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 거미줄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인간적인 관계가 싫어서
혼자 산에 들어가 간섭 안 받고
유유자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라는 바탕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있기에
개개인의 의지와 생각을 쏟아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힘을 가진 자의 의도와 가치관에 의하여
개인적인 소수의 생각은 묵살당하며 세상은 굴러갑니다.
이는 독재 국가든 민주주의 국가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기본 틀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간에 이런 개개인의 생각과 의지가 빈번하게 충돌합니다.
그 충돌을 다툼 내지는 싸움 혹은 갈등이라고 합니다.
부부싸움, 친구 간의 싸움,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이런 충돌이 왜 생기겠습니까...
각자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가치관이 다르기에 나타나는 충돌입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이 맞는다면 서로 좋게 지내겠지만,
마음이 확연히 다르면 깊은 충돌로 인하여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되면 계속해서 상대를 핍박하고 궁지에 몰아넣어
내가 의도한 대로 원수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심적 쾌락을 느끼며 만족하려고 애씁니다.
이런 것이 세상 이방인들의 피할 수 없는 패턴입니다.
이는 마귀가 쳐놓은 그물 속에서 사는 모습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다는 사람들도 이런 현상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마귀는 더더욱 믿는 자들을 향해 갈등을 부채질하고
이간질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원수는 만들어지고 갈등의 늪으로 빠집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 원수를 만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내 속에 오셔서
거듭난 자를 그리스도의 닮은 모습으로 살게 하시므로
스스로 원수를 만들 생각 자체를 못 하게 합니다.
거듭난 믿음인에게 원수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대게,
마귀의 계략에 의하여 명색뿐인 교인들이나, 이방인을 책동하여
거듭난 사람의 의사와 전혀 상관 없이 원수가 되게 만들어버립니다.
예를 들면...
별것도 아닌 일로 거듭난 사람을 힘들게 하여 자극한다든지,
제 생각이 옳다 하여 상대의 생각을 묵살하며 반강제적으로
상대를 몰아가는 것이 가장 흔한 경우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나를 큰 공경에 빠뜨리는 일도 있습니다.
어지간한 믿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상태로 만들어
한이 맺히게 하여 용서와 사랑이란 열매의 마음을 삭제시키려는
마귀의 의도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정도의 원수가 되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정도의 믿음 근처가 아니라면
이를 극복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이미 아시기에, 거듭난 온전한 믿음 안으로 들어왔다면
젖먹이에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바울 사도를 통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장 13-14절)
이렇듯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면
아무리 마귀가 나를 넘어뜨리려 준동해도 결코 요동하지 않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마귀의 계략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고
이에 휘말리면 오히려 내가 주님과 원수지기에
결코, 그럴 수는 없음을 영적인 본능으로 아는 것입니다.
마귀의 계략이 무엇입니까?
사람끼리 원수지게 하는 게 계략입니까?
아닙니다!!!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면 믿는 자와 하나님의 사이가 벌어집니다.
결국, 주님과 원수지게 하여 지옥으로 몰아넣으려는
최종적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믿는 자가 구원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과 원수지도록 밤낮 없이 준동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준동에 넘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머리 위로
까마귀(원수 되는 원인)를 날려 보냅니다.
여기에 걸려들어 까마귀를 붙잡아 머리에 올리지 마십시오.
그냥 날아가도록 두십시오.
머리에 올리는 순간 나는 마귀의 미끼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설령...
나를 너무 힘들게 하여 용서할 수 없는 원수가 있다고 치겠습니다.
이들 원수가 구원받겠습니까?
이들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라면 나와 원수가 될 일이 없습니다.
구원받을만한 사람이 아니기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갈 곳은 어디입니까?
영원히 불타면서 한번 들어가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지옥입니다.
지옥은 아주 무서운 곳입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를 사용하여 그 무서움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 정도로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데...
나는 구원받고, 내 원수는 지옥에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원수가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는 게 시원하십니까?
아주 만족하여 기쁨이 올라옵니까?
과연 그와 계속 원수질 마음이 생기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구원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 원수가 영원히 불타는 무서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적어도 믿는 사람이라면 원수 같은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당할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긍휼히 여기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지옥에 안 가도록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감싸며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들이 갈 지옥행을 막아야(전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그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당할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감히... 그들을 미워하고 원수같은 마음이 올라오겠습니까?
나는 그들에게 당하는 고통은 일시적일 뿐,
구원받아 천국에 가면 그만이지만...
원수인 그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는 사람은 마귀가 아무리 사람을 통하여 도발해와도
원수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찾아와 먼저 용서를 빌게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내가 먼저 그를 위로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감싸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들로 인해 고통으로 흘리는 눈물은 천국에 갔을 때
주님께서 다 닦아주시며 위로하고 안아주실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그런 마음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진정으로 믿는 자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원수지게 만드는 마귀를 이기는 길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장 17-21절)
아직도 나에게 원수가 있습니까?
그들로 인하여 잠을 설치십니까?
도저히 용서가 안 되십니까?
자꾸 원수가 머리에 떠올라 분노가 일어납니까?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그 원수가 용서도 못 받고, 지옥에 간다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불쌍함도 그런 불쌍함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의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이 왜 있습니까...
나는 십자가의 길을 가노라 하면서 용서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십자가의 길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내 입술에서 나온 지식의 고백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은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장 12-14절)
나를 미워하는 자를 덩달아 같이 미워하지 마십시오.
나와 원수 된 자를 나도 덩달아 같이 원수로 여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긍휼히 여기십시오.
그것은 글 쓰는 저의 부탁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이십니다.
명령은 곧 순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태복음 5장 44-45절)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피로 내가 용서받았다고 고백만 하지 말고,
나도 용서할 줄 아는 게 진실로 믿는 자의 고백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내가 용서함을 받았다면,
나의 원수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게 삶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본질적 자세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장 31-32절)
랑별파파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