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나는소망한다내게금지된것을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할머니로부터 어머니를 지키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왜 할머니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며 바닥을 내리쳤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건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사랑을 입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차별이었고. 그것은 할머니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사람들은 어째서, 나한테 답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무의미한 물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자연발화하는 불쏘시개처럼 혼자 화르륵 일어나서 내 머릿속을 뒹굴곤 했다. 그랬다.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 그러나 불쏘시개가 뒹굴고 나면 머릿속은 불지옥이 됐다. 사람들은 왜, 어째서 내게 답을 알려주지 않은 걸까. 묻지도 못할 질문을 하고 또 하고, 그러다 누구를 향한 건지도 모를 복수를 다짐하고, 벽에 머리를 쾅쾅 박다가 벌떡 일어나서 중얼거렸다. 악의를 느꼈어. 그때 사람들의 악의가 나한테 향하고 있었어. 그래서 살갗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하고 말이다. 매일 그짓을 했다. 그렇게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그러나 떨리는 마음으로 사진을 살펴본 성곤은 실소를 내뿜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진 속에 담긴 표정이 한결같이 똑같았다. 끔찍하게 연기를 못하는 배우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연기를 못한다면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김성곤이라는 캐릭터의 흥행이 실패한 이유에 웃음, 혹은 표정이라는 요소도 큰 몫을 했을 게 분명했다.
/튜브, 손원평
윤에게 그 시집을 사다주려고 어제 그 서점엘 찾아갔다. 서점 주인은 팔지 않는 시집이라고 했다. 삼십 년 전에 첫사랑이 선물로 준 자신의 소장본이라고. 매우 아쉬워하며 나오는데 서점 주인이 학생! 하고 나를 부르더니 첫사랑에게 받았다는 시집을 내주었다. 시집 값을 치르려고 하니 주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얼마를 주려고? 삼백오십원? 그럼 얼마를? 학생에게 주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학생만 지니고 있는 책을 원하는 사람이 있거든 학생도 그 사람에게 주도록! 다시 서점 안으로 발길을 돌리는 서점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윤교수님 말씀이 생각났다. 사람은 모두 다 자기 방식의 가치기준이 있다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내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옥상에서 그러고 있을 때 윤미루는 이 지하에서 이 음악을 들었던 것인가. 어쩌면 그 순간이 겹칠 때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방에 가서 함께 밤을 보내는 일은 그 사람이 곁에 없을 때 뭘 하고 있을지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일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오늘 밤을 지내고 나면 나는 윤미루가 이 도시에서 어떤 밤을 보내고 있을지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좋아해, 정윤.
그의 갑작스런 고백에 나는 옥탑방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불쑥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윤미루만큼?
그가 내가 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십 년 후를 생각할 때만큼.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나는 열 손가락을 움직여서 타이핑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네. 익혀보려 했으나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야. 나는 자네들이 흔히 말하는 독수리 타법이라네. 자네와는 반대로 손이 내 생각을 따라오지 못해. 타이핑을 해보려고 하면 저만큼 앞서간 생각이 뒤따라오는 손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다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우리 할아버지는 언제나 이것에 실패했지. 부엌일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에, 언제나 실패했지. 복희가 차린 밥을 매일 대접받으면서도 그랬지. 슬아는 자신이 가부장의 실패를 반복했다고 느낀다.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남자를 만날 거면,"
나사를 조이며 덧붙인다.
"너를 존경할 줄 아는 애를 만나."
그렇게 말해놓고 웅이는 생각에 잠긴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자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웅이가 알기로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남자는 잘 없다. 웅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다. 웅이는 불현듯 지난 동창회를 떠올린다.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다 맞춰준다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
슬아가 대꾸한다.
"보통은 나보고 존경하라고 하던데. 남자를요."
"너는 누구든 잘 존경하잖아."
웅이는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한다. 실은 내가 너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글좋다 고마워!
여시 덕분에 신경숙 작가님 책 읽어보고 싶어졌어! 오늘 빌리러 가야겠다. 좋은 글 고마워!
고마워
헐 너무 좋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