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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流水 : 낙화유수
“……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한 번 안아달라고 할걸.”
아스라한 햇빛이 금남로 거리에 쏟아졌다. 길바닥에 낭자한 핏자국들이, 아련하게도 붉었다.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잔인했던 봄도 끝을 맺겠지. 카키색의 군복들이 꽃잎들 사이로 스치듯 보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아마 자신을 겨누고 있으리라. 5월 27일, 10여 일 동안의 기나긴 저항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
늦가을의 싸늘한 공기와 어울리지 않는, 제법 설레는 공기가 캠퍼스를 맴돌았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는 위안과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성취감. 그것들은 한데 뒤섞여 어쩐지 봄을 닮아 있었다.
아무리 독재자였지만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예의로나마 애도를 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 다 인과응보고 권선징악이지 뭐. 그렇게 뒤틀린 시절이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진 마음.
그러나 그 방식이 선이면 어떻고 악이면 어떠할까. 중요한 건 대통령이 죽었고, 유신이 끝났다는 건데. 그를 죽인 수하는, 사람을 죽였음에도 순식간에 민주화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16년 동안 한 국가를 제멋대로 주물렀던 한 명의 독재자는 그렇게 잊혔고,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던 건 대학가였다. 11월 하순 휴교령이 풀리자마자 학생회 재조직을 준비하는 과대표 회의가 소집되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던 탄압에 끝내 무너졌던 대학들 간의 연락망 또한 다시 구축되었다. 안정을 찾은 각 대학의 학생회들은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년 봄은 되어야 새 정부가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대략 4개월이다. 기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이 과도기를 잘 넘겨야만 내년의 봄은 진정으로 따뜻할 수 있으리라. 주요 대학들의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11월 23일, 학생회 대표들이 서울대학교에 모여 총연합을 결성하였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서울 주요 대학과 함께 지방 국립대가 참여하였다. 새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정계를 감시하고,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짐짓 진부한 내용의 결의안.
“해당 결의안을 표결에 부치기 전, 마지막 토론을 진행하겠습니다. 각 대학 학생회 대표분들, 그리고 참여하신 청중들께서는 발언권을 얻은 뒤 자유롭게 발언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법 낭랑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울렸다. 의장석에 앉아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여학생의 말에는 전라도 억양이 섞여 있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윤선화, 라고 새겨진 명패에 눈길이 쏠렸다. 남학생들이 주를 이루는, 그것도 소위 학벌이 낮으면 무시당하는 총연합이다. 그런 곳에서의 여성 의장이라는 것은, 다른 건 몰라도 그 능력 하나만은 인정받았다는 소리였다.
"서울대학교 학생회 소속 한예원입니다."
청중석에서 한 학생이 발언권을 얻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석에 앉아 있던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얼굴에 당황스런 기색이 스쳤다.
"의장님 해당 학생은 서울대 학생회 소속이……."
다급한 듯 말을 꺼내는 그에게 선화는 싸늘한 시선을 건넸다.
"회장님께서는 발언권을 얻으신 후에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예원 학생은 서울대 교내에서 여학생회를 조직, 학생회와의 연합을 요청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거절하신 게 바로 회장님이시고요. 남성 위주의 권위적 학생회 문화야말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 시점에서 지양해야 할 바라고 생각하며, 본 회의에서는 서울대학교 여학생회 역시 총연합 소속으로 인정하여 총학생회와 같은 권한을 부여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작 여자 따위에게, 하는 경멸이 그의 얼굴에는 가득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의장의 권한은 그만큼 절대적이었고, 어쨌든 그녀를 능력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럼 한예원 학생은 발언을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예원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선화는 1년 전의 그 날을 떠올렸다. 서울역 광장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던 그 봄의 어느 날.
***
사촌 언니를 만나기 위해 생전 처음 서울에 도착했던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에 발을 디딘 선화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울도 하늘은 똑같이 푸르구나, 가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언니는 2시에 서울역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아직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작은 돌계단에 앉아, 선화는 생경한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 앞 광장에는 제법 많은 대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언니도 저기에 있으려나. 대열의 맨 앞에서 한 여학생이 확성기를 잡은 채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한예원입니다. 존경하는 학우 여러분, 그리고 시민 여러분, 잘못을 외치는 목소리가 묵살 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된지 5년이 지났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짓밟고, 국민의 주권은 그저 권력자들의 허울 좋은 명분으로 전락한지 5년이 지났습니다.”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10월 유신이 벌써 5년 전이구나. 선화는 지난 5년이라는 시간을 가만 돌아보았다.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으로의 나날들. 잘못이 잘못인 줄 알아도,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몰랐던 부끄러운 지난날들이었다.
“아무렇지 않으신가요? 지난 5년, 여러분이 살아오신 노예의 삶이 그저 편하고 좋으셨나요? 그런 개만도 못한 삶에 만족하시나요? 현 정부는 자신이 외치는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저 물질적인 풍요 속에 모든 걸 둔갑시킨 채 국민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선과 악을 판가름 내릴 법이라는 심판자조차, 그들의 손에 잠식되어 그 힘을 잃은 지 5년이 지났습니다. 잘못이 잘못인 줄도 모르는 여러분의 이성과, 그저 두렵다는 이유로 나서지 못하는 여러분의 심장이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혜원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단어는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혜원의 말을 들으며 선화는 부끄러웠다. 저기 저 여자는 할 수 있는 걸 나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 두렵다는 핑계 아래 죽어버린 나의 심장이 부끄러웠다.
“윤선화, 일찍 왔네?”
사촌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 문득 고개를 돌렸다.
“어, 언니 안녕. 나도 막 왔어.”
“너 기다릴까봐 먼저 나왔지. 내일 한예원 선배한테 깨지는 거 아니려나 몰라.”
“언니, 저 분 알아?”
“언니네 학과 두 학번 선배. 선배가 빠른 년생이니까 제대로 계산하면 1년 선배지. 학생운동 하는 쪽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선배야. 말 되게 잘하지?”
“말도 잘 하고……. 저렇게 예쁜 입에서 거친 말도 나올 줄 아네.”
“예쁜 입? 뭐래, 윤선화 반한 거 아냐?”
언니의 장난스런 말투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부정하진 않았다. 글쎄,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꼭 대학에 가야지. 그래서 저 여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찰나의 스침은, 열아홉 윤선화의 인생을 뒤흔든 파동이 되어 돌아왔다.
***
회의가 끝난 후 선화는 퇴장하는 예원을 잡았다. 예원은 선화를 바로 알아보았다. 꽤나 앳되어 보이는 얼굴로 회의를 진행하던 그녀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거기다가 여학생회 해프닝까지 알고 있다니, 서울대 내부에서도 학생회 관련 일부 학생들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윤선화입니다. 오늘 회의에서 의장을 맡았었구요.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말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녀가 있는 서울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열아홉 윤선화의 유일한 목표는 이 위험한 시국에 멀리까지 학교를 보낼 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지역 내에 가장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총학생회 활동을 해야지. 한 번쯤은, 정말 우연이라도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 생각 하나로 악착같이 올라온 총학생회장 자리였다. 선화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한예원입니다. 회의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청중 발언 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며 예원은 살며시 웃어보였다. 날카롭고 사납던 평소와는 또 다른 모습에, 선화의 마음에 잔물결이 일었다.
또 다시 찰나의 스침. 그러나 이번에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역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편지로 대화를 나누었다. 학문적인 날카로운 논쟁,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때로는 학생다운 두려움까지. 그런 대화들은 두 사람에게 지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유대감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던 중 12.12 사태가 일어나 신군부가 정권을 잡았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설레던 봄바람의 기운은 어느새 다시 겨울로 돌아갔다. 선화와 예원 역시 깊이 절망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서, 당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서. 탄압 속에서도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총연합은 유지되었고, 선화와 예원의 편지 역시 끊이지 않은 채 이어졌다.
1980년 5월 16일 밤, 교내로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첩보를 받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다. 출입구를 닫아걸고 도망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놓은 채, 예원과 몇 명의 학생만이 학생회실을 지키고 있었다. 새벽 1시 무렵 전화가 걸려 왔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윤선화입니다. 서울대학교 학생회실 맞나요?”
“네, 서울대학교 학생회 소속 한예원입니다. 선화 씨, 괜찮으신가요?"
“아, 예원 씨가 남아계셨군요. 전남대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내일 휴교령이 내려질 것 같아요. 서울은 오늘 계엄군이 들이닥칠 거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예원 씨도 얼른 피하세요.”
“학생이 학교를 버리면, 학생회실을 버리면 누가 학교를 지키겠어요. 최후의 순간까지 버텨보겠습니다. 선화 씨도 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내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려지면,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 시위를 진행하기로 합의되었습니다. 예원 씨가 전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마 이게 우리의 마지막 연락이겠죠? 살기를 바라겠지만, 혹여 잘못 되더라도 그다지 미련은 없을 것 같네요. 이 모든 게 무의미한 희생은 아닐 테니까요.”
“저는 하나 미련 남을 거 같아요. 평범하게 살아보지 못한 거. 역사에 작은 조각이 되는 것도 멋있는 삶이었지만, 한 번쯤은 나도 평범한, 스물 한 살의 윤선화이고 싶었거든요.”
수화기 건너편이 시끄러워졌다. 계엄군이 학교에 기어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선화가 말을 이었다.
“하나만 약속해요. 나 6월에 생일인데. 꼭 우리 둘 다 살아남아서 내 생일에 만나요. 그 때는, 학생운동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딱 한 번만 평범한 대학생들처럼, 영화도 보고 점심도 먹고……. 그렇게 평범하게 시간 보내요. 우린 늘 격렬하고, 뜨거웠으니까. 고마웠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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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한 번 안아달라고 할걸."
아스라한 햇빛이 금남로 거리에 쏟아졌다. 길바닥에 낭자한 핏자국들이, 아련하게도 붉었다.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잔인했던 봄도 끝을 맺겠지. 카키색의 군복들이 꽃잎들 사이로 스치듯 보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아마 자신을 겨누고 있으리라.
결국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진행하자는 약속은, 오직 전남대에서만 지켜졌다. 학생들의 시위는 곧 시민들의 동참으로 그 몸집을 불렸다. 진압을 위한 계엄군이 광주에 파견되었고, 누가 지시했는지 모를 민간인을 향한 사격이 이루어졌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은 무기를 들었고, 그렇게 숨 막히는 대치와 저항이 이어져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린 이팝나무 꽃잎들은 그대로 그 붉은 자욱 위에 몸을 던졌다. 그 하얀 빛깔이 피로 물들어 붉게 번지게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꽃잎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꼭 날 닮았네, 선화는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에 서 있는 건, 저 수많은, 나를 겨누고 있는 총 앞에 서 있는 것은 정말 내 의지일까? 선화는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또렷한 하늘은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열아홉의 서울역, 한예원을 처음 만난 그 날.
여태 내가 꿈꾸었던 세상은, 내가 옳다고 믿었던 신념은 정말, 오로지 나의 의지였을까? 그녀를 만나고 내 인생은 시작되었다. 그저 한 번의 스침을 마음에 품은 채 나의 청춘을 던졌다. 그래, 이것은 어쩌면, 나의 의지가 아닌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부 부질없는 약속이었으리라. 단 한순간조차 평범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게 나의 운명, 가혹한 천명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발포 명령과 함께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 나란히 서 있던 대열의 사람들이 하나 둘 스러져 갔다. 복부 쪽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얀 와이셔츠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시선을 애써 붙들며, 선화는 예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신만큼은 꼭 살아남기를. 우리가, 아니 당신이 꿈꾸었던 세상을 위해서, 나는.
안녕하세요:) 처음 올려보는 소설인데 어떻게 봐주실지 짐짓 궁금하네요. 제 이름은 꽃 화에 그림자 영, '화영'이라고 읽어주시면 됩니다. 1980년대 배경을 좋아하고, 알듯 말듯한 감정선이 드러나는 스타일의 소설을 좋아해요. 아무쪼록 예쁘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댓글로 피드백 부탁드릴게요.
첫댓글 내용이 짧아서 인상에 남는데 피드라면 어떤부분이 포인트가될까 이점이 약간...
이때당시는 상당히 혼란기에 있었던 우리나라였지요 군인들의 총칼이 번뜩이던 시절 ~~~
단편 소설이라기 보다는 장편 소설의 어느 일부분을 읽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