님이 직접 나설겨. 그때는 뭐……우리도 장담 몬하는거고.”
그러면서 자기가 골뱅이 무침 양념을 조물딱 조물딱 무치기 시작했다.
힐끔 보니 잘 무치는 것 같아서 면을 삶기 위해 냄비에 물을 받았다. 쏴아아 하고 냄비에 물이 쏟아져내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가 형님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양가 형님 손은 씻으셨죠? 그리고 한동이씨는……괜찮을까요?”
“아, 손……에이, 뭐 안죽으면 되는겨~! 동이는 뭐, 뒤지거나 살거나 둘 중에 하나여.”
윽, 나 골뱅이 무침 안먹을꺼야.
인상을 찌푸리며 양가 형님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진정 얼굴에 철판을 깔아버린 듯 아주 당당하게 손가락 열개를 이용하여
양념을 골고루 무치고 있었다.
새빨간 양념은 그 어느때보다 맛있게 보였으나 난 차마 그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약 저게 한 젓가락이라도 입에 들어간다면 난 분명 토할거다. 분명!
“혀, 형님 이제 됐어요! 다 잘 비벼진 것 같아요. 나머진 제가 할게요, 이제 그만 가서 쉬세요. 하하, 하하하.”
그렇게 말하며 더이상 참지 못하고 양가 형님 손에서 양념 바가지를 빼앗았다. 양가 형님은 아쉬운 듯 입 맛을 쩝 다지며
양념 바가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양가 형님의 하회탈 같은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자 무언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건 해탈의 경지에 올랐을 때 맞이하는 웃음 폭탄 같은 기분이어서 난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아야했다.
어, 어떻게 사람을 정면으로 보고 웃겠는가. 난 예의가 바른 소녀였기 때문에 차마 그런 짓 따위…….
“푸흡.”
“응?”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님. 아휴, 혓바닥에 먼지가…….”
“그럼 마저 수고해라.”
한채수가 살짝 잠잠해진 것 같자 양가 형님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저벅저벅 부엌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힐끔 그쪽을 바라보자 이미 한차례 한채수의 난이 끝난 듯 소파 위엔 반쯤 시체가 된 덩치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으.
양가 형님이 씻지 않은 손으로 조물딱 거린 양념 바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탁 쳤다.
“악!”
정말, 진짜, 진심으로 놀라 악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양념 바가지들 뒤집을 뻔 했으나
엄청난 순발력으로 양념 바가지는 지킬 수 있었다.
아마, 이걸 뒤집었다면 난 한채수한테 골뱅이 무침 양념과 똑같은 색의 피부를 가질 때까지 맞았을 지도…….
어, 엄마. 나 갑자기 오, 오싹해졌어. 한채수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암, 그렇고 말고.
“야, 뭘 그리 놀라는겨. 내가 더 놀랐잖어~”
“야, 양가형님! 아씨, 놀랐잖아욧!”
“아니 난 그저 내가 쫌 도움이 됐었는겨? 하고 물어보려고……. 니 뭐 내한테 죄진거 있는겨? 너무 놀라니까 그게 더 이상하네.”
그러면서 껄껄 웃는 양가 형님의 양 귀를 잡고 박치기를 아주 세게 해버리고 싶었으나 아직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나한이 방년 십구세의 나이로 사람을 죽일 뻔 했어. 그것도 박치기로.
원망스레 양가 형님을 바라보자 양가 형님은 여전히 하회탈 같은 얼굴로 껄껄 웃으며 소파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 양반 저거 내가 방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부러 날 놀래킨 것 같은데…….
양가 형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워메, 빨리 해야겠다.”
힐끔 시계를 바라보자 어느새 한채수의 인내심에 한계가 다다를 듯한 시간이 되어있었다.
이 이상 꾸물꾸물 거리다간 한채수가 ‘골뱅이 캔 만들러 갔냐!’하고 소리를 지를 것이 뻔했기 때문에 다 삶은 면을 찬 물에
데치자자마 양념을 부어 보기 좋게 버무렸다.
됐어, 이정도면 완벽해! 퍼펙트!
“골뱅이 무침 다 됐어요. 야식 드세요!”
우렁차게 외치며 골뱅이 무침을 들고 소파로 향하자 반쯤 시체가 되어 널부러져 있던 덩치들이 벌떡 일어나 모여들었다.
그들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한채수를 바라봤다.
그는 무엇이 못마땅한지 담배를 입에 문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이.”
느닷없이 한채수가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에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의 시선이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난 전부 알고 있어, 솔직히 말해.’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길래 난 한동이씨가 준 계좌번호 때문이가 싶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왜요?”
“너……아니다. 됐다.”
뭐지? 뭐길래 말을 하다가 마는거지? 왜? 대체 왜?
한채수가 말을 중간에 이상하게 멈추자 내 뇌에선 호기심이 끊임없이 뿜어져나왔다.
입안에서 ‘뭔데요? 왜요?’하는 말들이 꾸역꾸역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신이 내렸던 것이
바로 ‘호기심’이라는 걸 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 손으로 입을 터억 막았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왜요? 뭔데요?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아, 결국 내뱉었다. 그래도 내뱉고 나니까 속은 시원하네.
스스로를 향한 패배감과 기쁨이 뒤엉킨 이상한 표정으로 한채수를 바라보자 한채수가 인상을 단박에 찌푸렸다.
어지간하면 표정 변화 없던 사람이 요즘 들어 부쩍 표정 변화가 잦아졌다.
물론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는 방향의 부정적인 표정 변화들이지만.
“먹을 거 앞에두고 표정 참 보기 좋다. 먹으라는거냐 말라는거냐.”
“아닙니다. 맛있게 드십시요.”
그러면서 스마일~을 지었는데.
“먹지 말라고?”
돌아오는 것은 한채수의 핀잔뿐이었다. 크흑! 이 엄청난 굴욕감!
결국 난 무표정한 얼굴로 ‘아니요’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렇게 마음을 확 놓으려는 찰나, 덩치가 자신에게 건네주는 젓가락을 집으며 한채수가 날 향해 물 흘러가듯 나즈막히 물었다.
“너 정말 한동이에 대해서 아는 거 없지?”
하마터면 ‘있어요!’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칠 뻔 했다.
재빨리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러자 한채수는 날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그럼 말고.’라며 심드렁한
대답과 함께 골뱅이 무침을 먹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이딴 식으로 남의 콩알만한 심장을 들었다, 놨다 아주 자기 멋대로다. 자기 멋대로!
한채수의 한 재수한 플레이에 참을 인을 세기며 마음을 다 잡았다.
‘에이, 내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하지만 더럽고 치사해도 그만 둘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했다.
드라마나 영화 보면 이럴 때 ‘이제 안해! 그만두겠어!’라며 화끈하게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던데…….
그래,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였던거지.
에휴 하는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한동이씨가 준 계좌번호가 생각났다.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며 한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계좌에 들어있을 돈은 한채수의 통장에서 나온 돈 같은데 확실히 그렇다는 물증도 없고…….
에라이, 나도 몰라! 하는 심정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골뱅이 무침을 두어젓가락 먹던 한채수가 말했다.
“나한이 내일하고 내일모레 휴가다.”
“예?”
내가 놀라 한채수를 바라보자 덩치들도 덩달아 놀란 듯 한채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채수는 뭘 그리 놀라냐는 표정으로 사무실에 있는 모두를 향해 말을 이었다. 다만 시선은 내게 꽂혀있었지만.
“내일 토요일이야.”
“원래 주말에도 출근하라고 하셨……”
“이번 주말에 내가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사무실 오프(off)다.”
“앗싸!”
아, 너무 우렁찼나.
나도 모르게 앗싸! 부터 내질렀는데 순간 사무실이 조용해진다. 힐끔 눈치를 살피자 모두 ‘너무 대놓고 좋아했어, 너.’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하지……하고 한채수의 눈치를 살짝 살피자 그가 갑자기 픽 웃었다.
그러더니 결국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나하인, 니가 물건인 건 알고 있었는데……하하하!”
한채수가 눈가에 웃음 주름이 질 정도로 크게 웃다니.
일년에 몇번 볼까말까한 광경에 멍청한 표정으로 한채수를 바라보았다.
슬쩍 눈치를 살피던 덩치들도 한채수의 웃음 소리와 내 표정에 결국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웃음의 소재가 된 이 상황에서 대놓고 크게 웃을 수 없는 난……난, 어쩌라구!
“하하, 하하하.”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웃어야지.
하하, 하하하.
하지만, 그때 나는 한채수의 ‘휴가’ 따위에 넘어가 웃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한채수가 아무리 눈가에 웃음 주름이 질 정도로 웃어도 결국 그는 마음보단 머리로 계산을 끝내는 남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
*
“할머니!”
앞으로 두번 다시 없을 지도 모르는 주말 휴가에 신이나 토요일날 눈을 번쩍 뜨자마자 꽃섬이 할머니네로 달려왔다.
피곤해 죽겠다고 죽는 소리를 해대는 사름이와 수리의 두 손을 억척스레 잡고 할머니의 집 문을 열자 할머니가 반가운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날 반겼다.
“아이고, 다리 아플텐데 요까지 또 올라온거가?”
“이제 이정도는 거뜬하다니까!”
“아아, 난 안거뜬해. 날 죽여, 날 죽여라!”
달동네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에서 널부러져 ‘난 더이상 못가’를 연발하던 수리는 결국 사름이의 등에 업혀 올라왔다.
그럼에도 사름이는 죽는 소리 하나 없이 쌩쌩하게 날라다니는데 오히려 수리가 죽는 소리를 골골 낸다.
수리의 죽는 소리에 할머니가 무서운 표정으로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높게 들었다.
“이년이 노인네 앞에서 몬하는 소리가 없제? 그래, 니 한번 오늘 디지바라!”
“이 망할 노친네! 나 죽는다고! 에이씨!”
수리의 거친 입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튀어나오기 때문에 매를 더 버는 경우가 많다.
결국 오늘도 할머니의 빗자루에게 보란 듯 엉덩이를 내준 수리는 악악 소리를 내며 마당을 뛰어다녀야만 했다.
뭐 죽는 소리 내던 것 치곤 쌩쌩하네.
수리가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질러가며 도망가는 것을 보자 사름이가 먼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지러지듯 웃기 시작했다.
마루 위에서 배를 잡고 웃는 사름이를 보자 나까지 시원스레 웃음이 터져 마루에 대자로 뻗었다.
“오늘도 밤에 갈꺼가?”
“아니! 오늘은 자고 갈꺼야.”
수리를 실컷 손봐준 할머니가 빗자루를 내려 놓으며 물었다. 휴가를 얻은 덕에 오후 출근이 없어서 간만에 자고 갈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할머니가 환히 웃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마! 참말이가? 안그래도 내 동이도 연락이 안되서 쓸쓸했는데 좋네! 좋아!”
“한동이씨……연락이 안돼?”
한동이씨 할머니랑도 연락 안하고 있나 싶어 슬그머니 묻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시는 표정이 좋지 못하다.
어쩐지 입안이 씁쓸해져 ‘바, 바쁜가봐!’하고 대답하자 할머니는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난 뒷머리만 긁적긁적…….
괜히 나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 같아서 난 애써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 내가 오늘 공개할 것이 있으니 다들 마루에 모여 앉아주세요!”
중대한 사항을 발표하는 사람처럼 목을 쭈욱 빼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말하자 사름이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았다. 역시 훌륭한 친구야.
훌륭하지 못한 친구인 수리는 ‘뭐! 뭔데 앉으라 마라 지랄이야? 별 거 아니면 뒤졌어.’라며 마루에 앉았다. 마루에 앉을 때도
엉덩이가 아픈 지 ‘에이, 씨발 더럽게 아프네!’라는 거친 욕설을 함께 했다.
할머니는 한동이씨 때문인지 얼굴에서 어두운 표정을 다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손을 꼭 잡은 채 마루에 앉았다.
난 호흡을 길게 내쉰 후 가방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내 마루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 놨다.
“이기 뭐꼬?”
“우와 통장이네? 전교에서 유명한 거지인 한이가 통장을 내놓다니……!”
“이년이 미쳤나. 뭐? 통장 겉표지 보라고? 뭐? 이거 뭐 어쩌라고.”
할머니부터 사름이 수리까지. 모두의 반응은 다양했으나 다들 ‘니가 갑자기 통장을 왜?’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분위기로군, 훗. 좋아. 깜짝 놀라게 해주겠어.
“할머니 여기 철거하고 나면 돈 필요하잖아. 입주권만 있으면 뭐해, 살 돈이 있어야지. 이걸로 사.”
그렇게 말하며 통장을 열어 예치되어있는 액수를 보여주었다.
동그라미가 모두의 생각보다 훨씬 많자 다들 점점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게 뭐야!’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모았……을리는 없고.”
내가 모았다고 하려 했으나 다들 ‘훔쳤냐?‘하는 표정으로 점점 굳어지길래 다시 알맞게 정정해야했다.
에라이, 농담 안 통하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결국 난 사실대로 실토했다.
“한동이씨가 며칠 전에 맡겨뒀던 거야. 할머니 철거하고 나면 돈 필요하니까 주라고……. 자기가 바쁠 것 같아서 나 준 것 같아.”
그러면서 할머니 손에 통장과 도장을 쥐어주자 할머니의 눈시울이 금새 빠알갛게 변한다 싶더니 눈물이 고였다.
통장을 한 손에 꼭 쥔 채 ‘동이야, 동이야.’하고 한동이씨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할머니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실 어제 밤에 퇴근 하고 나서 저 돈을 기계로 인출할 때만 해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한동이씨가 적어준 계좌에서 돈을 빼면서도 ‘이걸 그냥 이대로 한채수에게 갖다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돈을 내 통장으로 무사히 옮기고 나자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그래, 이건 한채수 돈이 아닐꺼야.’하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확신이라기보단 자기 최면이랄까.
“에이, 분위기 슬퍼졌다! 할머니 통장 그만 부여잡고 감자 쪄 줘. 나 쓰레기 버리고 올게.”
그렇게 말하면서 마당에 놓아둔 쓰레기 봉투를 향해 달려갔다.
사름이가 ‘내가 도와줄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쓰레기 봉투가 하나인 것을 확인하더니 도로 자리에 앉았다.
나의 훌륭한 친구인 사름이에겐 ‘내가 대신 갔다올께!’하는 센스따윈 없었던 거다. 크흑!
힐끔 사름이와 수리를 바라보자 둘은 마루에 대자로 누워 ‘덥군, 더워.’하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저년놈들을……!
에이, 이게 내 팔자다 하고 생각하며 쓰레기 봉투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대문을 닫고 기지개를 쭉 펴는 순간.
“나하인, 볼 일은 다 봤냐?”
너무 익숙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었다.
아주 천천히, 녹슨 기계처럼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내가 헛것을 들었길 바라는 마음으로 옆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대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담배를 입에 문 그가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 속에 섬뜻할 만큼 날이 선 서늘한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는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한채수 그 자체였다.
***
딱걸렸네-ㅂ- 잇힝.
응원해주시는 모든 분들 모두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야호♬ 올림.
첫댓글 어떻게 해요.. 한이.. 클났네요..
기다렸어요...ㅋㅋ 이제 한이 어떡행...
역시나 채수는 눈치채고 있었어..우리 한이 이제 어쩐대요 ㅠㅠ 담편도 기대에요!!!
헐~예상은했지만... 어찌될지...
ㅎㅀㄹ어떡해
헐 대박!!!!이럴줄알았어....어또케...
꺄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