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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38회
조오(朝吳)가 성중으로 돌아가 기질(棄疾)의 말을 전하자, 세자 유(有)가 말했다.
“군주는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바른 도리입니다. 내가 비록 아직 부친의 상을 치르고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섭정하여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 마땅히 이 성과 존망을 함께 할 것입니다. 어찌 원수에게 무릎을 꿇고 노예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蔡나라 君臣은 더욱 힘을 내어 성을 굳게 지켰다. 楚軍은 여름 4월에 포위를 시작했지만 겨울 11월이 될 때까지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공손 귀생(歸生)은 피로가 누적되어 병이 나서, 자리에 누워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성중의 식량은 바닥이 나고 굶어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 되었다. 성을 지키는 자들도 피로에 지쳐 더 이상은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楚軍이 개미 떼처럼 성을 기어올라,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세자 유는 성루에 단정히 앉아 포박을 받았다. 기질은 입성하여 백성을 위무하고, 세자 유를 함거에 실어 채유(蔡洧)와 함께 초영왕(楚靈王)에게 보내 승전보를 알렸다.
하지만 기질은 조오는 보내지 않고 곁에 남겼다. 얼마 후 귀생이 죽고, 조오는 마침내 기질을 섬기게 되었다. 때는 주경왕(周景王) 14년이었다.
그때 초영왕은 이미 영도(郢都)로 돌아가 있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자신은 구강산(九岡山)의 신이라고 하면서 말했다.
“나에게 제사를 지내주면, 그대가 천하를 얻게 해주겠다.”
잠에서 깨어난 영왕은 크게 기뻐하며, 구강산으로 행차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그때 마침 기질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영왕은 세자 유를 희생으로 바쳐 구강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다. 신무우(申無宇)가 간했다.
“예전에 송양공(宋襄公)이 증자(鄫子)를 수수(睢水)의 귀신에게 바쳤기 때문에 제후들이 반기를 들었었습니다. 왕께서는 그런 전철(前轍)을 밟지 마십시오.”
[제65회에, 송양공이 등(滕)·조(曹)·주(邾)·증(鄫) 등 소국을 조나라 남쪽으로 불러 회맹하고자 했는데, 증자가 이틀 늦게 도착했다. 송양공은 수수의 귀신에게 증자를 희생으로 바쳐 제사를 지냈다.]
영왕이 말했다.
“이 자는 주군을 시역한 반(般)의 아들로서 죄인의 후손이니, 어찌 제후에 비할 수 있겠는가? 가축을 대신하여 희생으로 써도 될 것이오.”
신무우는 물러나오면서 탄식하여 말했다.
“왕의 포학함이 이렇게 심하니, 어찌 좋은 끝을 바라겠는가!”
신무우는 늙었음을 핑계대고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내려갔다.
채유는 세자가 피살되는 것을 보고 사흘 동안 슬피 울었다. 영왕은 그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석방하고 벼슬을 내렸다. 채유의 부친 채략(蔡略)이 지난번에 영왕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에, 채유는 마음속으로 복수할 뜻을 품고 영왕에게 말했다.
“제후들이 晉을 섬기고 楚를 섬기지 않는 까닭은, 晉은 가깝고 楚는 멀기 때문입니다. 이제 왕께서는 陳·蔡를 얻어 중화(中華)와 영토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陳·蔡의 성을 더 넓고 높게 증축하고 각각 병거 천승을 주둔시켜 제후들에게 위세를 과시하면, 사방의 누가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후에 군대를 일으켜 吳·越을 쳐서 동남방을 먼저 복속하고, 다시 서북방을 도모하신다면, 周王을 대신하여 천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영왕은 아첨하는 말에 기뻐하여 날이 갈수록 채유를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陳·蔡의 성을 증축하여 넓이와 높이를 두 배로 늘리고, 기질을 채공(蔡公)으로 임명하여 蔡나라를 멸한 공에 보답하였다. 그리고 불갱(不羹) 땅 동서쪽에 두 개의 성을 쌓아 楚나라의 요새로 삼아, 이제 천하에 楚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으니 곧 천하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영왕이 태복(太卜)을 불러 거북점을 쳐 보라고 하면서 물었다.
“과인이 언제쯤 왕이 되겠느냐?”
태복이 말했다.
“주군께서는 이미 왕을 칭하고 계신데, 무엇을 물어 보시는 겁니까?”
“楚와 周가 병립하고 있으니, 진짜 왕이 아니다. 천하를 얻는 자가 비로소 진짜 왕이 되는 것이다.”
태복이 거북 등껍질을 태워, 껍질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점을 보니, 왕께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겠습니다.”
영왕은 거북 껍질을 바닥에 내던지고 팔을 걷어 부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보잘것없는 천하를 주지 않으려면, 이 웅건(熊虔)을 무엇 때문에 낳았습니까?”
채유가 아뢰었다.
“모든 일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런 썩은 뼈다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영왕은 기뻐하였다.
제후들은 楚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소국은 친히 와서 알현하고 대국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그리하여 조공을 바치는 사신들이 줄을 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齊나라 상대부 안영(晏嬰)으로, 그의 字는 평중(平仲)인데, 제경공(齊景公)의 명을 받들어 楚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초영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안평중(晏平仲)은 키가 5척에 불과하지만, 현명하다는 명성이 제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소. 지금 해내(海內)의 여러 나라 가운데 楚나라가 가장 강성하니, 과인이 안평중에게 치욕을 안겨줌으로써 楚나라의 위엄을 과시하려고 하는데, 경들에게 어떤 묘계가 있소?”
태재(太宰) 원계강(薳啟疆)이 은밀히 아뢰었다.
“안평중은 응대를 잘하는 사람이므로, 한 가지로는 그에게 치욕을 안겨주기가 부족합니다. 반드시 여차여차 해야 합니다. ……”
영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원계강은 그날 밤에 군사들로 하여금 영성(郢城) 동문 곁에 높이 5척이 될까 말까 한 작은 구멍을 뚫게 하고, 수문장에게 분부하였다.
“齊나라 사신이 도착하거든, 성문을 닫고 저 구멍으로 들어오게 하라.”
새벽이 되자, 안영이 낡은 가죽옷을 입고 야윈 말이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서 동문에 당도하였다. 성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안영은 수레를 멈추고 어자로 하여금 성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수문장이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부께서는 저 구멍으로 출입하셔도 충분할 것 같은데, 하필이면 성문을 열라고 하십니까?”
안영이 말했다.
“저건 개구멍이지,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 아니오! 내가 개 나라에 왔다면 개구멍으로 들어가겠지만, 사람 나라에 왔다면 사람이 출입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소?”
수문장이 군사를 영왕에게 보내 안영의 말을 전하자, 영왕이 말했다.
“내가 그를 희롱하려다가 도리어 희롱 당했구나!”
영왕은 명을 내려, 동문을 열어 안영을 맞이하라고 하였다.
안자(晏子)가 영도(郢都)로 들어와 보니, 성곽은 견고하고 시정(市井)은 조밀하여 진정 지령인걸(地靈人傑)이요 강남(江南)의 승지(勝地)였다.
[‘지령인걸(地靈人傑)’은 산천이 수려하고 지세(地勢)가 빼어나서, 그 지기(地氣)를 띠고 태어나 그 곳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 뛰어나다는 뜻이며, ‘승지(勝地)’는 경개(景槪)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훗날 宋나라 학사(學士) 소동파(蘇東坡)가 읊은 ‘형문(荊門)’이란 시를 보면, 영도의 번성을 알 수 있다.
游人出三峽 나그네가 장강(長江)의 삼협(三峽)을 나서니
楚地盡平川 초나라 땅은 한없이 넓고 강이 흐르네.
北客隨南廣 북방의 객들은 남방의 넓은 땅으로 내려오고
吳檣開蜀船 吳나라의 돛배는 촉(蜀)으로 향하네.
江侵平野斷 강물은 흘러 평야를 가르고
風掩白沙旋 바람은 백사장을 맴도네.
欲問興亡意 흥망의 의미를 묻노니
重城自古堅 성은 옛날부터 견고했었다.
안영이 영도를 관람하고 있는데, 홀연 병거 2승이 대로를 따라 달려왔다. 병거에는 키가 크고 수염이 긴 풍채가 좋은 거한(巨漢)들이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채 손에는 큰 활과 장창을 들고 안영을 맞이하러 왔는데, 마치 천신(天神)과 같은 형상이었다. 안영이 그들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우호를 맺기 위해 온 것이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어찌 무사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안영은 거한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수레를 몰아 곧장 조정으로 갔다.
조문(朝門) 밖에는 10여 명의 관원들이 높은 관을 쓰고 넓은 띠를 매고서 질서정연하게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안영은 그들이 楚나라의 호걸들임을 알고, 황망히 수레에서 내렸다. 관원들이 앞으로 나와 안영과 인사를 나눈 후, 다시 좌우로 나누어 차례대로 서서 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관원들 가운데 한 젊은이가 먼저 입을 열어 안영에게 물었다.
“대부께서는 이유(夷維)의 안평중이 아니십니까?”
[‘이유(夷維)’는 안영의 출신지이다.]
안영이 보니, 투위구(鬥韋龜)의 아들 투성연(鬥成然)인데, 관직은 교윤(郊尹)이었다. 안영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부께서는 무슨 가르침을 주려 하십니까?”
투성연이 말했다.
“제가 듣건대, 齊나라는 강태공(姜太公)께서 봉함을 받은 나라로서, 병력은 秦·楚에 필적하고 재화는 魯·衛를 능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환공(桓公)이 한번 패업을 성취한 후로는 군위의 찬탈이 거듭되어 宋·晉에 교대로 정벌 당하고, 오늘날에는 아침에는 晉을 섬기고 저녁에는 楚를 섬기느라 君臣이 길 위에서 분주하니, 어찌하여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습니까? 齊侯의 포부는 환공보다 못하지 않고, 평중의 현명함은 관자(管子)에 뒤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君臣이 힘을 합하여 경륜을 크게 펼쳐 선대의 위업을 빛날 생각은 하지 않고, 대국을 섬기면서 스스로 신복(臣僕)에 비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안영이 소리 높여 대답하였다.
“무릇 시무(時務)를 아는 자를 준걸(俊傑)이라 하고, 기변(機變)에 통달한 자를 영호(英豪)라 합니다. 주왕실이 기강을 잃어 오패(五霸)가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齊와 晉은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秦은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었으며, 楚는 남만(南蠻)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인재는 대를 이어 나온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시운(時運)이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문공(晉文公)은 웅략(雄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가 죽자 晉은 패전하였고, 진목공(秦穆公)은 강성했지만 그 자손은 약해졌으며, 초장왕(楚莊王)의 후손들 역시 晉과 吳로부터 수모를 받고 있습니다. 어찌 齊나라만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과군께서는 천운(天運)의 성쇠(盛衰)을 알고 시무(時務)의 기변(機變)에 통달하여, 군사를 양성하고 장수를 훈련시키면서 때가 이르면 일어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사신으로 온 것은 천자가 정한 제도에 따라 이웃나라 간에 왕래하는 예법을 지키는 것인데, 어찌하여 신복(臣僕)이라 하시오? 그대의 조상 자문(子文)은 楚나라의 명신(名臣)으로 시무를 알고 기변에 통달한 분인데, 당신은 그분의 후손이 아니오? 어찌하여 말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오?”
[원래 ‘춘추오패(春秋五覇)’는 훗날의 역사가들이 지칭한 것이므로, 여기서 안영이 ‘오패’를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보통 제환공·진문공·진목공·초장왕·송양공을 말하는데, 송양공은 패자를 자칭했지만 열국이 패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송양공은 빼고 말했다. 또 진목공과 송양공 대신에 吳王 합려와 越王 구천을 오패에 넣기도 하는데, 이 두 사람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자문은 초성왕(楚成王) 때 영윤을 지닌 사람으로 역사적으로 명재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그의 이름이 투곡어도(鬥穀於菟)이므로 안영이 투씨의 조상이라고 한 것이다.]
투성연은 만면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목을 움츠린 채 물러났다.
잠시 후, 좌반(左班)에서 한 선비가 나와 물었다.
“평중께서는 시무를 알고 기변에 통달한 선비로 자부하시는데, 최저(崔杼)와 경봉(慶封)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 齊나라 신하들은 가거(賈舉) 이하 절의를 지켜 죽은 사람이 무수하였고 진문자(陳文子)는 10승의 말도 버리고서 나라를 떠나 그들에게 저항했었는데, 그대는 齊나라의 세가(世家)이면서도 위로는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벼슬을 버리고 몸을 피하지도 않았으며 가운데로는 절의를 지켜 죽지도 않았으니, 어찌 그렇게 직위에 연연하였습니까?”
[제129회에, 제장공(齊莊公)이 최저의 아내 당강과 사통하자,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하였다. 그때 주작·가거·공손오·누인은 제장공을 수행하여 싸우다가 죽음을 당했고, 병사·구봉·탁보·양윤은 자결하였다. 진수무(진문자)는 宋나라로 망명하였다.]
안영이 보니, 楚나라 상대부 양개(陽匃)였다. 그는 字가 자하(子瑕)이며 초목왕(楚穆王)의 증손자였다. 안영이 대답하였다.
“큰 절의를 품은 자는 작은 절의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며, 멀리 생각하는 자는 가까운 일에 얽매이지 않는 법입니다. 내가 듣건대, 주군이 사직을 위하여 죽으면 신하는 마땅히 주군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군 장공(莊公)께서는 사직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었으니, 그때 선군을 따라 죽은 자들은 모두 사사로운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내가 비록 재주가 부족하지만, 어찌 사사로운 은혜를 받은 자들의 대열에 끼어들어 죽음으로써 이름을 팔 수 있겠습니까?
신하된 자는 국가의 위난을 만났을 때, 능력이 있으면 위난을 해결하려고 해야 하며 능력이 없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내가 물러나지 않은 까닭은, 신군(新君)을 옹립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지 지위를 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하된 자들이 다 물러나면 국사는 누가 돌보겠습니까? 게다가 군부(君父)가 시해당하는 변란은 어느 나라인들 없겠습니까? 楚나라 조정의 반열에 있는 여러분들은 모두 역적을 토벌하고 위난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까?”
[주작은 본래 晉나라 사람인데 난영을 따라 제나라로 망명하여 제장공의 총애를 받았으며, 가거 등 7명은 제장공이 신설한 용작(勇爵) 계급에 속하여 특별한 총애를 받았었다.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대부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지만, 안영은 최저의 집으로 찾아가 장공의 시신 앞에서 곡을 하였다. 또 최저가 제경공(齊景公)을 옹립한 다음 백관을 모아 놓고 “최저·경봉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자는, 저 태양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을 때, 백관이 모두 같은 맹세를 했지만, 안영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사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 안영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갖는 자가 있다면, 상제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하였다.]
안영의 마지막 말은, 楚나라 웅건(熊虔; 영왕)이 주군을 시해했을 때 楚나라 신하들은 도리어 그를 군주로 추대했으니, 남을 질책할 줄만 알았지 자신을 질책할 줄 모르는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양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우반(右班)에서 또 한 사람이 나와 말했다.
“평중! 그대는 물러나지 않은 까닭이 신군을 옹립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너무 과장된 것이오. 최저와 경봉이 서로 싸우고, 난씨(欒氏)·고씨(高氏)·진씨(陳氏)·포씨(鮑氏)가 분쟁을 일으켰을 때, 그대는 우물쭈물하면서 그 사이에서 관망만 하면서 아무런 기발한 계책도 행하지 못했소. 모든 일의 성취는 사람에게 달렸는데, 충심을 다하여 보국(報國)한다는 자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오?”
[제132회에 경봉이 최저 집안의 분열을 이용하여 최저 일가를 몰살하였고, 제133회에 고채·난조·진무우·포국이 경봉을 축출하였으며, 제136회에 고강·난시와 진무우·포국이 서로 싸우다가 고강과 난시는 노나라로 달아났다.]
안영이 보니, 字가 자혁(子革)인 우윤(右尹) 정단(鄭丹)이었다. 안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최저와 경봉이 동맹했을 때 나만 홀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네 씨족이 분쟁을 일으켰을 때도 나는 주군 곁을 지켰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임기응변하면서 주군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어찌 방관자라고 하시오?”
[고강·난시와 진무우·포국은 서로 안영을 자기편으로 끌어가려고 했지만, 안영은 “나는 오직 군명을 따를 뿐, 감히 사사로이 누구를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하였고, 제경공(齊景公)에게 이치를 밝혀 대부 왕흑으로 하여금 진무우·포국을 도와 고강·난시를 축출하게 하였다.]
좌반에서 또 한 사람이 나와 말했다.
“대장부가 시대를 바로잡고 주군을 잘 섬기려면 큰 재능과 지략이 있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규모가 커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 평중은 인색한 필부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안영이 보니, 태재 원계강이었다. 안영이 말했다.
“족하(足下)는 왜 내가 인색하다고 하십니까?”
원계강이 말했다.
“대장부가 밝은 주군을 섬기고 귀한 상국(相國)이 되었으면,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수레를 화려하게 장식함으로써 주군에게서 받은 은총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낡은 가죽옷을 입고 야윈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서 외국에 사신으로 온단 말입니까? 봉록이 부족합니까? 내가 듣건대, 평중이 지금 입고 있는 가죽옷은 30년이나 되었고, 제사를 지낼 때는 돼지고기가 그릇을 다 가리지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인색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안영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족하의 소견은 어찌 그리 천박합니까! 내가 재상이 된 후로, 부족(父族)은 모두 가죽옷을 입게 되었고 모족(母族)은 모두 고기를 먹게 되었으며 처족(妻族)도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초망지사(草莽之士)로서 이 안영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자가 70가(家)가 넘습니다. 우리 집이 비록 검소하나 삼족이 부족함이 없고, 내가 인색해 보이지만 많은 선비들이 풍족하니, 그만하면 주군의 은총을 크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초망지사(草莽之士)’는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안영이 말을 미처 끝내기 전에, 우반에서 또 한 사람이 나와 안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듣건대, 탕왕(湯王)은 신장이 9척으로 현명한 왕이 되었으며, 자상(子桑)은 만 명을 대적할 힘이 있어 명장(名將)이 되었소. 옛날의 명군(明君)과 달사(達士)는 모두 풍채가 우람하고 용맹이 세상을 덮을 만하여 당시에 공을 세우고 후세에 이름을 남겼소. 그런데 지금 그대는 키가 5척도 되지 못하고, 힘은 닭 한 마리도 이기지 못할 정도인데, 입만 살아서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부끄럽지도 않소?”
[자상(子桑)은 秦나라 장수 공손지이다. 제50회에 공자 칩이 진목공(秦穆公)의 명을 받들어 晉나라로 가서 진헌공(晉獻公)의 장녀에게 청혼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손지를 만났는데, 호미로 땅을 파놓은 깊이가 몇 자나 되었고 호미가 너무 무거워 종자들이 들지를 못했다고 하였다. 제60회에, 한원대전(韓原大戰) 때 용맹을 떨쳐 晉軍을 격파하고 진혜공(晉惠公)을 사로잡았다.]
안영이 보니, 공자 진(真)의 손자로서 字가 자상(子常)인 낭와(囊瓦)라는 자였다. 그는 楚王의 차우(車右)였다. 안영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저울추는 비록 작지만 천근을 잴 수 있으며, 삿대는 가늘고 길기만 하지만 배를 나아가게 합니다. 교여(僑如)는 신장이 10척이 넘었지만 魯나라에서 죽음을 당했고, 남궁장만(南宮長萬)은 엄청남 힘을 지녔지만 宋나라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족하는 신장이 크고 힘이 세지만,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소? 나는 스스로 무능함을 알고 있지만 다만 질문을 하니 대답했을 뿐, 어찌 감히 변설을 자랑하겠소?”
낭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교여는 제94회에 등장했었다. 적(翟)나라의 거인으로 신장이 1장 5척이나 되었고 천균(千鈞)을 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노나라를 침공했다가, 노나라 대부 부보종생(富父終甥)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죽음을 당했다. 남궁장만은 송나라 장수이다. 제33회에 송민공(宋閔公)을 시해하고 陳나라로 도망쳤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홀연 보고가 들어왔다.
“영윤 원파(薳罷)께서 오셨습니다.”
대부들은 모두 두 손을 마주잡고 원파를 기다렸다. 원파를 수행해 온 오거(伍舉)가 조문을 들어와 안영에게 읍하고 나서, 대부들에게 말했다.
“평중은 齊나라의 현사(賢士)이신데, 제군(諸君)은 어찌하여 무례를 범하십니까?”
잠시 후, 영왕이 대전에 오르자, 오거가 안영을 인도하여 알현하게 하였다. 영왕은 안영을 보자마자 문득 물었다.
“齊나라에는 사람이 없소?”
안영이 말했다.
“齊나라 사람들이 숨을 내쉬면 구름이 일어나고 땀을 뿌리면 비가 될 정도이며, 길을 가면 서로 어깨를 부딪치고 서 있으면 서로 발을 밟을 정도로 사람이 많습니다. 어찌하여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다면 어찌하여 소인(小人)을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소?”
“폐읍은 사신을 보낼 때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현자(賢者)는 현국(賢國)으로 불초자(不肖者)는 불초국(不肖國)으로 보내고, 대인(大人)은 대국(大國)으로 소인(小人)은 소국(小國)으로 보냅니다. 신은 소인에다가 가장 불초한 자이므로, 楚나라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영왕은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놀랐다.
사신으로서의 일이 끝나자, 마침 교외의 백성이 합환귤(合歡橘)을 바쳤다. 영왕이 귤 하나를 먼저 안영에게 하사하자, 안영은 껍질을 벗기지도 않고 먹었다. 영왕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으며 말했다.
“齊나라 사람들은 귤을 먹어 본 적이 없소? 어째서 껍질을 벗기지 않고 먹는 것이오?”
안영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건대, 군주가 과일을 하사하실 때는 참외나 복숭아는 깍지 않고 먹어야 하며 귤이나 밀감은 껍질을 벗기지 않고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하사하신 것은 저의 주군께서 하사하신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대왕께서 껍질을 까서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어찌 감히 껍질을 까서 먹겠습니까?”
영왕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안영에게 경의를 표하고, 자리를 권하여 술을 대접하였다.
잠시 후, 무사 서너 명이 죄수 하나를 포박하여 대전 아래로 지나갔다. 영왕이 문득 무사들에게 물었다.
“그 죄수는 어디 사람이냐?”
무사가 대답하였다.
“齊나라 사람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
“도둑질을 했습니다.”
영왕은 안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齊나라 사람들은 도둑질 하는 버릇이 있소?”
안영은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꾸민 일임을 알고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이 듣건대, 강남(江南)의 귤을 강북(江北)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토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 齊나라 사람이 齊나라에 살 때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는데, 楚나라에 와서 살면서 도둑질을 하게 되었으니, 楚나라의 토질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齊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강남의 귤나무를 북쪽에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것을 ‘남귤북지(南橘北枳)’라 하는데, 사람은 그가 처한 환경에 따라 착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심성을 갖기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영왕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과인이 그대를 욕보이려 하다가, 도리어 모욕을 당했구려.”
영왕은 안영을 후한 예로써 대접하였고, 안영은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齊나라로 돌아갔다.
제경공(齊景公)은 안자(晏子)의 공을 치하하여 작위를 상상(上相)으로 높여주고, 천금(千金)의 값이 나가는 가죽옷과 많은 땅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안자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 경공이 또 안자의 집을 더 크게 지어 주려고 했지만, 안자는 그것도 극력 사양하였다.
어느 날, 경공이 안자의 집으로 행차하였는데, 그 아내를 보고 안자에게 말했다.
“저 여인이 경의 내자(內子)요?”
안자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경공이 웃으며 말했다.
“아! 늙고 추하구려! 과인의 사랑하는 딸이 젊고 아름다우니, 경에게 시집보내겠소.”
안영이 대답하였다.
“사람이 젊고 예쁠 때 서로를 섬기는 까닭은, 훗날 늙고 추하게 되어서도 서로 의탁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아내가 비록 늙고 추해졌지만, 신은 이미 그녀로부터 의탁을 받았으니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경공은 찬탄하며 말했다.
“경은 아내도 저버리지 않으니, 하물며 군부(君父)를 저버리겠소?”
그리하여 경공은 안자의 충성을 더욱 깊이 믿게 되어 국정을 모두 안자에게 맡겼다.
첫댓글 안영이 과연 '안자'라 할 만하다.
선배님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