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842
■ 3부 일통 천하 (165)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18장 장평(長平) 전투 (7)
- 조(趙)나라 군대를 장평(長平) 들판에 포위해 묶어 두었습니다.
이러한 보고를 접한 진소양왕은 온몸이 근질근질했다."내 친히 하내(河內) 땅으로 나가
백기 장군을 응원하리라!"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범수에게 함양을 맡기고 직접 군대를 몰아 하내로 향했다.
그가 출병을 결심한 것은 꼭 싸움에 끼여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 한단(邯鄲)에서 오는 구원군의 길목을 차단하리라.진소양왕(秦昭襄王)은 하내에 이르러
전지역에 명을 내렸다."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15세 이상 되는 장정들을 모조리 징발하라."
'구원군은 오지 않는가?'조괄(趙括)은 입술이 타들어갔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는 말이 이토록 실감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이라고는 절망적인 것뿐이었다.
- 장평(長平)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이 끊어졌습니다.
양식이 떨어진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영채 안에 갇힌 조(趙)나라 군사들 사이에는 먹을 것이 없어
큰 소동이 일어났다.한 군졸이 더 이상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영채를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조괄(趙括)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그자의 목을 베어 시체와 함께 군영안에 내걸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죽은 군졸의 시신이 살 한 점 없는 백골로 변해 있었다.
놀란 조괄(趙括)이 연유를 알아보았다.군졸의 시체가 하룻밤 사이에 백골로 변한 까닭은 다름아니었다.
- 다른 군졸들이 다투듯 그 살을 베어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조괄(趙括)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아아, 내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런 불행을 당하는구나.'
그 날 저녁 조괄(趙括)은 모든 장수를 불러모아 결전의 각오를 내비쳤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뿐이오. 결사적으로 싸워 포위망을 뚫읍시다."
최후의 수단이었다.이튿날 새벽, 조괄(趙括)은 투구와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그러고는 씩씩하고 날랜 군사 5천을 뽑아 중무장시킨 후 힘세고 빠른 준마만 골라 타도록 했다.
"내가 친히 5천 결사대와 함께 포위망을 뚫을 터이니 나머지 장수들은 기회를 보다가
일시에 뛰어나와 사방을 공격하라!"이어 군대를 4대(隊)로 나누어 명했다.
- 장수 부표(傅豹)는 동쪽 길을 뚫어라.
- 소사(蘇射)는 서쪽을 뚫고 나가라.
- 풍정(馮亭) 장군은 남쪽을 맡아 달려나가라.
- 왕용(王容)은 죽음을 무릅쓰고 북쪽 길을 뚫으라.
비장한 각오로 영채를 나선 조괄(趙括)은 5천 기마대의 선두에 서서 다짜고짜 진(秦)나라 군대를 향해
돌격했다.누가 보아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행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모두들 눈물을 뿌리며 조괄의 그러한 뒷모습을 지켜보았다.둥둥둥둥둥.........
등뒤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를 들으며 조괄(趙括)은 달렸다.그러나 역시 그것은 무모한 돌진이었다.
진(秦)나라 1백 명의 궁수들이 열 줄로 나열해 서서 달려오는 조괄과 5천 결사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1천 대의 화살은 소나기처럼 하늘을 날아 5천 결사대로 위로 떨어졌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수백명의 기병이 나둥그러졌다.그래도 조괄(趙括)은 달렸다.
다시 1천 대의 화살이 하늘을 덮었다. 또 기마병들이 썩은 고목처럼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달려라!"조괄은 미친 듯이 내달았다.그러던 한 순간이었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조괄의 몸이 허공 높이 솟구쳐 올랐다.
말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진 것이었다.그와 동시에 조괄도 땅바닥에 팽개쳐졌다.
그 바람에 투구가 벗겨졌다.조괄(趙括)은 벌떡 일어났다. 투구를 찾아 쓰려는데 화살이 연이어
조괄을 노리고 날아왔다.화살은 정확하게 조괄의 심장을 꿰뚫었다."아악!"
조괄의 두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손 안에 쥐이는 것이 있었을까.
그렇게 조괄(趙括)은 땅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 광경을 영채 안에 있던 조(趙)나라 장수들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앞서 달려나갔던 5천 결사대는 단 한 명도 살아나지 못하고 몰살을 당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한(韓)나라 장수였던 전 상당 태수 풍정(馮亭)이었다.
"내가 세 번이나 조괄에게 간(諫)했건만, 결국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다.
내가 이제 살아 무엇하리오!"말을 마치자마자 만류할 틈도 없이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찌르고 죽었다.
나머지 세 장수도 자신들에게 닥친 이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차례차례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찔렀다.이제 남은 것은 편장급의 장수들과 40여만 명의 군졸들뿐이었다.
장수를 잃은 그들은 더 이상 진군(秦軍)에 대항하여 싸울 마음을 잃었다.
한 장수가 항복기를 들고 영문 밖으로 걸어갔다.그 뒤를 이어 또 한명의 편장이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항복기를 들고 영문을 향해 나가는 장수들은 수십 명에 달했다.
아니 40여만 명 전군이 창과 칼을 버리고 영문 밖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었다.
843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43
■ 3부 일통 천하 (166)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18장 장평(長平) 전투 (8)
진군(秦軍)의 상장군 백기(白起)는 줄지어 나오는 하얀 깃발을 보았다. 그는 이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가슴속으로 통쾌한 기운이 솟구쳐 올라왔다.'이겼다.!'
그랬다.이것으로써 진나라 백기(白起)와 조나라 조괄(趙括) 사이에 벌어진 싸움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역사는 이 전투가 장평에서 벌어졌다 하여 '장평(長平) 전투' 라 기록하고 있다.
BC 260년(진소양왕 47년, 조효성왕 6년) 7월의 일로서,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기
39년 전의 일이었다.그런데 '장평(長平) 전투'가 후세에까지 유명해진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다.
승전에 이은 또 하나의 믿을 수 없을 참상.진군 장수 백기(白起)는 이렇다 할 전투 한 번 벌이지 않고
조(趙)나라에게 대승을 거두었지만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하나의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40여만 명에 달하는 포로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만약 저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부장 왕흘을 돌아다보며 물었다."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왕흘(王齕)은 백기의 마음을 짐작했음인가.대답이 묘했다."장군께서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백기(白起)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장평(長平) 들판을 하얗게 뒤덮고 있는 40여만 조(趙)나라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잠시 후, 하나의 명이 떨어졌다.- 저들을 20개의 영채에 나누어 수용하라!
10명의 장수가 각기 한 영채를 담당했다.20만 명의 군사가 40만 명의 포로를 감시하게 된 것이다.
전대미문의 참극(慘劇)이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그 날은 어렴풋이 달빛이 비쳤다.
백기(白起)는 포로들을 수용한 영채의 책임 장수들을 불러 은밀한 지령을 내렸다.
"우리 군사는 머리에 흰 수건을 쓰게 하라. 그리고 전군을 동원해 영채에 수감되어 있는 포로들을
모조리 죽여라!"삼경이 지나 사위(四圍)는 고요했다.장평(長平) 평원 일대에 은밀히 움직이는 무리가
있었다.그들은 한결같이 머리에 흰 수건을 썼다. 아군임을 확인하는 표식이었다.
그들은 조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는 20개 영채를 포위했다.
어느 순간, 그들은 고요히 잠들어 있는 영채를 향해 일제히 돌진했다.
이때부터 고금(古今)에 보기드문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포로들에게 무기가 있을 리 없었고, 손발이 자유로울 리 없었다.
작은 군막 안에서 30여 명씩 겹쳐 자고 있던 포로들은 난데없이 날아든 칼과 창과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비명, 아우성, 신음소리....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목이 떨어지는 자, 팔다리가 잘려나간 자, 옆구리에 칼을 맞고 터져 나오는 창자를 움켜쥐는자,
살기 위해 죽은 동료의 시체 밑으로 파고드는 자.오호, 통제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진동하는 피비린내 사이로 포로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고 말라 버린 피 위로 또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기를 서너시간, 이윽고 비명소리가 점차 잦아지면서 사위(四圍)는 다시 고요함 속으로 잠겨들기
시작했다.동녘 하늘이 환하게 밝아왔다.보라!영채가 있던 곳마다 하나의 커다란 구릉이 생겨났다.
시체가 쌓여 이루어진 언덕이었다.사방으로 물소리가 졸졸졸 흘러내렸다.
떠오르는 햇살에 비친 그 냇물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그랬다.
그것은 시냇물이 아니라 피가 흘러내리는 물이었다.금문산 계곡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양곡(楊谷) 또한
온통 피로 물들었다.오늘날 장평 일대 사람들은 금문산 계곡물을 단수(丹水)라고 부르는데,
이 이름은 바로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대학살은 끝났다.
40여만 명의 포로가 하룻밤 사이에 시체로 변해버렸다.이를 어찌 참혹하다는 말 한마디로 넘어갈 것인가.
백기(白起)는 시체로 이루어진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시종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석상처럼 쌓여 있는 시체들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어느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시체들을 흙으로 덮어라!"며칠 후 그 곳에는 커다란 산이 하나 생겨났다.
후세 사람들은 그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 명명했다.해골이 묻힌 산이라는 뜻이다.
백기(白起)는 또 다른 명을 내렸다.- 산 위에 대(臺)를 쌓아라!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대였다.
그 대의 이름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백기대(白起臺)' 라고 지었다.백기대 밑으로 양곡,
즉 단수(丹水)가 흘렀다.뒷날 당나라 때의 일이었다.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한 것으로 유명한 현종(玄宗)이 이 곳을 순행한 일이 있다.
40여만 명의 조나라 포로가 학살당한 장소를 돌아보았다.가슴이 처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삼장법사(三藏法師)에게 지시하여 수륙재(水陸齋)를 올리도록 했다.
조나라 포로 40여만 명의 원혼을 달래는 수륙재는 7일 밤낮을 계속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현종은 단수라 불리던 양곡을 '생원곡(省寃谷)' 이라 부르게 했다.
원통함을 두루 살핀 계곡물이라는 뜻이다.<열국지(列國志)>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때 살아남은 조(趙)나라 군사는 240명이다.그들은 모두 미성년 소년들이었다.
그렇다면 백기(白起)는 왜 그들을 살려보냈을까?이유는 간단하다.
백기는 자신의 위엄을 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기(史記)>는 다소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염파(廉頗)가 파직당하고
조괄이 대신 군대를 지휘했다.진나라 군대와 조나라 군대는 싸움에 굶주리기 시작했다.
조괄(趙括)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진(秦)나라 군대가 조괄을 쏘아죽이자 조괄의 군대는 패하여 마침내 수십만 명이 항복했다.
진나라 군대는 그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생매장해 죽였다.이 싸움에서 조나라는 40여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사기>에는 영채를 들이쳐 학살한 내용은 없다. 백기대(白起臺)의 일화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땅을 파서 산 채로 집어넣어 생매장했다는 것이다.상상해보라.
머리 위로 쏟아지는 흙덩이를 헤치기 위해 발버둥 치는 40여만 명의 포로들의 모습을!
한밤중에 기습하여 죽인 것보다 더 잔인하고 끔찍하다.백기(白起)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비밀 지령을 받았을까. 아니면 범수(范睢)의 뜻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단독 행위일까.다시 붓을 놓고 상념에 잠겨본다.
돌이켜보면 '장평(長平)전투'는 전국시대 싸움의 전형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전투처럼 멋도 낭만도 여유도 없다.죽이고 이기는 것, 그 자체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만 하더라도 한 장수가 공적을 후대에 남기려면 적병 1만 명의 죽음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는 그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시대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건이다.또 한가지 있다.이 전투로 인해 진(秦)나라는 조(趙)나라뿐만 아니라
중원의 여러 나라들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 공포감은 실제로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이루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 진군(秦軍)과 맞서면 모두 죽는다!
84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