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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엽기 혹은 진실 (세상 모든 즐거움이 모이는 곳) 원문보기 글쓴이: HSKD
맑고 푸른 하늘이 바다로부터 번져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청량한 바닷길을 지나고 있다.
갑판 위의 사람들에게 한바탕 시련을 주고 난 뒤에야 살짝 맛보여주는 이 지독한 평화로움,
이 푸른 황홀경이 나를 바다에 닻 내리게 했다.
조타실 밖에 나와 눈을 감은 채 세상을 깊이 들이쉬면 약간의 소금기가 저린 바람이 코를 더듬어온다.
현재 우리 선박의 위치는 필리핀 루손 섬 위로 한참을 지나온 남중국해의 가운데 지점이다.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더 북상하면 고향의 그리운 흙냄새가 어느새 바람에 실려있을까.
그립다. 모두.
" 삼항사- 보고 싶은 얼굴들을 수평선에 걸어놓고 무얼 하시나? "
" 아, 선장님. 안녕하십니까. "
" 자네는 부산, 나는 오사카, 일항사는 고베, 이항사는 도쿄, 한 배에 함께 운명을 싣고 있지만
저마다 나고 자란 곳은 다르지. 하지만 떠나온 곳을 지독히 그리워하는 마음만은 같을 거야.
사람 마음 다 똑같아. 착항지가 일본이라 아쉽군. 부산이었으면 가족 방선이라도 시켜주는 건데. "
"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 하하. 이 좁은 선박에서 서로를 위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나. 항해사라면 지겹도록 보는 바다를 어느 날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건, 그가 바다가 아닌 무언가를 깊이 그리워하고 있단 거겠지.
그래서 괜히 한 마디 던져봤어. 입항까진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 천천히 가자고. "
" 알겠습니다. "
내가 타고 있는 화물선 요츠마루는 1980년 7월 5일 베트남을 출항해 다음 목적항인 일본 고베를 향해 항해하는 중이다.
승선원은 서른여섯 명, 삼등 항해사인 나를 제외하곤 전원이 일본인 선원으로 이루어진 배다.
이 배의 소속은 일본 자본으로 만들어진 거대 해상운송 기업으로, 각국에 지사와 다양한 현지 설립 법인을 보유하고
다양한 국적을 가진 배를 빌려 대신 운용하는 방식을 통해 동서 냉전이 계속되고 있는 세계의 긴장 사이에서
사업 줄다리기를 하는 수완이 뛰어난 세계적인 해운회사였다.
바다의 도시 부산에서 자란 나는 돈도 벌고 세상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바다를 삶의 현장으로 택했고,
겁 없이 패기로만 일본 송출선에 뛰어들어 요츠마루의 삼등 항해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먼저 진출한 선배 한국 선원들이 몸소 우수함을 입증하여 내게도 기회가 온 셈이라 나 또한 그들처럼 최선을 다했고,
덕분에 선장과 일등 항해사의 신임을 얻어 본사 사무실에도 그 유능함이 이미 전보로 타전된 터였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잘할 수 있을까 싶었던 첫날의 부담은 이젠 웃음을 열쇠 삼아 꺼내는 기억이 되었을 뿐.
매일 모습을 바꾸며 선원들을 희롱하는 거대한 바다를 함께 헤쳐나가는 동료로서 서로를 인정한 지 오래였다.
일본 선원들은 나를 신뢰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한다면.
이등항해사 마사토미.
동경의 해양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승선 생활에선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동기들이 일본 해양계의 초급 간부로 성장할 때 본인은 이등항해사를 벗어나지 못 하는 데에 큰 불만을 가진 사람.
요츠마루에서도 작은 실수가 여럿 겹쳐 자주 핀잔을 듣던 와중에 한국인 삼등 항해사가 업무로 칭찬받고
이등 항해사 진급에 대한 추천도 척척 받아내는 모습을 보며 큰 열등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단점은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고 다른 일본인의 우수함을 예로 들어 한국인을 비하하기 일쑤였다.
삼등 항해사의 당직은 여덟 시부터 열두 시, 그다음은 열두 시부터 네 시까지 이등 항해사의 당직이므로
하루에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 두 번씩은 그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 항해 중에 별일은 없었겠지. "
" 특이한 점 없습니다. 계속 견시했습니다만 주위에 배는 보이지 않습니다. "
" 확신할 수 있나? "
" 물론입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살폈으니까요. "
" 그거 훌륭한 자세야! 유능한 한국인이 그런 자세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면 서구 열강들의
노리개가 될 일도 없었겠지. "
그의 얼굴을 하루에 두 번씩 본다는 건 그가 최소 두 번씩은 이런 트집을 잡는 것 또한 의미했다.
" 가만히 놔두었더라면 지금 한국은 소비에트 연방 일부가 되어 스탈린 체제 아래 신음했을 거야.
당시 일본 제국이 한국의 국토에 철도를 깔고 항구를 짓고 신식 교육을 하지 않았다면 중세 사상에서
근대로 넘어가지 못했을 조선이 어떻게 소련의 남하에 대응할 수 있었겠냐는 말이지.
그런 숨은 노력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미군이 빠르게 한반도에서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겠냐고.
내 말이 틀렸나? 조선은 일본 덕분에 근대화를 이루고 태평양 전쟁의 일원으로 충성할 수 있었던 거야. "
" 계속 말씀드렸지만 역사 토론은 항해 당직 교대할 적에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
" 우리 아버지는 그 당시 해군 장교로 일본의 번영을 위해 싸웠고 무지한 조선인들의 목숨마저 보전하기 위해
바다에 투신하셨어. 그런 투쟁을 외면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한반도로 돌아가기 바빴지!
그들이 떠나올 배를 만들고, 그들이 일할 공장을 짓고, 그들에게 근대화된 사상과 의료를 제공한 게 누구인데!
은혜도 모르는 조선인들은 감사하다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갔지. 그리고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
하하하, 이것 봐라? 그들의 후예 똑똑하기 그지없는 한국인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일본 배에 태워달라고 난리야!
너도 그중 하나 아니야? 떠나기 바빴던 조선인들이 이제 한국인이란 이름으로 일본의 수송 역군이 되었으니
이것 참 기막힌 일 아니냐고! "
한국인 선원들이 해외 송출 시장에 뛰어들어 고국의 외화벌이에 일조하고 있는 건 맞지만
굳이 일본의 발전을 위해 충성을 다 하기로 맹세하고 스스로 목줄을 찬 개라도 된 것 마냥 매도하는 그의 말은
전혀 들어줄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인수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단 식으로 당직 교대를
해주지 않으면 얘기를 듣던 말던 상관없이 억지로 조타실 안에 붙어있어야만 했다.
" 배은망덕한 조선인들이 일본을 저버리고 도망가는 걸 하늘도 허락 안 한 거야.
몇 척이나 되는 수송선들이 현해탄을 건너지 못했는지 아냐? 혹시 그중에 네 선조도 있는 거 아냐? "
그 대목에선 아무리 이성을 유지하려 해봐도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 수밖에 없었다.
업무적으로 비하할 거리가 없으니 한국인이라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식민통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어
이미 희생당한 조상들을 나 대신 비하하고, 은근슬쩍 나와 내 가족들을 빗대어 잘근잘근 씹어대는 말재간이
굉장한 불쾌감을 주었지만 돌아가신 조상들을 변호하기보다 살아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진 젊은 항해사가
할 수 있는 건 그 썩어들어가는 마음을 숨기는 것뿐이다.
" 잘 살아보겠다고 이렇게 남의 나라 일까지 뺏어서 하기 전에 함께 잘 살자는 대동아 사상이 뭐가 나빠서 그렇게
만세까지 부르짖었느냐고. 일본 이름을 주고, 일본말까지 가르치며 조선을 형제처럼 끌어안은 역사가 남아있는데.
그렇게 조선, 조선거리더니 그 후예인 널 보란 말이지. 잘 살아보겠다고 스스로 배운 일본어가 아주 수준급이잖아?
이게 대단한 모순이라고. "
무리한 전쟁으로 국민들을 곤궁에 빠뜨리고 원자폭탄 두 방에 무수한 생명을 잃고서야
미국의 우방을 자처하는 일본은 어떠냐고 똑같이 트집을 잡아 쏘아주고 싶었지만 애초에 우린 대등하지 않았다.
그는 이등 항해사고, 나는 삼등 항해사다. 선박의 수직적인 상하 계급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이겨봤자 내게 남는 건
나머지 일본인들에게 퍼질 악질 소문뿐이다. 절대로 마사토미의 계략에 빠져 한국인과 일본인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나를 꾸짖었다. 내가 평정을 조금이라도 잃는 순간을 포착하고 더욱 모진 말과
비틀어진 논리로 달려드는 그 앞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고국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참고, 내가 잘해야만 이 바다로
나올 수 있는 선원 후배들을 생각하며 또 참고, 나 자신의 설계해둔 미래를 위해 결국 끝까지 참았다.
캑캑,
말이 길어지다 못해 침이 말라 따가운 기침을 하고서야 마사토미는 손사래를 저으며 내게 내려가란 신호를
보냈다. 끝까지 한 명의 항해사로 날 인정하지 않고 '수고했다'는 한마디 하지 않는 치졸한 모습에 한 번
뒤통수를 때려볼까 싶어졌다.
" 역사는 역사가들이 말하고, 항해사는 항해에 충실하면 됩니다. "
직접 불만을 표시한 건 아니었지만 내 말은 뾰족한 끝을 숨긴 채 던져졌고 표적엔 정확히 명중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마사토미를 보며 속으로 한 번 그를 비웃어주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아니라, 항해사 대 항해사로서 승부를 겨루면 누가 우위에 있는지 그도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당직 내내 분해서 어쩔 줄 모를 그를 연상하며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마사토미의 끙끙 앓는 신음이 들려왔다. 그에 겹치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는 조타수가 마사토미를 진정시키는 소리겠지.
ㅡ
쿠로시오. 검은 조류라는 뜻의 깊은 심연 위를 타고 요츠마루는 드디어 현해탄 위에 들어섰다.
대한해협의 거친 물살은 여전했으나 날씨가 평화로워 모두에게 그리운 사진 한 장 꺼내볼 정도의 여유는
남겨주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걸 계약하고 부유하는 쇳덩어리 위에 오른
이 거칠면서 여린 뱃사람들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이 언제일까. 집채만 한 파도? 몰아치는 태풍?
내 생각엔 그저 지나쳐야 하는 고향의 바닷내음을 맡을 때가 아닐까 싶다.
물살을 가로지르며 맞이하는 바람 속의 옅은 소금기에서 고향의 냄새가 살짝 스칠 때,
화선지 위에 먹물이 번지듯 메마른 마음이 순식간에 그리움으로 흠뻑 젖어버린다.
둥글게 차오른 보름달을 액자 삼아 보고 싶은 얼굴들이라도 걸어놓은 날이면,
그 그리움은 뜨거워지는 혈류를 타고 흘러 저도 모르게 눈물이 되어 똑, 또옥, 흐르고야 만다.
한 짝의 술과 카드 게임을 낙으로 삼는 평선원들도 현해탄에 들어서면 그런 감상에 젖는지
휴게실에선 그 좋아하는 카드 게임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저마다 선실에 들어가 무얼 하는지?
자기 몸 하나 겨우 눕는 침대의 커튼을 바짝 치고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들딸의 사진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가, 짠해지는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가, 얼마나 자랐을까 얼마나 변했을까 짐작하다가
풀 길 없는 그리움을 술로 달랠까, 에이 오늘은 말자, 이 그리움에 취해버리자, 그렇게 곤한 하루를 끝낼는지?
나는 그런 선원들의 목숨과 안전을 책임지는 사관인 관계로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밤의 책임자가 되어
조타실에 서 있다. 앞서 가는 화물선의 꽁무니 불빛이 별빛 아래 바다의 표지판을 자처하고 있다.
어둠 속에 적응하기 위해 조명 하나 켜두지 않은 조타실에 달빛이 밤손님으로 찾아온 덕에 불 없이도 밝다.
시계는 23시 29분을 가리킨다. 오전에 마사토미에게 한 방 먹인 터라 오늘은 단단히 벼르고 있을 거란 생각에
골치가 아프지만 지금 이 멋진 분위기에 벌써 그런 짐작으로 기분을 버리고 싶진 않아 고개를 휘휘 저었다.
대신 근무복 주머니에 넣어둔 애인 사진을 살며시 꺼내 펼쳤다.
다행히 달빛이 밝아 그녀의 미소를 잘 비춰주었다.
사진 속의 화사한 미소를 천천히 내 입이 따라 했다.
- 끼익
조타실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계를 쳐다보니 23시 31분,
조타수가 올라오는 시간이 보통 40분, 마사토미가 올라오는 시간이 45분인 걸 생각하면
평소에 누군가 올라오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전해지는 분위기에서 직감적으로 누구란 걸 알 수 있었다.
마사토미겠지. 그것도 아주 화난 상태로.
일찍 교대해주기 위해 올라왔을 리는 없고, 오늘은 맘 먹고 진상을 부릴 작정이군.
- 촤악 !
애인 사진을 미처 근무복 주머니에 곱게 넣기도 전에 커튼이 우악스럽게 젖혔다.
그 탓에 나는 사진을 조타실 창가에 급히 내려놓고 쌍안경으로 대충 그 위를 가렸다.
" 항해사 운운하더니, 요즘 올 때마다 항해사가 아니라 웬 시인이 한 명 있는데. "
" 일찍 올라오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
" 언제는 15분 전에 올라오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는군. 잘난 척도 정도껏 해라. "
" 특이사항 인계해도 되겠습니까? "
" 건방지긴, 조선놈은 말로는 들어 먹질 않는다는 아버지 말씀이 맞았어. "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말을 섞는데도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겉돌고 있다.
그럼에도 서로의 기분이 점점 저기압으로 향하고 있는 건 신기한 일이다.
호젓한 분위기 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던 감상은 어느새 엉망이 되고,
조센진 운운하는 그의 무례한 언사에 다시금 살쾡이처럼 곤두세운 신경이 나를 지배했다.
차라리 얼마 전 떠나온 베트남이었더라면, 그보다 전에 항해했던 인도였더라면,
아니 아예 차라리 머나먼 태평양을 횡단하고 있었더라면 이처럼 화를 낼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떠나온 땅과 보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바다 위에서 그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넘겨듣기엔 이미 마사토미와 나 사이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 버렸다.
" 그쯤 하십시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조선 타령입니까? "
" 이제 슬슬 이빨을 드러내는거냐. 이항사 저놈쯤은 이 배에서 쳐낼 재간이 있단 거지? "
" 재미없는 농담은 속으로 뱉고 혼자 즐기십쇼. 당직 인수인계가 어디 장난입니까? "
" 뭐라고? 농담? 장난? 이 자식 미친 거 아냐. 어이, 조센진. 지금 이 배가 어디 배인지 잊었어? "
" 물론 압니다. 일본 배죠. 전 아무것도 잊고 있는 것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지금 항해사로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둘 다 헷갈리고 있겠죠! "
" 물고기 밥이 된 조상들 냄새를 맡으니 정신이 돌아버렸냐? 현해탄에 오니까 만세운동이라도 하고 싶어? "
" 경고하는데 더는 옛날이야기 운운하지 마시죠. 개인 대 개인의 감정이라면 대화로 해결해야지
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상처만 남은 이야기를 꺼냅니까? 그렇게 아득바득 이겨서 얻는 게 뭔데요? "
" 닥쳐, 난 네 그 똑똑한 척하는 아가리가 마음에 안 들어.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이 얘기하지.
너보단 내가 더 인정받고 있다는 그 은근한 우월감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개인 대 개인? 싹수없는 놈! "
" 제가 일본인보다 아래에 있다고 얘기한다고 해서 당신이 우수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건 그 안에 흐르는 피가 아니라 담고 있는 생각입니다! "
" 어떻게 같지? 흐르는 피가 다르면 생각도 다르고, 우수한 국가 아래 우수한 국민이 태어나는 거야.
가증스러운 조센진들이 일본인과 같은 선상에서 경쟁한다는 게 치욕스럽다고! "
" 정말 항해당직 인수인계할 마음 없으십니까?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실 거면 그냥 내려가 보겠습니다. "
" 같은 사람으로 대우해주니 이제 위에 올라서려 드는 모양이지. "
" 부끄러운 줄 아십쇼. 그런 말 하나하나가 전쟁의 망령이 남아있단 증거입니다. "
" 웃기지 마. 넌 그때 같았으면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그저 잘 봐달라고 길 수밖에 없었을 거다. "
" 빛나지도 않는 옛날 일들을 아직도 운운하는 건 믿을 만한 지금이 없기 때문이겠죠. "
그녀의 사진을 가져가기 위해 쌍안경을 집어 올린 순간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와 사진을 집었다.
" … 약혼자인 모양이지! "
" 돌려주십쇼. "
" 조금 본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있나? 옛날이라면 말 한마디로 이 여자를 취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1980년이잖아, 이제 자네 말대로 위대한 한국인은 일본인이 어찌할 수 없다고. 안 그래? "
" 돌려달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
" 그래, 그래, 듣고 있어. "
깊어진 골은 둘째치고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그녀에 대한 희롱을 내뱉는 모습에 점점 내 이성은 마비되고 있다.
" 아쉬운데? 전쟁 중이었으면 이 아가씨를 데리고 쌓인 여독을 풀 수 있었을 건데 말이야.
그땐 전쟁터마다 조선인 여자들이 일본군을 달래주었잖아? 사진 속 아가씨는 그런 조선인의 딸치고
너무 고고한 척 하는 거 아냐? "
" 닥쳐, 이 새끼야! "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국어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와 동시에 내 손이 마사토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내 분노에 마사토미의 동공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나의 눈은 불꽃을 지웠고, 그의 눈은 힘을 되찾았다.
내가 그를 때리는 순간, 아무리 그를 때린 이유가 타당하다 할지라도 나는 하극상을 일으킨 게 된다.
그러면 고베항에 도착하면 나는 반드시 배에서 내려야 할 것이고, 한국인 선원이 일으킨 사고는 같은 회사를
넘어 모든 일본 송출선단에 전파되어 나 때문에 모든 한국인 선원들의 이미지가 실추된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후배 선원들의 일자리마저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겠지.
" 삼항사. 개인의 문제는 대화로 해결하자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은데.
한국인 항해사는 주먹으로 말하나? "
" 죄송합니다. 할 말 없습니다. "
" 이 일은 그냥 넘길 수 없어. 배에서 상급자에게 거역하는 건 평선원도 안 하는 짓이야.
감히 사관이란 사람이 상급 사관을 폭행하려고 해? 내일 바로 보고할 테니 징계 각오해.
인수인계고 뭐고 필요 없어. 내려가. "
" … "
그에게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애걸복걸하지 않은 것만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감봉이든 견책이든… 하나는 받겠지,
선실로 내려와 침대 위에 누웠지만 통 잠이 오질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게 뭘까, 답이 안 나오는 고민 속에 시계는 벌써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이런 수모까지 겪어가면서 배에 타고 있는 거지.
돌아가서 장사나 할까…
ㅡ
" 헉. "
머리맡의 호출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갓 빠져든 잠에서 억지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시계는 1시 40분… 여전히 이항사 당직이잖아, 설마 자는 사람을 깨우면서까지 괴롭힐 생각인가.
" 예, 삼등 항해사입니다. "
- 삼항사! 나 이항사야. 빨리 조타실로 와줘. 지금 바로!
" 무슨 일 있습니까? "
- 조난 통신 같은데 한국어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어. 급해.
"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
그 말에 나는 아까 전의 께름칙한 감정은 금세 잊어버리고 근무복 상의를 걸친 채 선실을 나섰다.
ㅡ
조타실에 들어서자 커튼 너머로 영어를 사용해 대화를 시도하는 마사토미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모양으로,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자마자 급하게 나를 앞장세워 통신기 앞으로 데려갔다.
" 여기는 일본 상선 요츠마루 호입니다. 조난선 감도 있습니까? "
- … 침몰하고 있소, 죄다 침몰하고 있단 말이오!
" 배 이름과 경위도를 말씀해주세요, 한국 배입니까? "
- 죽고 싶지 않아, 죽기 싫다고, 빨리 구하러 와주시오,
" 흥분하지 마시고 저희가 조난 통신을 듣고 있으니 말씀해보세요! "
- 듣고 있다고? 듣고 있다고? 여- 여기는 마이즈루 해역이니 빨리! 빨리!
" 마이즈루 해역이라구요? 정확한 경위도가 어떻게 됩니까? 그래야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죠!
- 마이즈루 해역이요, 제발 와주세요 어서, 우리 좀 구해주시오
뭐지, 선원이 아니라 단순한 탑승객인가? 어떻게 통신하고 있는 거지?
'삼항사!'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마사토미가 커튼 너머 해도를 펼쳐놓은 책상 앞에서 나를 불렀다.
' 마이즈루 해역은 여기서 멀어, 우리 위치에서 통신 불가능한 거리에 있다고. 잘못 들은 거 아냐?
그리고 맞다고 해도 우리 배와 흘수가 안 맞아. 짐을 싣고 있는 지금 상태론 들어가기 위험해. '
뭐라고?
" 조난선, 감도 있습니까? "
- 왜 오지 않는 거요, 마이즈루 해역이라고, 침몰하고 있다고!!
" 지금 저희가 그쪽과 거리가 멀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저희 배와는 높이가 맞지 않고 침선이 많아서
저희 배도 위험에 처할 수가 있어요, 주위에 다른 선박은 없습니까? 그리로 간다면 저희도 위험해져요! "
그러자 통신 너머의 다급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해지며 너무도 차가운 말투로,
- 그러니까 오라는 거 아니오.
그쪽도 위험해지니까 오라는 것 아니냐는 말에 나는 흡사 물귀신이 떠오르며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대체 무슨…
" 삼항사, 뭐라고 말 좀 해봐. 어떻게 된 거야? "
" 이항사님, 말이 안 통합니다. 마이즈루 해역이라는데 무작정 와달라는 말뿐이에요.
우리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말하니 그러니까 오라는 게 아니냐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
" 뭐? 그게 뭐야? 구해달라는 게 아니라? "
" 처음엔 구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포기하는…, 아니,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목소리가 섬뜩해지더니 그러니까 오라는 거라고 하더군요. "
" 일단 아까 해도 상으로 재봤지만 마이즈루 해역엔 갈 수 없어. 그 근처에 있는 선박들이 해결해야지.
우리가 해상보안청도 아니고 그렇게까진 할 수 없잖아. 혹시 모르니 자네가 통신기만 계속 잡아줘.
한국인이라 일본 바다에 대해서 잘 모를 수도 있고… 통신이 가능한 위치니까 통신이 되는 걸텐데… "
" 알겠습니다, 계속 불러볼게요. "
마사토미는 조타실 앞에 서서 다급한 표정을 한 채 계속 쌍안경으로 주위를 살피고,
나는 통신기를 붙잡고 마지막 통신 이후로 소식이 없는 조난선을 계속해서 호출했다.
슬슬 답 없는 호출도 질리고, 이제 통신 거리에서 벗어난 걸까 싶어지던 찰나에 마사토미가 꽥 하고 비명을 질렀다.
" 으아아악! 저게 뭐야, "
" 왜 그러십니까? "
" 삼항사, 저… 저거 안 보여?! 우아악! "
" 뭐가… "
앞을 바라보니 그저 평온한 바다일 뿐이었다.
" 뭐가 말입니까? "
다시 뒤를 돌아보니 마사토미가 거품을 문 채로 졸도해있었다.
" 이항사님! 조타수, 빨리 이항사님을 의료실로 데려가세요! "
" 예, 이항사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
대체 마사토미가 무엇을 보았길래 이 평온한 바다 위에서 쓰러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조타수 등에 업어 의료실로 그를 보낸 뒤 나머지 당직시간을 대신 꼬박 지새웠다.
보름달은 더는 아름답지 않았고 가족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있을지 모를 조난선의 연락을 기다리며 피곤함에 절은 채 달과 함께 기울어간다…
ㅡ
" 삼항사, 내리 당직 선 뒤에 얼마 못 자고 다시 올라왔으니 많이 피곤하지?
원래 초급 사관 때는 잠 이기는 법부터 배우는 거야. 아무튼 관문해협 앞까지 잘 몰아줘. 내려간다. "
" 예, 일항사님. 수고하셨습니다. "
일항사와 당직 교대를 마치고 그제야 감춰뒀던 졸린 기운을 기지개로 떨쳐내며 조타실 앞에 섰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진난만한 햇살이 새 하루가 밝았단 걸 보여줬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사토미가 본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의 멱살을 잡았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정말 꼬이고 꼬인 하루였구만…
다시 조타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일항사가 다시 올라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뒤를 돌아보니 서 있는 건 머쓱한 표정의 마사토미였다.
" 삼항사. "
" 이항사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
" 괜찮아. 덕분에. "
어제 서로 멱살잡이까지 해놓고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멋쩍게 인사를 나누려니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 … 삼항사 그만 내려가 봐, 선장님께는 내가 당직 선다고 말씀드렸으니. "
"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많이 놀라셨던 것 같은데 좀 더 안정을 취하시지. "
" 아니야. 아무리 내가 막돼먹어도 미룰 걸 미뤄야지. 아. 그리고… 이거. "
애인 사진. 다행히 그 난리에도 구겨지진 않았구나. 다행이다.
" 삼항사. 어제 내가 뭘 보았길래 그렇게 경악했는지… 자네에게 말해줘야만 할 것 같아. "
" …? "
그는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살짝 떨며 최대한 덤덤하게 어제 자신이 본 광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의문의 통신이 끝나고… 자네에게 통신기를 맡긴 채 나는 혹시 있을지 모를 조난선을 찾기 위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지… 특이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 그냥 자네를 내려가서 쉬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했지.
하지만 저 멀리서-, 그래, 멀리서… 그들이 달려오고 있었네. 내 뇌리가 거부할 수 없는 속도로…. "
" 무슨 말입니까. 바다 위에서 누가 달려온다구요? "
" 정확히 그들이 누구라곤 칭할 수 없어. 새하얀 그림자처럼 생긴 사람 형상을 한 무언가가
어림잡아 수천 명은 될 것 같았거든. 그들이 한꺼번에 우리 뱃머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어. "
" 예? 달려왔다구요? "
" 난 지금 헛소리하는 게 아니야. 내가 똑똑히 본 장면을 말할 뿐이지. 들어봐.
그들은 표정은 없었지만 달려오는 움직임에서 그들의 처절함을 느낄 수 있었지.
우리 배에 올라야만 한다고 얘기하고 있었어. 그들은 빠른 속도로 우리 배의 양현을 기어올라
갑판 위로 하나둘씩 오르기 시작했네. 그건 마치 갑판에 하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산이 쌓이는 것 같았어.
자네에겐 내가 소리 지르고, 정신을 잃기까지가 찰나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나는 그 짧은 시간 속에
수천 명의 처절한 외침을 들은 거야. "
" … "
" 믿기 힘들겠지.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래서 쓰러졌던 걸지도 모르겠어.
이제 와서 자네에게 이런 말 하면 나를 속으로 웃긴 놈으로 생각하겠지만… 까짓거 뭐 좋아,
어제 그 통신 기억해? 그들이 부른 위치. 마이즈루 해역… "
" 그랬죠. 이곳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습니까. "
" 언뜻 자네한테 얘기한 적 있었지. 조선 노동자들이 탄 배가 귀국하지 못하고 침몰했던 사건…
마이즈루 해역은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탔던 우키시마호가 그들과 함께 그대로 가라앉아버린 해역이야.
내가 어제 본 수천 명의 하얀 그림자는… 어쩌면… "
그 대목에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상했지만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어쩌면… 그건 현해탄을 건너지 못하고 바닷속에 갇혀버린 영혼들의 환영이 아니었을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영혼이라도 돌아갈 길을 찾아다녔던 건 아닐까? "
" … "
"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자유야.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야.
왜 그들이 통신으로 우리를 그들의 무덤으로 불렀는지, 왜 이 먼바다까지 달려와 내 눈앞에 나타났는지,
천벌이라기엔 내가 너무 멀쩡하잖아. 머리로 이해하기엔 너무 비상식적이야. "
" … "
" 그래서 그냥 가슴으로 이해하기로 했어.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 늦었다는 거 알지만…
어제 일은 내가 먼저 사과하지. 미안해. "
" 뭘요. 저도 참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
생각 외로 그가 먼저 사과를 해온 탓에 내 마음도 적잖이 누그러졌고,
나 또한 이때를 기회 삼아 그에게 사과하며 배에 오른 뒤 처음으로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눴다.
뜻밖에 그가 재주가 많은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되었고, 그와 공통점도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현해탄에서 마주친 의문의 현상은 결국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그와 나 사이의 관계엔 해답을 가져다준 셈이다.
요츠마루 호가 슬며시 관문해협에 들어서고 있었다.
고베가 가까워졌단 신호였다.
ㅡ
" 마사토미 씨, 부산도 이제 꽤 익숙하죠? "
" 물론. 몇 번 와서 그런가 이제 친근한데. "
부산에 여행 온 일본 친구를 올 때마다 집으로 초대한 지도 오래,
결국 요츠마루를 하선한 이후로는 친구가 되어 서로의 나라를 오고 가며 친구로 지내게 된
그를 보면 옛날의 그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함께 우리 집 앞의 공원을 거닐 때 지나가는 누군가의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눈은 아주 선량했다.
" 옛날 사람들도 다 저런 아이였던 시절이 있었겠지. 한국인도 일본인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보살같이 재미없는 소리를 해서 미안한데, 이제 두 나라 사이에 피로 쓰는 역사는 다신 없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지금에 와서야 하곤 해. "
"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미 마사토미 씨와 제가 친구가 되어 함께 영락공원을 산책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저기 저 솟은 탑이 무슨 탑인지 아십니까? "
그는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즈넉이 솟아있는 하얀 탑 하나.
" 탑인 건 알겠는데. "
" 태평양 전쟁 때 끌려간 희생자 2만 명을 기리는 위령비입니다. 어쩌면 그때 그 사람들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 아… 잠시 묵념이라도 해야겠어. "
그저 집 앞의 공원일 뿐인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런 우리 뒤를 무심코 지나가는 한 아주머니의 주머니에서 라디오 소리가 울려 나왔다.
아주 익숙한 노랫가락…, 이미 오래전에 끝낸 선원 생활을 다시 추억하게 하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ㅡ 현해탄, 끝.
출처 : 웃긴대학 공포게시판 환상괴담
첫댓글 무섭기보다 마음이 아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