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
혼주의 계좌번호만 달랑 보내왔다. 결혼식 축의금을 대신해 줄 수 있느냐며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니 돌아온 답신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 문자 메시지 속에 숨어있을 의미들이 하나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런 심부름하기 싫다는 뜻으로 읽혔다. 혼주의 계좌로 바로 보내면 간단한 일인데 굳이 타인을 귀찮게 하며 축의금을 전달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모임에 가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딱히 부탁할 사람도 없어서 회장한테 문자를 보냈었다. 회원의 잔치이니 회장은 당연히 축하해 주러 갈 것이라 여겼다. 결혼식을 하는 서울까지는 아니더라도 혼주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니 그 집으로나마 가서 축하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가는 길에 봉투 하나 더 써서 내 축의금도 전달해 주기를 바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주의 계좌로 축의금을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혼주를 물신주의자로 치부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회장한테 전화를 하려다가 더욱 실례가 될 것 같아 다시 조심스럽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혼주의 통장으로 축의금을 입금한다는 건 왠지 도리가 아닌 것 같으니, 회장의 통장으로 돈을 보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루해가 저물도록 묵묵부답이었다. 무시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다. 모임의 회장이라면 회원을 대표하는 직책이니, 싫더라도 회원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은가. 온종일 회장의 직무를 들먹이고 도리를 운운하며 불편해했다.
결혼식이라는 게 뭔가. 신혼부부나 혼주가 일가친척들과 지인들을 초청해 놓고 혼인을 서약하고 공표하는 축복의 자리가 아닌가. 초청을 받으면 마땅히 참석하여 축하해 주는 것이 사람다운 도리이고, 상부상조하는 뜻으로 축의금을 전달하는 것이 오랜 관례가 아니던가.
요즘 들어 혼주의 통장으로 축의금을 송금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청첩장에 아예 계좌번호를 찍어서 돌리는 이도 있다고 한다. 결혼식은 외국에서 이미 하고는 어느 식당으로 지인들을 초청하여 당사자가 없는 결혼식도 한단다. 그런 말에는 은근히 혼주를 비난하는 저의가 깔려 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바빠서 예식에 오지 못하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청첩장에 계좌번호를 찍어 보내는 건 어쩌면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엇이 주된 목적인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혼인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축하를 받는 것이 우선인지, 축하하러 오지 않더라도 축의금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인지.
사실, 서울에서 한다는 이번 결혼식에도 굳이 참석하려면 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하루나 이틀 전에 혼주의 집을 방문하거나 커피숍에서라도 만나 축하 인사와 함께 축의금도 전하면 된다. 서울의 결혼식장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리 멀지 않은 인근에 혼주가 살고 있으니, 마음만 내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축의금만 전하려고 한 것은 그 정도면 최소한의 도리를 다한다는 판단에서다.
청첩장을 받거나 부고를 받으면 직접 갈 경우도 있고 부조금만 인편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다. 얼마나 가까운 일가친척인지, 친분이 두터운 지인인지, 만사를 다 제쳐놓고 꼭 참석해야 할 자리인지, 참석지 않고 부조금만 보내도 될 자리인지, 부조금은 얼마나 해야 할지 헤아리게 된다. 이때만큼은 상대방과의 이해득실 관계를 따지고 관계의 거리를 계산한다.
이번에도 철저한 계산을 통해 산출된 선택이었다. 혼주와는 격월로 만나는 모임에서 기껏해야 한두 번 보기는 했어도 아직 낯선 사이였다. 친분은커녕 이름 정도만 알 뿐이었다. 공지를 받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함께 활동해야 할 사이인지라 혼사를 치른다는 말을 듣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조금이라도 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조금을 전하는 것만이 내 목적이었다. 그저 부조금만 전할 요량이라면, 타인에게 맡겨서 전달하든, 혼주와 직접 만나서 전달하든, 혼주의 계좌번호로 송금을 하든,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굳이 봉투에 현금을 넣어서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이 아닌가. 실질은 생각지도 않고 예의나 도리를 내세우며 애꿎은 타인을 원망한 꼴이 우습다. 그러나 나는 윤리적 허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본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나일까.
- 여세주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조금 좋은글 감사합니다
남은 시간도 행복하시고
즐건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