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268
■ 1부 황하의 영웅 (268)
제4권 영웅의 길
제 33장 송양지인 (5)
이루지 못할 헛된 꿈을 망상이라고 하던가.제환공에 이어 천하 패권을 잡으리라는
꿈에 부풀었던 송양공(宋襄公)은 오히려 초성왕(楚成王)에게 사로잡혀 온갖 수모와 곤욕만 치렀다.
꿈이 무너진 송양공의 원한은 골수에까지 사무쳤다. 그러나 보복할 힘이 없었다.
송양공(宋襄公)의 논리는 이상한 쪽으로 비약했다.
- 초성왕보다는 그를 맹주로 추대한 주변 제후들이 더 못된 놈들이다.
그중 초성왕을 맹주로 삼자고 발의한 정문공(鄭文公)의 소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용서하지 않으리라!송양공(宋襄公)은 이를 갈며 정(鄭)나라의 동태를 살피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정나라에게 보복할 꼬투리 하나를 잡아냈다.이듬해 3월,
정문공(鄭文公)이 초나라 수도인 영성까지 가서 초성왕에게 조례(朝禮)를 올린 것이었다.
주 천자를 섬기는 중원 제후국으로서 형만(荊蠻)이라 깔보는 초나라에 조례를 올린다는 것은
이만저만 치욕이 아니다.주왕실을 부정하는 배신의 소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 이 간악한 놈을 그냥둘 수 없다.주변 제후국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명분도 뚜렷했다.
"대군을 일으켜 정(鄭)나라를 응징하리라!“
송양공의 이러한 계획을 눈치챈 목이(目夷)는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아, 화(禍)가 여기에 있도다.
아직도 우리 주공이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송(宋)나라는 망할 것인가?“
그는 즉시 궁으로 들어가 필사적으로 간했다.
"하늘이 상(商, 殷 : 송나라는 은나라의 후예)을 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주공이 옛 상(商)을 부흥시키려 해도 하늘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鄭)나라는 초나라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정을 치면 초(楚)나라는 반드시 정을 도울 것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초나라와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나라는 대국입니다.
하늘의 버림을 받은 우리 송(宋)이 강국인 초나라와 싸워 이길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송양공(宋襄公)의 귀에 이런 목이의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나는 정(鄭)나라를 치겠다!“
그해 여름,
송양공은 끝내 대군을 편성하고 위(衛), 허(許), 등(謄)나라 군대와 함께 정나라 도성을 향해 출병했다.
송양공(宋襄公) 자신이 중군이 되고, 공손고는 부장이 되었으며,
대부 약보이(藥僕伊), 화수로(華秀老), 공자 탕(蕩)이 장수로 출정하였다.
상경 목이(目夷) 역시 송양공의 보좌관 자격으로 병차를 타고 상구성을 출발했다.
한편, 송양공이 대군을 이끌고 정나라 도성인 신정을 향해 물밀듯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은
정문공(鄭文公)은 기절초풍하였다. 즉시 사자를 초성왕에게 보내 구원을 청했다.
초성왕이 신하를 불러놓고 말했다.
"정문공(鄭文公)은 항상 과인을 아비처럼 섬겨온 제후이니 속히 가서 구원해 주어야겠다.
누가 가서 정나라를 구원할 것인가?“그때 한 장수가 일어나 의견을 내었다.
"정나라를 구원하려면 먼저 송(宋)을 치는 것이 첩경입니다.“
모두들 돌아보니 근자 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공족대부 성득신(成得臣)이었다.
영윤 투곡어토를 능가하는 인재라는 평을 받고 있는 성득신.초성왕(楚成王)은 기대에 찬 눈길로
성득신을 내려다보며 물었다."어째서 그런가?"
"지난날 왕께서는 송양공(宋襄公)을 사로잡아 욕보인 일이 있기 때문에 송나라 사람들은
그 원한이 머리끝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번에 송양공이 그에 대한 보복으로 정(鄭)나라를 치러 나갔으니, 지금쯤 송나라 도
성은 텅 비었을 것입니다. 텅 빈 기회를 이용해 송(宋)나라를 급습하면 송양공은 질겁하여
군사를 돌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왔다갔다 하는 사이 지칠 대로 지칠 것이며,
우리는 지친 송군(宋軍)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좋고, 좋도다!“
초성왕(楚成王)은 대단히 흡족하여 성득신을 칭찬한 후 그에게 대장직을 내려주었다.
성득신은 그길로 장수 투발(鬪勃)을 부장으로 삼아 병차와 군사를 징발한 후 송나라
상구성을 향해 쳐들어갔다.성득신(成得臣)의 예상은 적중했다.
신정을 향해 진격하던 송양공은 난데없이 날아든 '초군의 상구성 습격'이라는 급보를 받고
허둥지둥 회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여 초군보다 먼저 홍수(泓水) 북쪽에 다다를 수 있었다.
홍수는 하남성에 속해 있는 강으로, 송나라 접경을 이루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호북의 장강 연안을 근거로 하는 초군(楚軍)이 훨씬 북쪽인
송나라 접경 지역까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북상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초(楚)나라 세력권이 이미 그곳까지 미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송(宋)나라로서는 어차피 초나라와 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라고 볼 수 있다.
송(宋)과 초(楚)나라.첫 전면전이다. 두 나라는 홍수(泓水)를 상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른바 '홍수 전투’춘추시대 판도를 새로 짜는, 역사상 의미 있는 싸움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홍수전투가 역사상 유명한 싸움으로 이름나게 된 것은
이러한 세력구도 변화의 의미에서라기보다 송양공(宋襄公)의 싸움 방식이 특이해서라고 할 수 있었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홍수싸움에서 송나라는 성득신(成得臣)이 이끄는 초군에게 패했다.
그런데 그 지는 모양새가 상당히 특이했다. 초군이 잘 싸웠다기 보다는 송양공(宋襄公)이 패배를 헌납했다.
물론 병력상으로는 초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송양공에게 승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군이 홍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을 때 먼저 전서(戰書)를 보낸 것은 초군 대장 성득신(成得臣)이었다.
이 전서를 받았을 때 보좌역인 공자 목이(目夷)가 송양공에게 간했다.
"우리가 무기가 초나라보다 못하고, 군사 수효도 초(楚)나라보다 못하고, 또한 영악함도 초군에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정(鄭)나라를 치지 않기로 약속하고 상구로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되면 초군도 굳이 추격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송양공(宋襄公)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제환공의 패업을 계승하려는 내가 어찌 초나라를 피할 수 있단 말이오?
그대는 초군이 우리보다 강하다고 했지만,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인의(仁義)가 부족하오.
반면에 우리는 초군보다 약하지만 가장 중요한 인의가 있소.“
그러고는 성득신이 보내온 전서에다 결전에 응하는 답신을 써서 보냈다.
결전일은 11월 초하루, 결전장은 홍수 강변의 홍양(泓陽).송양공은 자신이 타고 있는 병차 끝에
큰 기를 세웠다.그 깃발에는 두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인(仁), 의(義).
깃발이 바람에 힘차게 나부꼈다.
26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