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모던라떼
사춘(思春)
둥그런 지축 흔들던 발 덮어버릴 큰 손
굉음에 울먹이던 귀를 온 종일 틀어막다
또랑한 음성, 양 나귀 따위를 읽던
웅얼대는 독방 속에 묻어버린 채.
적막에 기척하는 초침의 찰나에 업혀
너머 문 밖 우직스레 더욱 고요할 밖에
110-11번지
이곳은 미분(微分)의 세계다.
문 너머 세상을 휘감는 시간은
S- S-
뱀소리를 내는 알파벳을 닮아
굴곡에 부대끼는 마찰력 없인 발디디기도 벅찬 언덕.
그러나
문을 당기어 그리는 사분원은
파란 색연필이 가로지르는 차원을 열고
언덕의 곡선은
곧 기지개를 펴고 드러눕는다.
기울기를 잃어버린 시간 속
했던 말들의 도돌이표조차 투명한 미덕이 되는 이곳은
다투는 촌각이 느긋하게 아름다운,
미분(美分)의 세계다.
반신
23, 도도한 피제수에 실린 반쪽의 기원
어쩌면 나는 그곳에 낙인처럼 걸린 문패
집을 나선 안주인은 개미가 된다
터만 남은 잇몸 위에 짓이겨져 반죽되던
진통제 몇 알
날마다 손가락 마디에 주리를 트는
침대시트의 매듭
악수를 아는 거울에 허연 소금기가 말라붙었다
돌아서서 내가 찾는 건 황토빛 여백을 내어주는 파도소리
본 적 없어 묘연한 여교수의 걸음걸이도
싱거운 땀을 뜨는 부인의 고상한 말씨도
파도 위 해무는 굳게 덮은 채 침묵하는데
해무 뒤에서 그녀의 여지들이 찬란히 침몰한
바다,
그곳은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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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은 동생을 생각하면서 쓴 시예요
6살 때, 어머니의 배가 점점 둥그런 지축이 되고,
그 아래에서는 동생의 힘찬 발길질이 느껴지는 게 신기했어요
이리저리 기어다니게 된 동생이 라디오를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커진 볼륨에 울음을 터뜨린 일도 있었고,
어느 날 갑자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글자를 읽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와 함께 대견스럽게 쳐다보았던 일도 있었어요
어렸을 때의 동생은 장난기가 가득하고 애교 많던 여우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훌쩍 커버린 뒤부터는 늘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으면서 도무지 말이 없더라구요
그런 동생을 보면서 때로는 답답해하고, 또 달래도 보고, 그러다 지치고
몇번을 반복하다가
동생의 적막 앞에서 더 숨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좀 더 지나 언젠가는 동생이 스스로 벽을 깨고 나와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시는 그렇게 쓰였습니다
'110-11번지'는 학원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쓴 시예요
방학마다 수학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요,
오래 전에 학원을 다녔던 분들이 종종 다시 찾아오시는 일이 있는데
이미 결혼도 하시고, 아이도 있는 분들인데도 학원에 들어서고 선생님을 뵙는 순간 다들
학생 때로 되돌아가시더라구요
그런 장면을 볼때마다 왠지 학원의 선생님과 학생들에게만큼은
학원 속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 시를 썼습니다
'반신'은 잘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에 관한 시예요
억척스럽고 고단한 엄마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면서
내 반쪽을 만들어준 엄마가 다른 삶을 살았다면
혹시 교수같이 멋진 전문직을 가질 수도 있었을까?
집안일에만 열중하면서 한가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상상을 시작으로 시를 썼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시로 써보고 싶어 쓴 대상이
사람인 경우가 많았어요
주변 사람들의 사적인 이야기들이 시 곳곳에 숨어 있어서
혹시나 다른 사람이 읽었을 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짧지 않은 사족을 달아봐요
모든 사람은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여시들도 마찬가지고요!!
혹시 글에 문제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첫댓글 잘읽었어요 여시ㅜㅜㅜ
우와. 진짜 너무 좋아요 잘봤어용 언니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