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주일 연중 제12주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왜 겁을 내느냐?
등산을 가면서 산을 오르며 묵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다가 흔하게 뱀을 만나기도 합니다. 꽃뱀은 화려하고 아주 빨라서 풀잎을 헤치는 스르르 소리가 더 무섭고, 까치 독사는 정말 겁이 납니다. 가을의 무성한 갈대밭에서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달려오면 급히 몸을 피해야만 합니다. 한 번은 사정을 두지 않고 쫓아오는 바람에 험한 산길을 얼마나 달려 내려왔는지 모릅니다. 어릴 적 어느 날엔 낫을 들고 꼴을 벨 때인데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돼지들이 좋아하는 풀을 부지런히 베고 있는데 물뱀 한 마리가 비를 피해서 풀 섶에 웅크리고 똬리를 틀고 있다가 그만 낫질에 놀라서 느닷없이 내게 달려들어 내 다리 정강이 위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겁을 하였는지 낫으로 물뱀을 떼버린다는 것이 왼손 검지와 정강이를 찍어서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그때는 파상풍과 같은 병을 ‘쇳독’이 걸렸다고 다들 무서워하였지만 뱀독은 더 무서웠습니다. 사실 내 다리를 타고 오른 물뱀은 독이 없는 것인데도 나는 그 후로 뱀은 아주 무섭게 느껴져서 발견 즉시 쫓아버리고 때리고 쉽게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뱀을 무서워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뱀이 독을 가지고 있어서, 독이 온 몸에 퍼지면 곧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지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건물을 신축하거나 다리를 신축할 때나 모든 토목 건축공사에서는 내진(耐震)설계와 시설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들 죽음을 위협하는 것으로 우리는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죽을 수 있는 환경과 처지를 더 두려워합니다. 불치의 병이나 갑작스런 육체적인 고통을 두려워하고 체면이나 내 환경에 닥쳐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기도 합니다. 암에 걸렸을 때 죽음과 대면하면서 죽기 살기로 암과 싸운 것은 오기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순사들이나 헌병들이 강제로 고문을 하거나 사람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한 것 등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일이며, 그런 일을 자행한 사람들의 잔인성에 대해서 더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사실 일을 별반 두려워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무슨 일이든 자신감을 가지고 일했는데 요즘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나의 낡고 진부한 지식이나 슬기롭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일이 잘 안 풀릴 때를 염려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그 두려움이 일보다 먼저 앞서기도 합니다. 아파도 병원에 잘 안 가려고 하는 것도 아주 큰 병이 생겨서 고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그게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와 어지간한 병은 점점 키우고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자신감도 없어지고 두려움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이를 먹어서 생기는 증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동안 크든 작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들에 대해 두려움도 가지고 있어서 오늘 복음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흔히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은 아주 험난한 항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멀쩡하던 호수에 풍랑이 왜 갑자기 밀려왔을까? 일기예보가 없었던 시기여서 풍랑이 올 것을 몰랐다면 제자들은 어부 출신들이었는데 그만한 풍랑을 이길 수는 없었을까? 나는 그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나름대로 추측하고 상상해봅니다. 그날 바람과 풍랑과 물이 배에 가득히 쳐들어온 사건은 사탄의 도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예수님께서 쉴 틈을 주지 않으려고 심술을 부리고, 제자들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서 흩어놓으려고 작전을 세워 이웃에 복음을 전하려는 주님의 의도를 주님께서 주무시는 틈을 타서 작전을 전개 한 것이라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바람과 풍랑은 사고(思考)와 사조(思潮)의 흐름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유행처럼 우리의 생활에 비집고 들어오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독소요인들을 사탄이 뿌리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황금만능주의도, 이기주의, 불신풍조, 정치적 기류와 전쟁도 그렇습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 사랑의 감정을 없애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시기와 질투로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등 모든 것들이 오늘 사탄이 만들어 낸 장애이며, 두려움이며, 유혹들일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있어도 서슴없이 쳐들어오는 사탄의 간교함과 끈질긴 도전으로 우리는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지만 그런 바람과 풍랑과 물이 쳐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배가 빠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겨우 깨닫습니다. 죽음의 직전에서야 겨우 눈치를 채고서 미리부터 사탄이 발붙일 곳을 차단하는 지혜가 부족하고 그런 도전에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갈팡질팡하는 것이 우리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주님과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탄 앞에 굴복하여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때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오늘 제자들보다도 더 호들갑을 떨면서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너는‘믿음이 약하다.’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 아프게 들립니다.
오늘은 사도신경을 아주 천천히 기도하면서 내 믿음을 다시 새겨봅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14-17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축일 6월 23일 성 요셉 카파소 (Joseph Cafasso)
신분 : 신부
활동 연도 : 1811-1860년
같은 이름 : 까파소,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가 살레시오회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교구사제였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카스텔누오보 다스티(Castelnuovo d'Asti)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Torino) 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그는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그리고 성 요한 보스코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세니즘(Jansenism)을 퇴치토록 하였다. 또 그는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이기도 하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다. 그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셉 카파소 (Joseph Cafasso)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