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애인하자구요
순간 거짓말 처럼 조용해졌다. 채민혁은 나를 한번 보더니 다시 책상위에 있는 책으로 눈을 돌려버렸다.
난 천천히 떨어진 가방을 들어 채민혁 앞으로 갔다.
"채민혁-"
"………"
"민혁아. 채민혁"
난 조용히 채민혁을 불렀다. 그러나 채민혁의 시선은 책상 위에 있는 책에만 있었다.
하아. 채민혁 넌 정말 날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이젠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넌 여전히 날 비참하게 만들어.
"대답해, 채민혁"
"……왜"
"왜왔니."
"…내가 이학교에 있는게 너랑 무슨상관인데"
채민혁의 눈은 공허했다. 아무것도 담겨져있지않았다. 그러나… 미세하게흔들렸다. 채민혁의 눈은.
그 눈이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채민혁의 얼굴을 보자 화가났다. 아니, 역겨웠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역겨워."
난 채민혁을 한번 보고는 내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난 신경도 안 쓰고 책만 보는 채민혁.
그대로 난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곤 점점 눈을 감았다. 오늘은… 정말역겨운날이다.
*
"꺄앗, 여보야아~"
"‥‥"
"여보야아~ 은민이 보러 전학왔어요? 꺄앗, 어떻게! 정말 짱짱 좋아! 역시 우리 여보야 밖에 없어!"
"‥이은민, 죽을래"
꾀나 좋게 잠을 자고 있었는데 웬 이상한 목소리 때문에 깨버렸다. 어떤 새끼가‥ 이렇게 역겨운 목소리를…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봤다. 꾀나 하얀 피부에 이쁜 얼굴 그리고 바지를 입은… 바지?
이 학교… 여자가 바지를 입어도 됐었나? 아,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담배… 끊어야하는데..
"어어? 민혁이 짝궁 일어났다,"
난 눈을 한 번 부비며 다시 그 사람을 봤다. 아… 이사람 여잔줄 알았는데.. 남자였네..
순간 표정이 확 찌푸려 지면서 날카롭게 그 사람을 봤다. 교복 중앙에는 '이은민'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그 사람을 말이다.
"헤에, 민혁이 짝궁 이쁘다아.."
"……"
"민혁이 짝궁 안녕! 난 이은민이라구 해!"
햇빛 때문이었을까… 이 아이의 얼굴은 굉장히 해 맑아 보였다.
그래서 샘이 날 만큼.. 망가뜨리고 싶을 만큼.. 굉장히 웃음이 이쁜 아이었다.
"움.. 민혁이 짝궁 이름이 뭐야?"
"……유"
"응? 뭐라고?"
"…천유. 김천유"
그래서 호기심이 었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에게 이름을 가르쳐 준건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채민혁의 친구라서. 내가 가질 수 없는 웃음을 가져서. 그래서 단지 호기심이 었다.
"헤에, 김천유. 이름 이쁘다아."
"이은민. 너 반에 안가?"
"갈꺼야! 흥흥, 우리 여보야 질투하는 구나?"
"시끄러워,"
"흥! 여보야 바보다! 내 이름은 이은민이야! 꼭 기억해둬! 우리 그럼 오늘부터 친구하는거다? 히히"
그리고는 휭 하고 사라지는 저 아이. 아니, 이은민. 어쩌면 재미있어 질 것 같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 했다고 해야하나… 뭐, 하여튼 그랬다.
더군다나 사람을 싫어하는 내가 처음으로 호기심을 가진 아이었다, 이은민은. 또 참 특이한 아이었다.
남자한테 '여보야'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아이. 참 해맑은 아이. 많이 웃는 아이였다.
이 아이의 모든 것이 나에겐 새로웠다. 그래서 더욱 끌렸는 지도 모르겠다.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끝나기를 바라면서 난 눈을 감았다. 옆에 채민혁이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는 지도 모르고…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입에는 아주 희미한 웃음 하나를 머금고.
아까까지만 해도 피고 싶었던 담배에 대한 생각은 모두 잊은체 그냥, 그렇게 눈을 감아버렸다.
*
"아.. 너무 오래 잤나"
웬만해선 집 아닌 다른 곳에서 잘 자는 편은 아닌 나였다. 그래서 학교에서 자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였고
점심시간이나 하교시간에 맞춰 잘 일어나는 편이였다. 근데 왜 지금은 이런 거지같은 상황인거지,
"어어 ? 민혁이 짝꿍 일어났어. 와, 얘 짱 오래자"
니가 도대체 왜 내 앞에 있는건지 난 이해가 안 가겠는데,
"아아, 그런눈으로 보지마요오- "
"니가.. 왜 여기있는건데 "
"음, 그건 시크릿 ! 읏차, 이제 나도 집에 가봐야 겠네 !"
이러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가벼워 보이는 가방을 집어 드는 놈. 그러고는 날 보더니 이상한 눈으로 계속 쳐나보는 놈.
순간 기분이 팍 나빠져 인상을 찌푸려져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지만,
"어어 ? 민혁이 짝꿍, 집에안가?"
"뭐? "
"집에안가냐구요"
"그럼 넌 왜 안가는데"
"민혁이 짝꿍 데려다 줄려구 !"
그럼 설마 날 데려다 줄려고 이때까지 기다린건가, 하교시간이 1시간 이나 지난 지금까지?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이때까지 날 기다려 준 이 녀석 때문에 웃음이 났다.
"어어? 민혁이 짝꿍 웃으니까 이쁘네. 앞으로 그렇게 스마일 하면서 살아요"
그러면서 날 보며 한 번 씩 웃더니 내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녀석. 난 싫지 않은 느낌에 내 손목을 바라보았는데
이 녀석, 손이 꾀나 이쁘다. 남자새끼가 손목도 가늘고… 아, 나 무슨 생각 하는거야. 김천유, 왜이러냐 너.
"민혁이 짝꿍, 너 근데 진짜 오래 자는거 알아? 나 너 자는거 보고 짱 놀았어 !"
"야"
"응? 왜왜 ?"
".........다"
"뭐 ? 뭐라구요 ?"
"내 이름, 김천유라고. 채민혁 짝꿍이 아니라."
난 계속해서 민혁이 짝꿍이라고 부르는 저 녀석 때문에 나름 괜찮았던 기분까지 없어져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분명 이름까지 말했을 텐데 민혁이 짝꿍이라고 부르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군
"푸하하, 응! 알았어, 천유야!"
"쪼개냐"
"아, 근데 난 야가 아니라 '이은민'이라는 이쁜 이름을 가지고 있어용 앞으론 친근하게 은민아~ 라고 불러줘 !"
어의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앨 계속 보니까 그앤 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응응? 은민아 라고 불러야해!"
"내가 왜"
"우린 친구잖아!"
"...뭐?"
"친구! Friend ! 이은민이랑 김천유는 친구라구요!"
난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아직까지 손목을 잡고있는 이은민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그리고는 그냥 이은민 곁을 지나칠려는데 이은민의 손이 다시 내 손목을 붙잡아버렸다.
"놔라"
"왜, 친구하기 싫어?"
"노라고 했다."
"으음.. 그럼 친구말고 애인할래?"
"뭐...?"
"애인하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