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를 부탁하는 장면이 디모데서입니다. 마지막 때의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너에게 이 교회를 부탁한다고
하는 이 말을 볼 때 오늘 말세와 교회의 사정이 똑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 때에 디모데에게 부탁했던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로 일궈놨던 교회가 지도자들의 부재를 통해서 점점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떠난 자리에 무엇인가는 교리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법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점점
하나님을 떠나는 타락하는 그 때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를 지키라는 이 명령이 들어있는 그 편지가 바로 디모데 전서와 후서입니다. 이 배도는 이렇게 된다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말씀이 있습니다. 즉 교회를 다니는 모습은 다들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 안에 들어있는 실제 예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 능력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떠났다는 겁니다. 진리대신 다른 것이 대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진리를 가졌을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고 안 서고는 그 인도자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기 자신의 믿음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혹에 걸리면 누구든지 죽는다는
겁니다. 미혹에 걸려서 살아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그 미혹에 걸리지 말고 그 미혹을 이기라는 겁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를 미혹하는 이 미혹을 우리는
잘 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맡기고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각자가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이것을 하나님께
부탁을 했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끝날 까지 지키실 줄로 믿나이다.”
오늘 이 고백이 신앙 아닙니까?
그 하나님께 부탁할 것이라는 믿음. 끝날 까지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의 신앙의 여정에 확정이 없기 때문에 배신을 하는 겁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을 배신을 하고 산다는 겁니다. 위치가 확정이 안
되는 사람은 뭐든지 불안합니다.
하나님께도 똑같습니다. 그 위치가 확정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의 가는데 이것을 하나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끝날 까지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그럼 끝나는
겁니다. 그와 그 계약이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확정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지막에 옥중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고 있을 때에도 바울은 자기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교회를
즐겁게 부탁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주 감사하게 단호하게 부탁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의 위치가 확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한복음 17장에 참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짓 하나님이 있다는 겁니다. 디모데에게 이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거짓교회가 많으니 너는 참 교회가
되어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무정하게 되고,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다는 겁니다. 훼방은 세상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훼방한다는 겁니다. 이 교회를 훼방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대적이 대적이라고 조금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한 것이 일어나게 될 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뜻이 있으면 참 교회인 겁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너희 안에
그 말씀의 씨가 있으면 결코 죄를 지을 수가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면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씨가 있는데 죄를 지을 수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틀리신 겁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다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면 그 말은 진리인줄
믿습니다. 내 속에 말씀이 살았는지 안 살았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속에 주는 이 생명력을 잃어버리면 정욕이 있다는 뜻이고, 정욕이 있다면 썩는
다는 겁니다. 썩어갈 수밖에는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생명을 가지면 썩지 않는다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는
신의 성품에 참예를 못하면 썩는다고 합니다. 정욕으로 인하여 썩는다는 겁니다. 두 가지의 관계가 확실히 나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처음부터 안 됩니다. 우리에게도 썩어질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는 안 됩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겁니다. 태어나면서 교회에 곧바로 다니면서 ‘나는 죄를 안 지을 수 있어.’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기까지. 초보에서
장성 한데까지 이르기를 원한다고 하는 겁니다.
초보에서 장성 한데까지 가기 위해서 이 디모데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는 것은 사람이 교만하고, 훼방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는 자가 되기 전에 디모데는 반드시 이렇게 가르치라는 겁니다. 그 가르치는 것이 디모데후서 2장의 내용입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내가 썩어질
정욕에 살지 아니하고 생명에 살려고 한다고 하면 먼저 군인과 같은 이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군인이 훈련을 받는 목적은 반드시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자기의 삶의 대적 자인 마귀가 어떠한 것을 확실히 알고 사는 자라는 겁니다.
군인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농부의 수고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마음의 충성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농부의 수고라는 것은 계속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계속 있습니다.
그 농부가 곡식을 바라보면서 하는 수고가
있습니다. 이 수고가 있어야, 이 노력이 있어야 말세에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 앞에 배도를 하지 않는 다는 겁니다. 농부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앞에 군인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는 겁니다. 군사, 농부, 하나님의
일꾼이 되려면 반드시 너희는 깨끗한 그릇이여야 한다는 겁니다. 깨끗한 그릇이 안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인줄 믿습니다. 깨끗한 그릇이라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깨끗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그릇을
비운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생명은 말씀인 겁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깨달은 만큼 하나님께 하나씩 부탁을 해 놔야 합니다. 바울처럼. ‘내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아버지 이것을 부탁합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살 테니까 부탁합니다.’ 이러한 부탁이 있어야 하나님이 내게 부탁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지키신다는 겁니다. 자기의 위치가 확정된다는 겁니다. 자기의 위치가 확정이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위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군사로, 농부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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