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꽃이라도 응어리가 박히면 안 되는데
형광등등님의 글을 읽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장인어른이 쓰려지셨다는 건데
그런데 형광등등님의 심정이 읽혀졌다.
나도 그런 상황이 떠올랐기에 하는 말이다.
비극이다.
맑은향기님의 글을 읽고 위안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나도 그런 상황이 떠올랐기에 하는 말이다.
나는 아직까지 여성에게 프러포즈를 한 일이 없다.
그저 여성이 다가오면 안아줄 뿐이다.
대학시절에 어느 병원장 댁에서 나를 초대했다.
나를 좋게 보았던 모양이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대학생인 자기 아들을 선도해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그 집에 드나들었고
그 집 딸도 내게 가까이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찻상을 내게 가져오게 하고 말이다.
그런 전차로 결혼하게 되었는데
신라호텔에서 거창하게 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시골 나의 집에 다녀오는 일이 고역이었다.
열차를 타고 고향역까지는 잘 갔는데
거기서 산길을 걸어 내를 건너고 공동묘지를 넘어
겨우 집에 당도했는데
하얀 신발에 황토흙이 묻어 엉망진창이 되었던 거였다.
그런 모습으로 올라와 처가를 방문했는데
분위기가 쌀쌀한 거였다.
뒷방에서 모녀의 대화를 듣노라니
내 아내가 장모님을 위로하는 대화였다.
시골에 가서 시댁 어른과 시누이들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아 행복했다는 거였는데
장모님은 그에 만족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왜 그랬을까?
내가 딸을 달라 했나?
내가 가난해서 그랬나?
내가 내 사정을 다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뒤에 나는 평온하고 담대하게 신혼생활을 해나갔다.
그런데 처가에 아쉬운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남이 말썽이었던 거다.
처남이 장모님을 따라 주식을 하다가 친구들 돈까지 다 날렸다.
그러더니 자살하겠다고 가출했다.
이때 장모님으로부터 첫 번째 도움요청이 왔다.
아들을 찾아내라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여차저차해서 아들을 찾아내고
갱생의 길을 찾아줬다.
두 번째다.
중국에서 蘭을 한 컨테이너 수입해왔다.
때돈 벌려는 욕심이었다.
그런데 수입 통관하는 과정에 걸려서 난이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해결해달라는 거였다.
여차저차해서 해결해줬지만
그게 바로 상품이 되던가?
화분에 심어 가꾸어야 하지 않던가?
난을 도매로 팔 수 있던가?
망상 허상이 되어 돈만 다 날아갔다.
세 번째다.
이제 사위가 먹고살게 무슨 묘안을 내놓으란다.
그래서 땅은 도망가는 게 아니니 땅을 사주라 했더니
서울 인근에 그린벨트 5만평을 사주더라.
그런데 사위는 그걸 저당으로 돈을 빌려 날리고
그래서 땅이 반쪽으로 줄고
또 그걸 저당으로 돈을 빌려 날리고
그래서 땅은 또 반쪽으로 줄고...
결국 오천평 정도 남았는데
또 도와주라는 장모님의 주문이 왔다.
그래서 그린벨트에 건물을 짓게 해주고
그걸 세놓아 연명하고 있던 중
장인어른 장모님 다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 유서를 남겨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만 줬는데
그것까지는 좋다하더라도
내 아내가 맡긴 돈까지 모두 카이스트에 기부하셨으니
내 심정이 어떻겠는가...?
나는 가난한 시골태생이지만
부잣집 딸을 아내로 삼아 처가에 덕을 다 베풀었는데...
내 장모님은 유난히 아들사랑이 깊었다.
(그걸 사랑이라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맑은향기님 글에서 보는 것처럼
딸들은 보살피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학창시절에 친구들이
“네 엄마 맞아?” 했다고 한다.
내 처제는 학창시절 말괄량이였으니
자업자득이겠지만
(국제결혼 해 미국에서 홀로 산다)
내 아내는 순동이인데 왜 그렇게 쌀쌀맞게 했을까?
꽃이 꽃이라도 가슴에 응어리가 박히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니
나는 오늘을 즐겁게 살 뿐이다.
형광등등 선배님과 맑은향기님을 위로하기 위해
이 글을 이어봤다.
첫댓글 읽는 이에 언짢은 글이라면 삭제하겠습니다.
난석님~
삭제하다니요
잘 쓰셨습니다
맑은 향기님도 읽으면 좋아라 할겁니다
그때는 왜 아들만 좋아 했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딸도 엄연한 자식인데 말입니다
그러게말이에요.
이건 여성들이 더 그랬어요.
꽃은 꽃이라도 가슴에 응어리가 박히면 안되는데...
참 많은 뜻이 함축된 글입니다
원망보다는 왜 그랬을까로 시작하시는 밀씀들이
도 다른 배움의 길로 이끄는 글입니다.
그래도 끝입없이 베푸신 그 마음이 가슴 울렁이게 합니다
선배님의 글 가슴에 담으며 포용하는 마음을 담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군대에서 후배들 때리는것도 그렇고
야만성이지요.
그러셨군요.
사모님의 모습이 참 우아하고 귀티가 나시더니 부잣집 맏딸이었군요.
맏사위하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사모님이라니요.ㅎ
그저 평범한 주부였다가 할머니가 됐네요.
남아선호사상~~~아들은 하늘이고
딸은 웬수 덩어리였지요.
왜 그랬을까요?
많은 어려움을 껶으셨군요.
하지만 노후는 평온하시니 과거는 다 잊으셔야 겠지요.
장머님이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괜찮았지요.
난석선배님
처음으로 선배님의 글에 댓글을 써봅니다 진한공감을 느꼈기에...
저의 친정모친께서는 유별나게 아들만 아셨지요
(딸 6. 아들 3.)
그런데 시집와 보니 시모님은 한수 위셨어요 (딸6. 아들2.)
당신들도 여자인데 왜 그리도 딸들을 구박하고 아들만 아실까요....?
늘 그게 이해 불가 였는데요
그런데요 요즘에사 이해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건 시대의 흐름 즉
그때 그시절에는 그럴수 밖에 없었겠구나
시대상황. 말입니다
제나름의 해석이 정답이 될까요?
감사 합니다
그랬군요.서운했겠어요.
그런데 여성들끼리의 고부갈등은 이해하겠는데
모녀 사이의 애증은 이해가 잘 안 되데요.
딸을 인형처럼 달고 지내셨는데요.
애지중지 키운 보람을 느끼지 못한 심리일까요?
장모님이 선택한 결핲이었는데요.
잘모르겠데요.
맏사위로서 참 많은 일을 하셨군요 도움 청해놓고
결과는 조금 어이 없네요
그때 그심정 어땠을까
담담하게 지난날 풀어 가시면서 다 해탈의 모습 입니다 선배님
맞아요.
저는 저대로 덕을 베풀었으니
해탈이 맞겠네요.ㅎ
선배님은 정말 많이 베풀고 사셨네요
저희집은 가난했지만 친척이 없고 아들만 넷에 분란이 없었습니다
결혼해보니 딸넷에 막내가 아들이어 매우 단란해보였지만 말할수 없는 사정이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각각의 가정사정이야 다 다르고
복잡하겠지요.
그런 두 가정이 결합하려니 문화충돌도 생기게 마련이지만
그런거 이해하고 경제문제도 이해하더라도 그 외의 묘한 애증이 일어나기도 하는것 같데요.
난석 님 올리신 꽃사진을 보면서
제가 어제 찍은 사진을 찾아 보았네요~
같은 꽃밭 일리야 없을 텐데
꽃무리 진 게 비스므리해서요~^^
결혼을 그렇게 하시고
군말 없이 처가를 보살피셨으니
그 공은 하늘이 알 거 같아요~
하늘이 안들 다 지나간 일인데
형광등등님은 서운하신가봐요.ㅠ
난석님 그러셨군요 . 찻상을 들고 나오던 따님과 백년가약을 오늘날까지 정답게
잘 살고 계시니 행복 행운아이십니다. 석천 호반가의 높은곳 전망좋은 곳에서 매일 느끼시며
시상떠오르는대로 멋진 표현 하실 수 있는 지금의 환경과 조건까지 모두가 굿 ! 인것 같네요
가끔 난석님 글을 읽으며 거명되는 석촌호수 잠실 5 단지 살때랑 오금동 상아아파트 살때랑 오랜세월
올림픽공원 석천호수 참 많이도 좋아하고 돌아다녔던 과거사가 있었답니다. 특히 진주 아파트에 절친이 살고 있어서
부부동반 한데 어울려 참 재미나게 지냈던 기억이 떠 오르네요 아니 중언부언 횡설수설 엉뚱한 길로 죄송
네에 행운이지요.
모두 예수님 같은, 부처님 같은 말씀입니다.
컴사랑님은 기본이 뚜렷하시면서
얼핏 지나치는듯 세심히 살피시고
냉정한듯 온정이 있으시고
입다물 듯 할 말 다 하시네요.
그런데 5단지, 진주아파트를 말씀하시니
반상회 에서 뵐뻔 했네요.ㅎ
선배님 지난날을 함축해서
올리신 글 그시대배경
공감합니다.
건강하시고요
잘봤습니다.
네에, 고마워요..
난석선배님 글을 읽다보니
해당화꽃 같은 생각이든다
섬마을 총각선생님.ㅎ
살아오신 모습이
너무 깔끔하고 신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참 멋진 인생을 살아오셨다.
주위를 밝게 비추는
가로등 처럼
나는 오늘도 늦은 시간이였지만
가로등의 보호를 받으며
콧노래 부르며
우리집 도착했네요.ㅎ
해당화에 총각선생님이라...참 극찬에 극찬입니다.
부처님 눈엔 부처만 보인다더니...ㅋㅋ
저는 부처는 아니지만...ㅎ
부인께서 참 마음이 넓고 고우신 것 같아요.
장가도 잘 기시고 시집도 잘 오시고 한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낭만님..
다 인연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