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 《 피에로 눈물의 의미를 아나요 》05, 06

[신모연]

제 2 화  고 백(1)

차기 MC라 매스컴을 통해 주목받을 만큼 매끄러운 진행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열기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날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는 자선기부콘서트는 기자들까지 취재하러 올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무료입장이기에 관객들로 하여금 부담이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이번에 제 5회를 맞이하고 있는 콘서트의 주최가 하늘그룹사라는 점에서 여러 곳에서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봉사정신이 투철한 이번 하늘그룹사의 새로운 사장 덕분에 회사는 해를 거듭 할수록 국내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좋은 이미지로 사람들로 하여금 굳혀지고 있었다. 지금의 사장의 노력으로 인해 그 전에 터졌던 비리는 한 줌의 재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고 오히려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백화점 , 대형마트 , 호텔, 백화점 등등 그 세력을 넓고도 다양한 분야로 퍼져나가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한 해에 한번 지금처럼 자선기부콘서트를 주최하는 가 하면 한 달에 한 번은 국내에 있는 노인복지회관, 장애인복지센터, 입양센터 등등 여러 기관에 봉사를 감으로써 어려운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사장이 바뀜으로써 모든 것들이 일사천리로 만사 해결되고 있었으니 하늘그룹은 나날이 발전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사장의 열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웬만한 기업이 아니고서는 지금의 사장의 얼굴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돌연히 갑자기 등장한 사장이라는 자에 대한 떠도는 소문들이 무성했지만 매스컴에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자유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점이 제일로 컸을 것이다.

"오늘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이 분이 무척이나 좋아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러 와주신 이 자리를 빌어 꼭! 전하고 싶다는 남성분이 있습니다."

어느 덧 해가 저물어 콘서트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초대된 MC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하면서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들이며 마지막까지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름이 굉~장히 특이하신데요. 이거 본명인가요?"

대본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며 MC는 마이크를 입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적힌 이름을 중얼거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반하셨나 봅니다. 모시겠습니다. 반해서씨!!"

이름이 호명되고 무대 위로 정장으로 말끔히 차려입은 키가 꾀 큰 남성이 올라갔다. 무대의 양 옆에 설치된 넓은 스크린 화면으로 무대 위로 올라온 남성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혀 비춰지고 있었다.

연예인 못지않은 빼어난 외모에 관객의 곳곳에서 여성들의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MC역시 자신보다 키가 큰 남성에 한 번 기가 죽고 외모에서 또 한 번 기가 죽었다.

"오~ 잘생겼죠?"

MC는 관객들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관중석에서는 열렬한 환호의 대답을 내질렀다.

무대 위로 올라선 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음에도 쑥쓰러워 하는 기색 없이 당당해 보였다. 사실 해서는 자신의 눈앞에 저 멀리까지 자리를 차지한 관객들의 모습이 환한 빛으로 인해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무대에서 조금 떨어지지 않은 중앙의 관객석에 아름다운 여성 한 명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눈웃음 짓는 해서의 모습에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설란 역시 수줍은 미소를 손으로 애써 가리며 그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마이크를 건네 받은 해서가 목을 가다듬고 인사를 했다. 그의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목소리가 감미롭자 MC는 또 한 번 놀라 양손의 검지를 관객들로 하여금 보이도록 치켜세웠다. 사람들 역시 그의 목소리에 많이 놀란 듯 여성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직장생활 하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취미로 연극생활을 하고 있는 반해서입니다."

"오~ 연극하십니까?"

MC는 스텝으로부터 또 하나의 마이크를 건네 받아 질문을 했고 해서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요즘 하시는 연극이라도 있으신가요?"

"다음주 금,토,일 소공연장에서 '광대'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많이들 보러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야~ 목소리가 정말 좋으십니다."

"아, 감사합니다."

MC는 옆에서 듣고 있자니 저절로 눈이 감기는 것 같았다. 단순히 노래가 아닌 말을 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감상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거기 주인공 이신가요?"

"아, 회사일로 바빠서 요즘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친구가 하고 있거든요. 보러갈 참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 공연 초대해 주시면 가겠습니다."

"티켓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무언가 어색한 대화들이 오가며 무대 뒤 스텝이 무언가 손짓을 해보였고 그의 손동작을 본 MC가 화제를 바꾸고자 했다.

"뭔가 이벤트를 준비하셨다고 하셨는데 뭡니까?"

"네. 제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MC의 질문에 해서는 망설임없이 당당히 말을 전하자, 관중들로부터 열띤 환호성이 내질러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청혼하고자 합니다."

해서는 설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전했고 그의 말에 설란은 꾀나 놀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예상 밖의 해서의 말로 인해 설란은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그룹에 사장으로 취임하고서 늘 곁에서 그를 응원하였고 늘 그림자로만 사장역할을 하던 해서가 매년 개최하는 콘서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오늘 자리를 빌어 자신이 사장임을 공식적으로 공개한다는 의미로 본인 역시 초대되어진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려니 떨 것 같다며 힘이 되어달라는 그의 말에 지정된 좌석에 잘 보이는 곳에 앉았을 뿐더러 처음 무대에 올라섰을 때 겉으로 비춰지는 모습에서는 전혀 떨지 않고 있어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선 자신에게 얘기하던 바와는 전혀 다른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오설란."

"오설란씨 어디 계시나요?"

MC의 물음에 조명은 관객석을 비추어 그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해서의 부름에 단단히 준비를 마친 비서의 명령에 따라 조명팀은 실수 없이 설란이 앉아 있는 곳을 비추었고 스크린을 통해 그녀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스크린을 확인하던 관중석에서 환호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자 당황한 설란은 양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부추김에 자리에 일어났다.

"아, 오설란씨!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설란은 관중들의 우렁찬 박수 소리에 관객석에서 나와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해서는 짧은 스커트의 설란이 계단을 오르는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해서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무대 중앙으로 끌고와 섰고 MC는 무대 끝 쪽으로 가서 섰다.

MC는 개인적으로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소개를 하려 했었지만 콘서트가 시작하기에 앞서 해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자신의 여자임을 밝히고 싶을 뿐 그녀가 누구인지 에 대해선 알리고 싶지 않음을 알렸다. 그의 뜻에 따라 그녀가 무대에 올라옴과 동시에 본인은 알아서 뒤로 빠져 주었다.

"설란아."

"갑자기 이게 뭐야."

"놀랐어?"

"원래 하려던 게 이게 아니었잖아."

관중들은 숙덕거렸다. 마이크에 대지 않은 채 무대 위에 올라서 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언가 말을 주고받을 뿐, 관중들에게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해서는 그녀의 상기된 볼을 어루만져 주었고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설란!"

해서는 마이크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나와 결혼 해 주겠어?"

그의 말에 관중석에서 방청객 수준을 뛰어 넘은 열렬한 환호가 터져나왔다.

"뭐야, 반지도 없이 고백하는 거야?"

"평범한 회사원이라잖아. 연극을 한다는 데 그리 부유한 집안은 아닌 모양이야."

"그래도 여자는 내심 바라고 있을 텐데..."

일찍 자리를 옮긴 탓에 무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를 앉은 부부가 서로 속닥였다. 무대 위에 올라선 남자가 반지 하나 없이 그저 맨 입으로만 이름이 설란이라는 그녀에게 고백하고 있는 상황이 여자입장에서 볼 때 조금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부부 주위로 연인들도 친구들도 함께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저마다 프로포즈 한답시고 아무런 준비도 안 한 남자에게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프로포즈에 물질적인 것이 꼭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흔한 꽃다발도 없이 고백하고 있는 남자가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과연 설란은 그 고백을 받아줄 지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 사람들은 궁금했다. 온 시선이 그녀에게로 쏟아져 있었다.

"응."

고개를 끄덕임과 함께 짧게 대답을 한 설란을 해서는 꼭 끌어안아 주었다.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무대 가장자리에 설치 된 불꽃이 터짐과 함께 무대 위 하늘에서 불꽃이 내려와 두 사람이 서 있는 위로 무언가 펑-하고 터지면서 장미꽃잎들이 아름드리 떨어졌다.

관중들은 갑자기 터진 폭죽에 한 번 놀라고 두 사람에게로 떨어지는 장미꽃잎에 두 번 놀라고 그리고 긴 리본이 달린 자그마한 상자가 무대 위 천장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면서 마지막으로 더 놀라고 있었다.

"세상에~ 저거 반지 든 거 아니야?"

"어머~ 저 남자. 능력 좋은 남자네."

"완전 부럽다."

곳곳에서 여자들의 부러움의 한마디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해서는 설란을 품에서 놓아주고 적당한 위치에서 멈춘 상자를 잡아 길게 묶여진 리본을 조심히 풀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꺼내어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왼 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고마워."

해서는 일어나 설란을 바라보며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나긋이 속삭이듯 말했다. 설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었고 그 장면이 양쪽의 스크린을 통해 비춰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키스로 저마다 환호를 내질렀고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박수 또한 아낌없이 쳐주고 있었다.

"짜식, 많이도 준비했네."

멀찍이 사람들 뒤에 서서 스크린을 통해 두 사람을 보던 지호가 팔짱을 낀 채 한마디 했다.

"엄마... 울어?"

서후가 시연의 치맛자락을 잡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발견했다. 지호는 서후의 말에 시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스크린에서 눈을 뗄 줄 모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정말..."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이. 아니,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서희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너무나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희의 여자에게서 마음 속 깊숙이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원래 서희의 곁에는 자신이 있어야 했고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지금이 현실이니 꿈에서 깨어야 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고 그 세월이 서희와의 관계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문제는 서희의 기억 속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에 더욱 더 그를 잊어야 했다. 이제는 정말,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그를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래야했다.

그것이 어쩌면... 서희에게도 자신에게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제 2 화 고 백(2)

잘 시간을 훌쩍 넘어서인지 서후는 차 뒷자석에서 누워 곤히 잠들었다. 서후는 잠들면서도 서희가 주었을 강아지 풍선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혹시나 아이가 깰 까 조심히 운전하고 있었다.

라랄라랄라...라랄라랄라...

주택가에 접어들면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9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 올 곳이라면 그 사람밖에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생각보다 늦어진 귀가로 인해 외국으로 출장을 마치고 집에 와 있을 그이가 걱정에 전화를 했으리라.

"네."

- 많이 늦어?

"아니요. 거의 다 왔어요."

- 서후는 자고 있겠네.

"뒤에서 곤히 자네요. 아, 집 앞이에요. 곧 들어갈게요."

- 그래. 마중나갈게.

뚝-

시연은 전화를 끊고서 백미러를 통해 곤히 자고 있는 서후를 확인했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미소가 절로 흘러 나왔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자신은 행복하다.

곳곳에 자리한 가로등 불빛이 그나마 어두운 동네를 비춰주고 있었고 확연히 구별할 순 없지만 하얀 집이 본인의 쉼터였고 많은 주택들 사이에서 앞에 산책로가 있다는 것만으로 쉽게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집 현관문을 열고 나온 청현은 마당을 지나 자신을 보고 꼬리를 치며 반기는 애완견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울타리의 작은 문을 열고 나왔다. 바로 집 앞에 주차된 검은차 맞은 편에 산책로가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주차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빈 곳에 주차시키는 파란차를 바라보았다.

주차를 마친 시연은 차에서 내렸고 그녀를 본 청현은 한걸음에 뛰어와 뒷문을 열어 곤히 잠든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았다. 서후는 잠결에 그를 알아보고 '아빠'라 잠꼬대 하듯 불렀고 청현은 '안녕,아들' 하며 그의 말에 답해주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여전한 된장찌개...뭐, 맛있게 먹었다고 해야겠지."

청현의 장난 섞인 말투에 시연은 웃으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는 서후를 안은 채 집으로 향했고 시연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따라 걸으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구석 한 켠에는 그이가 직접 서후를 위해 준비한 애완견으로 키우고 있는 키위의 보금자리가 있었고 키위는 혀를 내밀어 헥헥- 거리며 비가 겐 후에 나갔다 늦게 귀가한 시연을 보며 반가움에 앞발을 들어보였다. 시연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간 청현을 두고 키위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황금빛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 그 사람을 봤단다."

시연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키위에게 한마디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위는 알아듣기라도 한 것 처럼 짖기보다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시연은 키위를 뒤로 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즐거운 일 있었어? 생각보다 많이 늦었네."

서후를 방에 눕혀 놓고 1층 거실로 내려오던 청현은 막 집 안으로 들어선 시연에게 물었다. 청현은 거실 중앙으로 걸어오던 시연의 여린 어깨를 감싸 잡으며 뒤뜰이 보이는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자리에 앉혀 놓고 본인은 다시 나와 주방으로 뛰어가듯 걸어가 와인을 꺼내어 잔 두 개를 챙기고 다시 돌아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자기 전 매일 이렇게 그녀와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의 고질병을 고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한 시간 가량의 긴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의 하루 일과를 들으며 힘들어 할 땐 위로하고 기쁠 땐 기쁨을 나누고 슬플 땐 그 슬픔을 같이 나누면서 그녀가 심리적으로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해 주었다.

지금은 하늘호텔 지배인으로 있지만 원래 대학시절엔 정신의과를 전공했었다. 어느 정도의 기본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특히 그녀의 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녀를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이번 주는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내일 우리 둘이 놀러갈까?"

청현은 잔에 와인을 따라 주면서 물었다. 시연은 쪼르르- 잔이 채워지는 와인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그녀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을 채우고서 잔을 들었다. 그녀 역시 잔을 들어 가벼이 부딪히고는 한 모금 입술을 축일 정도로만 맛을 음미했다.

"내일 역시 오늘처럼 맑다고 하네. 산보다는 바다로 가는 게 좋겠지?"

"청현씨."

잔을 흔들다 한 모금 더 마시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청현은 턱을 괴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와인잔을 내려다 볼 뿐 말이 없다가 그를 부르며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을까. 죽은 줄 알았던 서희가 살아있다고 말을 해야 할 까. 그리움에 잊은 적 없던 서희가 지금의 여자에게 결혼하자 고백을 하는 모습을 봤다고 그에게 다 털어놓아야 할 까.

시연은 갖가지 고민들로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자신을 너무나 사랑스럽게 바라봐주고 있는 청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아련하게 아파왔다. 제대로 자신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는 받을 것 보다 오히려 주는 것만으로 더욱 더 행복을 느낀 사람인데. 이제 못 준 사랑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그만을 보고 그만을 사랑할 것으로 다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굳게 결심했던 마음이 서희를 본 순간부터 처참히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이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과연 정말 진심으로 행복했을까. 정말 서희를 잊겠다 마음 다 잡은 후에 그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

"시연아."

청현 역시 시연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아리따운 볼을 오른 손으로 감싸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로 서서히 가까이 다가가 시선은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멈춘 채 조금씩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이 가까워지면서 지그시 눈을 감아 입맞춤을 하려는데 그녀의 얼굴을 잡은 손끝에서 뭔가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져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시연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청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그녀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건지. 혹시나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그녀의 깊은 병이 증폭된 건 아닌 가 하는 걱정이 앞서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며칠 동안 집을 비우면서도 시차를 고려하여 그녀가 잠이 들 시간쯤에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어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 그녀의 말에는 차분함이 있었기에 늘 그렇듯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는 건 아니었기에 충분하지 않겠지만 나름 긴 통화를 하며 그녀가 혼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혼자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의 눈물인 건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청현씨. 나, 요즘 너무 행복한데..."

"하하...밖에서 정말 좋은 일 있었구나? 행복해서 우는 거야?"

"여기가... 너무 아려와."

"도대체 오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시연은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쿵쿵- 치면서 흐느꼈다.

앞으로도 행복할까

"왜... 이제야 안 걸까요."

"시연아."

"왜 이제야 그 사람... 본 걸 까요."

청현은 그녀의 얼굴 앞 허공에 멈춘 두 손을 어찌 해야 할 지 몰라하며 안타까움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시연의 두 눈동자는 청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청현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 지 전혀 감이 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엔 잊을 수 없는 한 남자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이외에는 주변에 친구들도 적었고 아는 남자라고는 전혀 없을 그녀이기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말해봐."

청현은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를 끌어안아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잠시 시연은 말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울음을 토해냈고 청현 역시 말없이 그녀가 조금은 진정이 될 수 있도록 기다리고 기다렸다.

몇 분이 흘렀을까, 조금은 진정이 된 듯 그녀의 울음이 멈춰 그의 품에서 벗어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괜찮아?"

"미안해요. 너무나...너무나 그리웠던..."

"누군데? 친구? 내가 아는 사람인가?"

청현은 천천히 그녀가 울음을 터뜨린 이유를 알아가고자 했다.

"서희."

"...!..."

이제는 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의 말을 믿었지만 절대로 서희라는 자를 잊기 힘들거라는 것을 청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진심으로 그 자를 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 그런 자신의 노력이 보였는 지 그녀 역시 차츰 자신에게 사랑을 주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말에서. 몸짓에서 까지.

정말 그 사람을 잊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더욱 더 그녀가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게 노력해야 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녀의 입에서 지금. 그 자의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감춰보려 하지만 표정이 굳어지는 청현.

"서희를 봤어요."

"무슨 소리야. 그 자는 벌써 죽었잖아. 닮은 사람을 본 거야? 그래서..."

"아니, 아니야. 그가 지닌 짙고도 깊은 검은 눈동자. 지을 듯 말 듯한 미소."

"그건 누구나..."

"전화로는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까지."

"..."

그녀의 마지막 말에 뭔가 하려던 말을 그만뒀다.

목소리. 처음 그 자를 봤을 때 어두워 그의 얼굴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목소리가 이뻐서 당신처럼 전화로는 들을 수 없거든."

어린 시연의 당차던 말을 한 번에 이해가 되었던 그 날의 그 자의 목소리. 흔하지 않은 듣기 좋은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졌다. 같은 남자가 들어도 마치 감상에 젖게 하는 빠져들게 하는 목소리였다.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고운 목소리를 가진 서희라는 남자.

"어떡하면 좋아요, 나?"

"시연아..."

"나, 약속 못 지킬 거 같아요."

"그게..."

"서희를... 잊을 수 없을 거 같아요."

시연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자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청현에겐 시연 못지않은 꾀나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야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시작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남들 보다 더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야 정말 그녀가 자신을 봐주며 서로 사랑하며 남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왜... 살아 있었던 건가, 당신은.

*

안녕하세요^^ 이N제이입니다

이번회는 개인적인 일로 인해 며칠만에 올립니다.

업쪽=피에로★

댓글은 연재에 있어서 정말 큰힘이 됩니다.

요즘 약간의 슬럼프가 찾아오고 있네요.ㅜㅜ

힘이 되어주세요~

[자각소녀]

피에로★저프롤부터다보구와써요!!!보느라벌써날이샛네요ㅜㅜ진짜계속보게되는소설이에요!!제가매편응원하께요작가님힘내시고화이팅♥.♥담편두기대되용!

[이N제이]

댓글 감사합니다. ^^ 다음편 곧 올리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