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성서 2009년 6월호
특집: 그리스도교 알기
갈라진 형제들, 친교를 나누는 동반자
거리를 나서면 가끔 신부인 나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개신교 선교사들의 섬뜩한 표어에 당혹감을 느낀 적이 있다.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거리에서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이 복음적 열정일 수는 있겠지만, 그 자신 안의 열정을 드러내는 언어는 항상 자기만족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 열정에 초대하는 언어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교회 일치에 관해서도 이 원칙은 유효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가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을 통하여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등져온 동방교회와 프로테스탄트를 향해서 대화의 손길을 내민 것은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을 포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진정으로 선포하고 싶었던 것은 분열이 아닌 참된 일치의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교의 많은 교파들의 분열이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1항)고 지적한 바 있다. 솔직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표현은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 교회가 즐겨쓰는 표어였다. 공의회 이전까지만 해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명시적으로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의 구원을 배제하는 배타적인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의회는 교회를 창조의 질서에서부터 시작된, 즉 ‘의인 아벨로부터’(교회헌장 2항)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규정하면서 더 이상 단죄와 분열이 아닌 일치와 화해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이자 표징”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가톨릭 교회는 동방교회와와 프로테스탄트를 더 이상 ‘열교’ 혹은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같은 신앙의 유산을 간직한 “갈라진 형제들”로 받아들인다. 교회의 분열이 더 이상 이들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 “양쪽 사람들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이렇게 분열된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분열 죄로 비난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였기에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일치교령 3항)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갈라진 형제들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보화들을 공동 유산에서 나온 것으로 기꺼이 인정하고 존중하여야 할 필요”(일치교령 4항)가 있기 때문이다.
갈라진 형제들과의 재일치를 추구하는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이란 단순히 개신교 신자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거나, 가톨릭의 전통적인 “장자 의식”으로 개신교를 “서자”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 21)”라는 예수님의 청원에 귀 기울여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증진하도록 일으키고 조직하는 활동과 사업”으로서 “갈라진 형제들의 상황을 공정하고 진실하게 반영하지 못하여 그들과 상호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과 행동을 삼가는 모든 노력”(일치교령 4항)을 말한다. 따라서 교회 일치는 일치 운동에 관여하는 일부 전문가들만의 몫이 아니다. 오히려 전 가톨릭 신자들에게 부여된 교회적 소명이다.
교회 일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치’를 간구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완고한 마음을 바꾸는 “마음의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솔직히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편향성에 고개를 돌리고, 같은 그리스도교이면서도 마치 ‘기독교’란 이름의 다른 종교처럼 치부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물론 한국 개신교의 선교 역사가 미국의 청교도 정신에 뿌리박은 복음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점과 한국 개신교 목회자와 교단의 이른바 “밥그릇 전쟁”이라는 무한 생존 경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하지만 참된 일치는 서로의 차이와 모순이 아닌 개신교 신자들이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동질감을 되찾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둘째로 참된 일치는 분열을 넘어 마음을 모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할 때 이루어진다. 세계 교회가 이미 활발하게 전개해온 일치 운동이 한국 교회에서도 자라나려면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비판해온 자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특히 금년은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의 해”로서 전 세계 교회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공동으로 준비한 일치 기도문을 지난 일치 주간(1월 18일-25일)에 공동으로 바치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또한 지난 1월 18일에 3천명이 넘는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올림픽홀에서 바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를 통하여 서로가 더 이상 비방의 자세가 아닌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치를 확인하는 뜻 깊은 체험을 나눈 바 있다.
셋째는 삶의 현장에서 서로가 그리스도인으로 지닌 삶의 체험들을 솔직하게 대화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복음은 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리스도께로 귀의하는” 체험에서 오기 때문이다. 동시에 죽음의 문화로 치닫고 있는 현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선포하고, 정의와 인권수호, 생태계 보호 등의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상호 협력과 연대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여전히 우리는 로만칼라를 한 목사님들과 여성 목사, 여성 사제,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퍼지는 교회의 세습 문제 등으로 갈라진 형제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궁극적인 일치의 체험은 ‘우리만의’ 것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체험과 만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짧지만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필자도 이제는 개신교를 교리의 차이나 편견이 아닌,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며 인격적인 친교를 나누는 동반자로 여기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두가 이런 체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
첫댓글 한 달 전에 올린 글인데, 이제서야 읽었네요. 좋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의 마음도 신앙과 실천이 어우러진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