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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팸, 그들을말한다
6.
대파란이 일고 지나간 집안은 조용하다 못해 썰렁했으며 싸한 공기만을 남겨주었다.
연락하겠다는 큰원장님은 그렇게 대구로 내려가셨으며 시간도 시간인지라 어두운 밤이 되어 조민서와 구자현도
일터로 향했다.
그럼 홀로 집에 남은 나는 어느 정도 되찾은 컨디션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때아닌 슬럼프에 이미 팬카페에는 일주일정도 쉬겠다고 했지만 그 일주일의 진짜 명목은 비축분을 만들기 위함이였는데
시간은 흘러만가고 글은 단 한자도 쓰지 못했기에 나는 오늘도 문서를 켜고 고뇌해야만 했다.
휴무인 일주일에 이틀이 흘러가고 있지만 끊긴 필이 오기는 커녕, 더 깊은 슬럼프만이 나를 감싸고 있을 뿐이였다.
여하튼 그것은 큰원장님이 크게 한 몫을 하고 갔으니 두말하면 잔소리겠지.
“악! 악 악 악!”
한 시간이 넘도록 컴퓨터 앞에서 팔짱을 끼고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이건 아니다 싶어 결국에는 악을 쓰고 말았다.
답답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랐다.
분명 다음 이야기를 이을 내용도 있고 쓰기만 하면 되는건데 써지질 않으니 오죽 답답하랴.
소리치던 나는 크게 숨을 마시고 내쉬며 인터넷창을 켰다.
냉큼 팬카페에 들어가고 싶지만 다음편을 기다리고 있을 회원분들과 독촉쪽지와 메일을 보는 것이 겁이나,
팬카페는 커녕 그 카페를 속하고 있는 '담(DAM)'사이트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뜻없는 시간만 허비하며 이런저런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미니홈피에 오게되었다.
한동안 주인의 발길이 없었던 그 곳에는 반응없는 나에게 지쳤는지 몇몇 팬들의 안부 인사만이 전부였다.
‘언니! 울두리 영화보고 왔는데 역시 재밌었어요♡ 유아성의 원리는 영화로 안나오나요?’
라는, 확인하지 않아 몇일동안 묵은 감상을 시작으로 때론 독이 되고 약이 되는 팬들이 남긴 방명록의 글들을
순서대로 밑에서 읽으며 올라오면 맨 위에 남겨진 비밀이야로 등록되어 있는 글에서 멈춰졌다.
‘나 아프다. 여친이 뭐하냐. 간호하러 와야지.’
..옘병. 이럴때만 여친타령이지.
녀석이 남긴 방명록을 빤히 쳐다보다가 녀석의 미니홈피로 넘어갔다.
아프다는 녀석이 사진까지 업데이트가 되어있는건 뭔가요. 혀를 저으며 오랜만에 와본 녀석의 미니홈피를 돌다가
방명록에 욕한바가지를 쓰려했지만 아프다니 관두고 다시 메인 홈으로 돌아와 일촌평을 남기기로 했다.
뭔가 아쉬운 마음에 방명록에 쓰지 못한 욕을 쓸까 했지만 내 이름의 명성도 있고 해서 괜찮냐고 앙탈을 부리려고 했지만
그것도 패스.
나름 고민하며 글을 썼다 지웠다 몇번이나 반복하고 있을때 실시간으로 바뀌어 이제 막 올라온 듯,
보지 못한 일촌평 하나가 내 시선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선배 집에 잘 들어갔어요? 약은 샀구요? (♥짝♥ 남승주)’
그녀가 남긴 일촌평을 누르면 그간 그에게 향한 그녀의 일촌평들이 날짜와 함께 적혀있는 조그마한 창이 뜨고
다음을 넘기며 하나하나 읽다가 컴퓨터를 끄는 순서를 무시하고 그대로 본체의 전원을 눌렀다.
여지껏 나는 그에게 남긴 일촌평은 커녕 그 흔한 댓글도 달지 않았기에 그에게 6년이나 된 오래된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는 않다.
그 또한 방명록에는 비밀이야로 남기곤 했으니까.
그냥 단순한 그의 후배지만 그의 여자친구로 보이는 남승주에게 화가 난건지 질투가 난건지 헛웃음 뱉어 내던 나는
충천중이던 핸드폰을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제로인 컨디션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달리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 미칠 것이다.
“원재냐? 달리자. 콜?”
급한 내 목소리에 엉겁결에 콜이라고 대답하는 원재에게 여명이도 불러서 만나자고 했다.
오늘은 끝이 없다. 무조건 올인이다.
.
“너 미쳤어? 뭐가 그렇게 급해서 빨리 마셔?”
“뭐가. 오늘 달린다고 했잖아.”
“야! 이게 달리는거냐? 날으는거지. 여명이 오기도 전에 뻗겠어 너!”
오늘도 우리가 모인 장소는 주방이였고 이 근처에서 회식을 하고 있으니 상황봐서 빠져나오겠다던 여명이는
깜깜무소식인채 아직까지 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여명이가 없는 테이블에는 벌써 빈 술병들로 가득했다.
주당인 원재와 내가 만나면 소주 6병이 기본이였지만 오늘은 맘먹고 달리는 내덕에 벌써 8병째였다.
그렇다고 둘이서 사이좋게 네병씩 마신건 아니다. 내가 다섯병정도 마셨나.
아마 인생 최대의 신기록을 세울수 있는 기회였다. 기록을 세운 주제? 간단하다. 이송민 소주 열병 먹다.
“그만마셔!!! 이 미친. 아오.”
“뭐야. 내 놔. 빨리 안내놔?”
이제 막 또 하나의 빈병이 늘어날 시점이였는데 배째라는 원재는 내 손에 있던 술과 잔을 지나가는 직원에게 주며
앞으로 직원들은 이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다.
하여간 저년은 재수없다. 본인은 뻗을때까지 마시면서 왜 나는 못마시게 하는가.
우리 테이블을 멀리하며 지나가는 다른 직원에게 술과 잔을 가져달라 소리치면 그 옆에서 갖고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원재가 눈을 부릅뜨며 직원과 나를 노려보았다.
야 이원재. 니가 그런다고 내가 무서워할줄 아나본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게 누군지 알면서 넌 지금 그걸 화라고 내는거냐.
“빨리 술 줘 이년아..”
“술먹는 이유나 말하고 먹던가. 딱 보니까 아파보이는데 이게 죽을라고 환장했나.”
“원래 아플때는 술이 약인거 모르냐?”
“헛소리말고 왜그러는데. 말해봐.”
빨리 말하라는 원재가 술대신 준 것은 시원한 얼음물이였고 아직 오지 않은 여명이를 위해 세팅되어 있던 잔에
졸졸졸 따른 얼음물을 그대로 원샷했다.
캬. 이맛이다.
“미친년. 취했네.”
그래. 취했다. 차라리 취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퍼마셔댔는데도 내 앞에 있는 니가 아주 환하게 선명한거 보면 나 아직 멀쩡한거 맞지?
그러니까 더 마셔야한다구.
“원재야.”
“뭐. 이제야 말 할 마음이 생겼냐?”
빈 술병들도 치워지고 안주로만 가득한 테이블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래로 떨궈진 눈을 깜박일때마다 눈물이 고인건 아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테이블 가운데에 원재의 부탁으로 뜨겁게 데펴져 돌어온 시원한 오뎅탕이 하얀 김을 올려내고 있었고
그 위로 그려지는 얼굴하나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무슨 일인데. 너 혹시 윤희수랑 헤어졌냐?”
원재야. 역시 내가 이렇게 기분이 다운되어 있을때는 그 이유에 녀석이 빠진적이 없지?
“아 진짜 답답하게. 말 좀 해!”
“차라리 헤어졌으면 슬퍼도 속은 시원하겠지.”
말좀 하라며 재촉하던 원재의 목소리가 들어가면 이제 막 도착한 눈치 빠른 여명이는 금새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나 왜이렇게 병신같지.”
그렇게 들이키던 술이 이제서야 슬슬 반응이 왔고 점점 꼬여지는 혀에 발음은 모두 새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열여덟 살 때처럼 윤희수를 좋아하는건 아닌데.”
“.....”
“그래도 점점 멀어진다는게 가슴이 아파.”
회식자리에서 이미 한잔하고 왔을 여명이는 앞에 놓여진 안주만 손대고 있었다.
“혼자가 싫어서 잡고 있는 내가 병신같아.”
원재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빤히 나를 보고 있는데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힘든 내 두 눈은 다시 아래로 떨궈졌다.
“그걸 알면서도 잡혀있는 윤희수도 참 병신이지..”
안그러니 얘들아.
조용했다. 가게 안에 있는 테이블은 손님들로 꽉 차있었고 몇십개의 입들이 모여 있으니 당연 시끄러웠는데
유난히 우리 테이블만 조용했다.
안주만 먹는 여자와 곧은 시선을 옮기지 않는 여자. 그리고 한없이 무너지는 여자.
세상에서는 아니지만 이 곳에서만은 너무 불쌍한 여자.
그런 여자.
.
“그래서 구자현이 왜 맨날 임자있는 조민서랑 나한테만 선 자리를 만들어주냐니까 큰원장님이 뭐라 했게?”
“뭐라했는데.”
“임자도 임자 나름이지!”
깔깔깔깔..뭐가 그리도 좋은지 큰원장님의 성대모사를 하며 말하는 나에게 맞춰 일일이 대답해주던 여명이는
조금 전에 주문한 과일빙수가 나오자 입을 싹 닫아버렸다.
나쁜 년.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않던 이원재보다 먹을거에 혹해서 친구를 버리는 니년이 더 나쁘다는 것을 알랑가.
“김옘병! 그 다음이 대박인데 안물어봐? 안궁금해?”
“뭐. 아, 응.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성의없는 여명이의 목소리에 그녀가 지금 과일빙수에 푹 빠졌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흐릿해지는 초점에
내 얘기는 안중에도 없고 과일빙수만 먹고 있을 여명이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낮에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던 내 입 또한 멈추지 않았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조민서의 성대모사를 했는데 똑같았는지 여명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태껏 나를 보는 원재의 시선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던 터라 새로 받게 된 시선은 분명 여명이의 것이니라.
“근데 더 대박인건.”
“....”
“나는 선을 보겠다고 한거야.”
흐려지는 눈에 힘을 주니 나를 보고 있는 원재와 여명이가 바로 보였다.
그녀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한두번도 아닌데 이토록 따가웠던 적이 있었나. 웃음이 나왔다.
“내 임자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나는 선을 보겠다고 했어.”
큰원장님께 들볶이는 조민서에게 아픈 나를 간호해준 보답이랍시고 선을 보겠다고 말한 내가 이제와 생각해보니
너무 웃겼다.
큰원장님의 말대로 임자는 임자 나름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내 자신이 너무 웃겼다.
한심했다.
“나 왜이렇게 재수없지..”
내 물음에 그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그 답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알고 있으니까.
또 다시 새어나오는 웃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큰소리로 웃다가 진정을 되찾은 나는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얼핏 본 시간은 벌써 새벽 2시였다.
긴 통화음끝에 상대편에서 잠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술먹은거 티내기라도 하는 듯, 더 꼬여진 내 발음이였다.
“아부지? 아부지 딸 송민이 졍말로 선 보겠습니다! 진짜 임자는 임자 나름이예요 아부지!”
꼬인 내 말을 못알아 들은걸까. 상대편에서는 숨소리만이 전해져왔다.
그렇게 인사불성이 된 나는 뒷일따위 생각하지 않고 이번에는 밀려오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리면
장소를 정해서 곧 연락하겠다는 큰원장님의 낮은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어둠속에 갇혔다.
한번도 이런적이 없었던 딸내미가 꼭두 새벽에 술이 잔뜩 취해 꼬인 혀로 생전 부르지 않던 아버지란 호칭으로
선을 보겠다고 했으니 그 마음은 어떨꼬.
오늘은 모두가 무너지는 날이였다.
.
헝헝 졸려요!!
3시에 자서 6시에 인났다는거..ㅠㅠ
출근하기전에 시간좀 남아서 잽싸게 올리고갑니다!
여러분!오늘 사탕 많이들받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