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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박사모 -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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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모 문학방 벌써 여름이
푸른 돌(靑石) 추천 1 조회 12 23.06.15 17:55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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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6.16 11:45

    첫댓글 1.고향이 먼 남녘의 섬이지만 육지 같아 어릴 적에는 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운 여름엔 종일 잔잔한 선창 안에서 놀았다. 점심을 거르면서 친구들과 물장구 치며 놀기 바쁘다. 물 밖에 나가면 금방 더우니 한 끼를 걸러도 배고픈 줄 모르고 물속에서 논다. 수영은 어릴 때 초등학교 가기 전에 다 배운다. 간혹 겁이 많아 물 속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 하는 아이가 있다. 형이나 삼촌들이 그 아이를 갑자기 물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한참을 물 속에서 첨벙거리며 물을 마신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적당한 때에 건져준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물을 겁내지 않고 금방 수영을 배운다. 아마 힘들어서 그렇지 한강 정도야 몇 번이라도 건널 수 있다. 그런데 민물에서 수영을 해보면 사람이 잘 뜨지 않아 바다보다 힘들다. 파도가 심하지 않으면 수영하기는 바다가 강이나 호수보다 수월하다.
    이전에 민물 낚시는 낚시로 치지도 않았다. 민물 낚시를 많이 다닌 것도 아니지만 아이들 장난 같아 영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진짜 강태공은 강이나 호수에서 낚시하는 분들이지 싶다. 오랜 인내와 넓은 소양을 배우지 않으면 진정한 낚시꾼이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작성자 23.06.15 18:00

    2.초등학교 시절에 언젠가 큰 태풍이 왔다. 전화는 물론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었다. 식구들이 전부 학교를 가지 마라는 데 고집이 센 막내는 대나무 삿갓 우비를 푹 둘러 쓰고 학교를 갔다. 비 포장 도로가 폭우로 곳곳이 패이고 고랑이 되어 물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두 손으로 삿갓을 꼭 붙잡고 달렸다.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어린 아이가 이리 저리 휘둘렸다. 힘들게 학교를 갔는데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임시 휴교령을 내렸는데 상일이네는 몰랐던 것이다. 진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를 갔는데 휴교 인 줄도 모르고 갔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상일이는 6년 간 개근상은 세 번, 정근상은 한 번 탔다. 우등상은 1학년 때만 빼고 다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에 우등상 한 두 번 안 받아 본 분이 드물 것이다. 그래도 집안에서는 큰 자랑이었다. 상장을 동네 분들이 오면 보라고 자랑 삼아 풀칠을 해서 안방 벽에 떡허니 붙여 놓았다. 세월이 지나니 낡고 헤어져 상장을 뗄 수가 없었다. 그 후에 집을 새로 지으면서 상장도 옛 집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에 받은 상장이 하나도 없다. 지금도 결석 않겠다고 죽기 살기로 달렸던 그 날이 아련이 떠오른다..=>

  • 작성자 23.06.15 18:01

    3.유년 시절에 고향은 취사와 난방을 모두 나무로 해결했다. 추운 겨울을 대비해 땔 나무를 늦가을까지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추워지기 전에 장작이나 말린 풀을 많이 쌓아둬야 겨울이 포근하다. 상일이네는 소나무가 울창한 산이 좀 있어 아버님이 가을에 장작과 나무를 넉넉히 준비했다.
    어릴 때 바로 위 누나와 같이 땔 나무 하러 많이 다녔다. 늦가을에 갈 바람이라도 불면 단풍이 든 노란 솔 잎이 바닥에 소복이 쌓인다. 그러면 누나와 같이 남보다 먼저 아침 일찍 나무 하러 간다. 소나무 밑에 떨어진 노란 솔 잎을 갈퀴로 걸어 모아 몇 차례 지게로 나르면 얼마나 신 나는지 모른다.
    집안 맏이 인 형님과 열 일곱 살 차이라 어릴 때는 형아가 무서워 슬슬 피했다. 상일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형님은 부산서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당시 면 내 대학생이 열 명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논 예닐곱 마지기와 밭 스무 마지기 정도인 빈농의 농가에서 장남을 대학 보낸다니 동네 사람들은 칭찬보다 흉 보기 바빴다. 한 번은 아버님이 이웃집에 돈 빌리러 갔다. 돈은 빌려주지도 않고 없는 집에서 대학이 당키냐 하냐며 나무라기만 하니 눈물을 흘리며 그 집을 나왔다..=>

  • 작성자 23.06.15 18:02

    4.아버님이 빈촌의 농가에서 어떻게 큰 아들을 대학까지 보낼 생각을 했는지, 못난 자식은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한 결심과 결단이셨다. 왜 정 때 해방이 되자 일본에 살던 삼 촌 두 분이 고향으로 나왔다. 대 식구가 한 집에 살 수 없어 하나 씩 살림을 내보냈다. 시골서 도저히 살 수 없다며 삼촌 두 분은 다시 일본으로 가고 남은 식구는 모두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맨 주먹으로 객지를 나갔으니 초창기에 세 식구 다 힘든 생활을 보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서울서 다녀 방학만 되면 바로 고향을 내려갔다. 고향 가는 길이 부산이나 여수로 갔다. 여수로 내려가면 주로 서울역에서 밤 10시에 출발하는 야간 완행 열차를 탔다. 꼬박 밤을 새우고 아침 10시 경 도착한다. 미리 표를 끊지 못하면 좌석이 없어 입석을 타야 했다. 거의 선 채로 밤을 새우고 새벽녘이 돼야 빈 좌석이 나온다. 대전을 지나면 빈 자리가 나오지만 학생이라 곡성을 지나야 앉을 수 있다. 한 번은 좌석 표를 끊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보따리까지 잔뜩 들고 용산 역에서 탔다. 처음 한동안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어 영등포역 지나서 자리를 양보했다..=>

  • 작성자 23.06.16 19:55

    5.열차 구석 구석에서 잠을 자던 승객이 자정을 넘기면 점점 줄어든다. 전주 지나 곡성을 지나면 빈 자리가 나오고 순천을 지나면 텅텅 빈다. 만성리 턴넬을 지나면 여수가 바로 나온다.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저 멀리 고향이 보인다. 아침 10시, 서울역에서 출발한 지 꼭 12시간이 걸렸다. 갈매기가 떼지어 날고 출렁이는 바다가 눈부시다. 아침에 출발하는 여객선을 못 타면 귀향 길이 만 하루가 걸린다. 아침에 건너는 여객선이 이전엔 없었다.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데 한 시간, 또 버스를 타고 십 리를 더 가야 고향 마을에 도착한다. 배 시간이나 차 시간이 살짝 어긋나도 귀향 길이 꼭 하루가 걸렸다. 지금은 고속버스로 4~5 시간이면 간다. 육지에서 먼 섬이 아니면 전국 어디나 이제 1일 생활권이 되었다.
    오래 전에 상일이네가 고향을 떠났다. 아버님 돌아 가시고 어머님 혼자 3년을 사시다 서울 형님 댁으로 모셨다. 어머님 모시고 고향을 떠나는 날, 상경 열차에서 남 몰래 눈물 짓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전라선 완행 야간 열차가 아직 운행된다면 그 기차를 타고 고향을 한 번 가고 싶다. 아마 먼 추억 여행이 될 것이다..^*^

  • 23.06.18 21:38

    덕분에 좋은 글 고맙습니다
    행복한 밤 보내세요

  • 작성자 23.06.19 11:55

    오늘도 날씨가 더울 거라 하네요..
    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고 언제나
    힘찬 날들이 되세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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