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대장 약산 김원봉이 광복군을 창설하기 위해 태항산에서 이 집으로 와 거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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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거리에는 임시정부의 분열과 많은 요인들의 밀정행위에 환멸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이 무장독립운동을 주창하며 이곳으로 몰려들어 이 거리를 '아나키스트의 거리'라 불렀다
김원봉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이여성의 집에 갔다가 이여성의 숙부로부터 약산 약수 여성이란 호를 받았는데 이들 세 사람은 평생동안 이 호를 사용하였다
산 같아라의 약산
물 같아라의 약수
별 같아라 여성
그리하여 김약산과 김약수 이여성은 결의형제가 되었고 평생동지가 되었다 한다
1918년에 김원봉, 김약수, 이여성은 함께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당시 동지들을 규합한다. 김원봉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약수 이여성 등 다른 동료들이 귀국한 것과 달리 만주에 남아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했다. 오직 무력을 통해서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1919년 길림성에서 13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백(단장)이 되었다. 그는 의열단을 이끌며 조선총독,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등의 암살과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종로경찰서,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같은 일본 관청의 파괴를 지휘했다.
조직적인 투쟁을 하고자 1922년에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교했고, 1927년에 중국 국민당의 북벌전쟁에 참여했다. 1930년에 조선 공산당 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베이징에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여는 한편 국내에 조직원을 파견했다.
다음해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난징에 조선인혁명청년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간부들을 양성했다. 1933년에 중국 관내에 있는 독립운동 정당, 단체 5개를 모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통일전선연맹을 결성했고, 이듬해에 군사 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대장을 맡았다.
김원봉 중심의 이러한 단체는 중국에서 김구 중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과 대립하면서, 독립운동 진영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39년 5월에 임시정부의 김구와 함께 단일조직을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1941년에 조선민족혁명당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했으며, 그 후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시켜 광복군의 부사령이 되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이여성의 막내동생은 화가로 유명한 이쾌대이다
이여성은 대구에서 혜성단(彗星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출옥 후 일본 도쿄[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 정치경제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새로운 세계관이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3년에 도쿄에서 김약수(金若水)와 함께 사회주의 단체 북성회(北星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5년에는 사상 단체 일월회(日月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성악가 박경희(朴慶姬)와 결혼하였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는 상해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