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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
“ 아버지 점심 잡수셔야지요.”
용범이가 소파에 잠시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팔을 잡으면서 말씀을 드린다.
“ 지금 몇 시나 되었냐.”
10분만 있으면 점심을 드셔야 할 시간이래요. “
“ 벌써 그리 되었나.”
“ 상을 차릴 터이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용범이는 주방으로 가서 한쪽의 놓여 있는 냉장고 문을 연다. 오늘 아침에 먹다가 남은 두부찌개 냄비를 꺼내서 가스 불 위에 놓고 가스를 트니 시퍼런 불길이 확 솟아오른다.
너무 불길이 크게 솟아오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고 보니 가스 불을 너무 오른쪽으로 확 틀었기 때문이었다.
냉장고를 다시 열고 고추장과 멸치 볶음 종지를 꺼내서 식탁에다 갖다 놓고는 아침에 해놓은 밥솥을 열었다.
콩을 드문드문 놓은 밥을 한 사발 담아서 식탁에 놓고 그 밥보다 더 많게 떠서 또 한쪽에다가 놓는다.
방금 가스 불에 들여놓은 두부찌개 끓는 소리가 보글거린다.
두부찌개는 어제 큰 누나가 집에 들렀다가 끓여 놓은 것으로 세끼를 먹는 셈이다.
아버지가 두부찌개를 좋아하시니까 사흘 도리로 누나가 와서 반찬을 봐 주지만 어떤 때 바빠서 못 올 때에는 용범이가 준비를 한다.
용범이는 지난해에 군에서 제대를 하고 당분간은 아버지와 함께 있기로 하였는데 날마다 친구들로 해서 집에 있을 사이가 없다보니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다.
아버지는 진지를 잡수시다가도 다른 때 같으면 말씀을 잘 하셨는데 오늘은 잠자코 진지만 드신다.
“ 아버지 오늘 안마 봉사하시는 곳이 어디지지요.”
“ 음 그곳이 퇴계동에 있는 뭔 아파트라고 하였지 아마.”
“ 아 먼젓번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다녀오셨다고 하던 데지요. 오늘은 제가 모셔다 드릴 수가 있으니 시간을 맞춰서 나가시지요 뭐.”
“ 오늘 시청에 가서 일을 본다고 하지 않았니. 난 사무실에서 데려다 줄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네 일이나 보도록 하여라.”
“ 오늘 시청의 일은 전화로 연락을 해도 된다고 해서 그렇게 하였어요.”
“ 군에서 제대한데 대한 신고라면서.”
“ 예비군 중대 편성 때문에 와야 된다고 하더니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전화로 묻겠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요.”
" 그럼 잘 되었다. “
“ 아버지가 가시는 시간이 1시까지라고 하셨으니까 12시 좀 지나서 나가세요.”
진지를 다 잡수신 아버지가 양치질을 하시고는 양복장에서 양복을 꺼내시려 하신다.
“ 오늘은 날씨가 더우니 잠바를 입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 날씨가 덥다고? 그래 엄마가 그러께 시장에 나가서 사온 잠바가 있지 그것을 꺼내어라.”
“ 엄마가 사 오신 것이라면 제가 입대할 때에 사 오신 회색잠바 말씀이지요.”
“ 그게 회색이던가. 느 엄마가 아빠에게 사준 선물로는 그것이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용범이가 밥을 얼른 먹고 나서 괘종시계를 올려다보니 시간은 벌써 12시20분을 가리키고 있다.
“ 아버지.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나가시지요.”
용범이가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현관문을 나선다.
엊그제까지도 집 주위에 있는 나뭇잎이 새로 나오는 것 같았는데 어느 사이에 잎이 활짝 피고 참새들은 가지사이로 짹짹거리면서 호로록 날아다닌다.
아버지를 앞좌석에 앉으시게 하고 안전벨트를 매어드리고 차는 바로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을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하루 종일 내라더니 오늘은 날씨가 너무도 화창하여서 그런지 거리에는 차들의 행렬이 즐비하다.
얼마쯤을 가다가 교통신호를 받아 멈추게 되자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으시며 말씀을 하신다.
“용범아 지금 지나는 곳에 아카시아나무가 보이냐.”
“ 네 아버지. 지금 한창 꽃이 활짝 피기 시작하고 그 향기가 온 천지에 가득한데요.”
“그러냐.”
아빠는 그 말씀을 하시더니 잠시 시간이 있다면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으면서 걸어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 30분 정도는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잠시 후에 차를 세울게요.”
도로에서 갓길로 들어서자 저만치 아카시아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이고 한창 꽃이 피어서 그 향기가 차안 가득히 번지고 벌들의 윙윙 소리는 마치 기계방아소리처럼 울린다.
“ 아버지 잠시 내리실래요.”
아버지는 용범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더니 어디 쉴만한 데가 있으면 잠시 앉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마침 저만치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여서 아버지를 그리로 모셨다.
“ 밖에 나오니 꽃향기가 더욱 짙구나.”
“ 지금 벌 소리가 윙윙 들리시지요. 저쪽 길가에 벌통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요.”
“그렇겠지. 벌통을 놓았으니까 벌들이 그렇게 많이 모이겠지 .농사짓는 사람이 가을 타작을 해서 곡식을 창고에 쌓듯이 벌들도 요즘이 일 년 농사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사람도 다 때가 있다고 하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야. 너도 이제 군에서 제대를 하였으니 앞으로 나갈 일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네. 아버지.”
“ 시간이 아직 있다고 하였지 목이 마른 것 같으니 물 좀 먹었으면 좋겠다.”
용범이는 상점을 찾아보았으나 인근에는 눈에 띄지를 않아서 방금 지나온 곳의 가게를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용범이는 물병을 늘 가지고 다니는 편인데 오늘은 깜박 잊고 나온 것이 잘못이다.
바위 위에 걸터앉으니 벌 소리는 더욱 요란스럽고 아카시아 꽃향기는 옛날 어릴 때 아이들을 따라서 나무위에 올라가 아카시아 꽃을 한 옴큼씩 따서 먹던 생각이 나는 것이다.
아이들의 간식이라고는 없던 시절이지만 간식꺼리는 도처에 널려 있었으니 들에 나가게 되면 삘기를 뽑아먹기도 하고 보리가 익을 무렵이면 밭에 들어가서 까맣게 병이 든 ( 그때는 그런 줄 몰랐지만 입이 시꺼머토록 깜부기를 따먹었다.
살구가 익기도 전에 시거운 살구를 따먹다가 뱉기도 하고 뽕나무에 오디가 열리게 되면 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것도 모르고 입이 새까매지도록 따먹었던 것이다.
앵두가 이어서 익게 되면 여자아이들은 그것을 따서는 다람쥐처럼 입에 가득 넣고 오물거렸는데 동골동골한 앵두 씨는 너무 작아서 입에서 잘 나오지를 않았다.
김영서가 나무 중에 아카시아 꽃향기를 좋아하는 것은 나름대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수물 네 살이 되던 해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나서 할 일을 찾는 중에 역에서 임시직을 뽑는다는 소릴 듣고는 알아볼 준비를 하는 중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친한 친구가 모처럼 만나자는 연락을 한 것이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다닐 때 전학을 새로 와서 같은 책상에 앉게 되다 보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집으로 놀러가자고 하여서 가보니 그의 집 울타리 가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가 하면 한참 꽃이 피어 그 향내가 천지에 진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너무도 뜻밖에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친구의 여동생 정혜숙이라는 학생을 보게 되었는데 첫눈에 그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된 것이다.
그날 이후 그 집에 갈 때마다 그를 만나게 되면 말을 걸어보려 하였지만 그는 생긋 웃고 피하기만 하여 더욱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밤마다 혜숙이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하루는 편지를 써가지고 있다가 친구네 집엘 갔을 때에 전하려 하였는데 그날도 혜숙이를 만날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그런 기회를 가지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그를 만나지를 못하던 중에 어느 날 친구가 등교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알아보니 친구네가 갑자기 서울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었으니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영서는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다시는 여자와는 인연을 맺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던 중에
2년이 지난 어느 날 잊어버렸던 그 친구가 만나자는 연락을 하였던 것이니 지금까지 잊고 있던 혜숙이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그가 몹시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그가 서울로 이사를 간 사연은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사업 실패를 하시는 바람에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져 살다가 다행이도 아버지를 돕는 분이 나타나서 다시 복구를 하게 되고 그때 아무 말도 없이 간 것이 늘 마음에 결렸다는 것이다.
“ 영서야 네가 내 동생을 몹시 좋아했지. 사실은 나는 모르는 척 하였지만 내 동생도 너를 무척 좋아하였어. 그런데 그때 집안의 일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건강하던 혜숙이가 하루는 학교를 갔다 오더니 몸에 열이 나기 시작을 하여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급성폐렴이라고 하여 입원을 시켰는데 입원한지 단 일주일 만에 갑자기 호흡이 빨라지고 열이 올라 응급처치를 하였지만 끝내는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이렇게 허무하게 사람이 죽을 수가 있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뻔히 보고도 살리지를 못하였으니 식구들은 한동안 정신을 잃어버릴 지경이었고 끝내는 어머니마저 1년 후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집은 그렇게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던 거야. “
영서는 그 말을 듣자 잊으려 하여도 지금껏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한번 만났으면 하였는데 혜숙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친구가 앞에 없다면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친구는 그 말을 하면서 동생이 남겼다는 하얀 봉투 하나를 넘겨주는 것이다.
“ 동생이 죽기 전에 너에게 전해주라던 거였어.”
‘ 혜숙이가 살았으면 틀림없이 우리 둘의 사이는 처남매부간이 되는 것인데 …….
영서는 살아오면서 그날처럼 인생의 비애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구를 보내고 나서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혜숙이가 보내준 봉투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일기장 한권이 들어 있었다.
일기장의 첫 장을 넘기다가 영선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혜숙이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보게 되자 금방 가슴이 메어지는 갓 같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 죽지만 않았다면 나는 너를 오래도록 사랑할 수가 있었을 텐데 … 혜숙아 그렇게도 빨리 하늘나라로 올라가야 했니 .”
영서는 일기장을 덮고 그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눈을 감았다.
혜숙이가 죽은 후에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역으로 가려는 임시직 자리도 되지를 않아서 방황을 하는 중에 우체국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거기에서 근무하시는 작은 아버지를 뵈오니 마침 잘 왔다면서 집배원이 갑자기 사표를 내서 그러니 한 달간만 일을 돌봐주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하셔서 그는 근무를 하겠다고 대답을 한 것이다.
그가 우체국에서 하는 일은 우편물을 주소별로 분류를 해서 송달함에다가 넣는 일로 그다지 힘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날마다 일찍 출근을 하여 사무실의 청소며 화장실의 정리정돈 까지를 하다 보니 윗분들이 매우 기분 좋게 받아 드리는 것이었다.
우체국에는 우편물의 접수부와 예금담당 부 그리고 외근으로는 우편물 배송부가 있는데 아침 출근을 하게 되자 바로 산더미 같은 일에 파묻히다 보면 어느 결에 하루가 가는지 몰랐다.
그때 예금 계에 김 소라라는 아가씨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바로 영선이 입사하던 날 함께 국장님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알고 보니 그의 집이 같은 방향이었다.
그렇지만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영선의 근무 부서가 사무실이 아니고 외부에서 일을 하다 보니 사무실 직원과는 아침에 출근해서 청소할 때나 아니면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중에 한 달에 한 번씩 직원들의 회식 시간에는 막걸리도 한잔씩 마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도 불렀는데 유난히 김 소라가 노래를 잘 불렀다.
여직원이 여럿이 되지만 어느 사이에 김 소라는 영선의 눈에 박히기 시작을 하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뇌리 속의 영상으로 남는 것이었다.
영서는 한때 혜숙이를 짝사랑하다가 그를 잃은 다음에는 다른 여자를 사귀지 말아야지 하였지만 또다시 소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학교에 등교한 여동생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면서 병원엘 가야하는데 당장 돈이 없으니 돈을 좀 구해 오라는 부탁을 어머니가 하신 것이다.
영서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돈을 꾸어본 일도 없기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장 급한 일이니 자존심이 좀 상하는 일이었지만 김 소라에게 부탁을 하자 그는 순순히 돈은 꾸어주는 것이었다.
영서가 급히 병원으로 가서 보니 그때 동생은 이미 의사의 진단을 받고 나오고 있었는데 먹은 것이 체한 것뿐 대단치 않다고 하여 빌려간 돈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영서는 그 일이 미안해서 저녁을 사겠다고 하자 김 소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쾌히 승낙을 하여서 둘은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그 후에 둘은 은연중에 가까워져서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면 서로의 눈길은 미소의 꽃구름으로 변하여 하늘을 향해 둥실 떠가고 있었다.
한번은 저녁을 먹은 다음에 가로수 길을 걷다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지만 소라는 뿌리치지 않았으며 헤어질 때도 끌어안자 눈만 흘길 뿐이었다.
이날이야말로 처음으로 영선으로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댄 날이며 이후 둘은 만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걸었다.
그 해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무렵이었을 것이다.
바깥 날씨가 몹시 추운 날 일을 끝내고 나니 밤 9시가 넘어서 그제야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서 몸을 덥히느라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가는데 저만치서 목도리로 얼굴을 감싼 여자가 오는데 자세히 보니 김 소라 이었던 것이다.
영서는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다가 옆구리를 툭 치자 그는 놀라면서 달아나는 것이다.
“ 어디를 가는 거야 나란 말이야.”
그러자 그 자리에 선 소라는 환하게 웃으면서 영선의 등가죽을 후리치는 것이다.
“깜짝 놀랐지 뭐에요.”
그는 예금을 받아놓고 금고에다가 돈을 넣는다는 게 무슨 정신이 빠져서 그런지 책상 서랍에다가 넣고는 열쇠를 채우지 않은 채 퇴근을 한 생각이 나기에 사무실로 급하게 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 혼자 가다가 호랑이라도 나타난다면 어떻거려고 그냥 간단 말이야.”
그 소리를 하는 순간 김 소라는 “어마야” 하면서 영서의 품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놀란 것은 오히려 영선이었다.
“ 난 호랑이를 무서워한단 말이에요. 어렸을 때에 아버지랑 동물원엘 갔는데 저만치서 무얼 먹고 있던 호랑이가 갑자기 입을 딱 벌리고 ‘어흥’ 소리를 내며 앞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간이 콩알만 해져서 아앙 울고 말았는데 그 후로는 호랑이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쭈뼛해지는데 호랑이라고 하니 놀랐지 뭐예요.”
이 순간까지 김소라는 영서의 품에 안긴 채였다가 “ 어마나 ” 하고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렇지만 영서는 집안으로 들어온 병아리를 놓아주기는커녕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그의 입술을 깨물었던 것이다.
김 소라가 ‘아악’ 하면서 영서에게서 떨어지려 하였지만 그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
“ 날씨가 추워서 까닥하면 길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으니 어서 사무실부터 가자구. 혹시 그동안에 도둑놈이라도 들어와서 예금을 훔쳐갔다면 어떻게 해.”
그렇지만 김 소라는 영서의 가슴을 가볍게 때리면서 ‘난 몰라 몰라.’ 하며 칭얼대었다.
그런데 일에는 항상 마(魔)가 따르게 마련인지 영서와 김 소라가 한창 열애에 빠지고 있는 중에 영서에 대한 정식 발령이 무산이 되었다는 통보가 왔던 것이니 영서는 지금까지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고만두게 된 것이다.
당초에 영서가 계약한 기간은 1년간으로 그동안 정식 직원이 되기를 바랐지만 작은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는 주어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직장을 갑자기 고만두게 되자 영서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고 김 소라와의 사랑도 이제 끝이 난 것이라는 생각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그날 저녁때 작은 아버지는 조카의 등을 어루만지시면서 몇 번이고 미안해 하셨다.
영서는 평소에도 작은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막상 직장을 고만둔다고 생각을 하니 오히려 작은 아버지에게 송구한 마음뿐이었다.
“ 작은 아버지 덕택에 그동안 근무를 잘 하였습니다. 저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1년 동안의 경험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앞으로 좋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작은 아버지는 기계실의 실장으로 조카인 영선을 정식 직원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만년 실장일 뿐인 그에게는 이렇다 할 권한이 없으니 떠나보내야 할 조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그때가 마침 아카시아 꽃이 한창 피고 향기로운 꽃 냄새가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영서는 직원들의 송별회를 받으면서 국장님부터 과장님을 거쳐 직원들이 주는 술잔을 다 받다 보니 어느 결에 술이 잔뜩 취해서 송별연이 끝나고 헤어진 뒤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혼자 식당 밖으로 나오다가 이제는 소라와도 헤어져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한없이 슬프기도 하여 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그 때 옆으로 다가 오는 사람이 있었다.
“ 정신 차려요. 웬 술을 그리 많이 자신대요.”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김 소라였다.
“ 소라가 나를 내쫓으니 나갈 수밖에 없지 않아 .”
그는 김소라를 밀치면서 앞으로 걸어 나가려고 하였다.
“ 영서씨를 내가 무슨 권한으로 내쫓겠어요. 다른 직장을 구하면 될 테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하였어요. 소라가 옆에 있으니 안심하고 앞으로 나가자구요.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면 언젠가는 다시 수증기로 화하여 물방울이 되어 돌아오듯이 지금은 직장을 떠나는 것이 서운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힘을 내세요.”
“ 날더러 힘을 내라구. 나에게는 지금 아무 힘도 없는데…… 이제 난 실업자가 되었으니 갈 곳이라고는 아무 곳도 없단 말이야. 실업자를 사랑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김 소라도 얼마 있으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고.”
“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난 영서씨를 죽도록 사랑할거예요.”
“ 난 이제 실업자란 말이야. 다 고만두라구 난 이제부터 ….”
영서는 그 말을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김 소라의 눈에서도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김 소라가 억지로 영서를 잡아끌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방문을 열자 그는 맥없이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영서는 여기가 어딘가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 때 방문이 열리며 김 소라가 생긋 웃으면서 들어오는 바람에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 예 ? 잘 주무시던데요 . 아기처럼 코를 가볍게 골면서 말이에요. 호호”
어느새 소라의 손에 들려진 대접이 그의 입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이게 뭐야. “
“ 간밤에 사랑의 씨앗을 따서 담근 꿀물입니다.”
영서는 꿀물을 받아 마시다 말고는 소라를 끌어안고 침대로 쓰러진 것이다.
얼마 후에 영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니 침대 위에는 거울이 있고 벽에는 광고 사진 같은 것들이 걸려 있는데 모두가 남성들의 야한 그림이고 여자들의 것은 하나도 보이지를 않았다.
언제부터 이 여자가 남성들에 대해서 연구를 해오고 있다는 말인가. 다른 벽을 보다가 영선은 또 다른 장면을 본 것이니 거기에는 남성의 그림은 한 장도 없고 순전히 여자들의 반라의 그림이었는데 특정 지점에는 여자들의 나체 사진도 붙어 있었다.
영서는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직장을 찾아다니다가 어릴 때부터 자주 다니던 친척 아저씨가 운영하는 건설업체로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일반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어렸을 때부터 과학에 소질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만드는 것을 좋아 하였다. 그의 담당업무는 철골을 땜질하는 일로 일은 고되긴 하였지만 보수는 다른 인부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건설업이란 집을 짓는 일이 주 업무다 보니 노무자들은 누구나 새벽 일찍 출근을 해서 일 준비를 하게 되니 지금까지 편하게만 있다가 적응을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인척 아저씨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부지런을 떨어야 하겠기에 남보다 더 일찍 일을 시작하다 보니 얼마 후에는 아저씨도 인정을 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동안 아무 연락이 없던 김 소라가 만나자는 연락을 한 것이니 영서가 우체국을 고만두고 나서 반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벚나무가 늘어서 있는 야외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자 저만치 김 소라가 천천히 걸어오는데 다소 수척한 얼굴이어서 어디가 아파서 그런가 하고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김 소라는 반가운 얼굴로 대하면서 그동안 어떻게 지났느냐고 말문을 열더니 벤치에 앉아서는 영서의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 그동안 어디 불편한 곳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소라는 손으로 영서의 눈을 가리면서 눈을 잠시 감아보라는 것이다.
“ 왜 만나자마자 눈을 감으라는 거지.”
소라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았는지를 확인을 하더니 영서의 손을 잡아끌어서 가져갔는데 맞닿은 곳은 소라의 가슴 아래 아랫배였다.
영서가 깜짝 놀라서 얼른 손을 빼려 하자 소라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영서는 소라의 신호가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 ………….”
소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영서는 너무도 뜻밖의 처지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소라를 꽉 끌어안았다.
감히 생각지도 않은 일이 영서에게 닥친 것이니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도 소라를 사랑하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이 너무도 기뻤던 것이다.
“우리 서둘러서 결혼부터 해야 하겠지. 하하하.”
그 말을 하면서 영서는 소라를 향해서 환하게 웃었다.
서둘러서 결혼식을 올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시골로 내려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자 이제야 손자를 보게 되었다면서 특히 어머니가 좋아하셨다.
결혼식을 올릴 때의 나이는 영서가 27세에 소라는 갓스무살이었다.
결혼 후에 영서는 소라의 직장 가까운 곳으로 방을 얻어 살림을 차리니 날마다 꽃이 피는 마을처럼 행복의 날만이 두 사람을 묶어 놓는 것이다,
몇 년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동안에 두 사람에게는 아이 셋이 탄생을 하여 큰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그 이듬해에는 둘째가 다시 입학을 하게 되자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보통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밥하고 아이의 도시락 싸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학교를 보내기까지의 엄마의 역할은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가 본인도 출근을 하게 되니 방방 뛸 정도로 서둘러야 직장에 늦지를 않았다.
남편이 어떤 때 아내의 일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를 않고 혼자 힘으로 집안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생각 끝에 다니는 직장을 고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남편에게 그 말을 한 것이다.
영서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혼자 힘으로 집안을 꾸려나가는 것이 안차라워서 직장을 고만두라고 권고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그냥 있었다고 하면서 당신 뜻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하였다.
남편이 그런 생각을 미리하고 있었다는데 대해서 소라는 마음이 다소 위안이 되어 다음 날 마음먹은 대로 직장에 사표를 낸 것이다.
국장님은 기왕에 몸을 담은 이상 정년퇴직 때까지 있어 보라고 하였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들어 알게 되자 너무 아쉽다는 말을 하면서 성대하게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소라는 한편으로는 자기가 고만둠으로서 후배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소라가 직장을 고만두자 제일 좋아한 것은 아이들이었으니 엄마나 아빠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학교에서 학부형회의가 있어도 참석을 할 수가 없었기에 그것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선생님이 알았던지 하루는 큰 아이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하였는데 학급의 일로 협의를 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선생님을 만나자 자모회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으니 소라는 초면에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할 수없이 대답만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책임을 맡고 보니 일주일에 평균 두 번씩은 학교에 나가게 되니 오히려 직장 이상으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어서 석 달 동안을 나가다가 더 이상 감당을 하지 못하겠다. 하고는 돌아선 것이다.
직장을 고만두자 이따금 친구들을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그동안 독서라는 것을 전혀 하지를 못하다가 책을 접하게 되니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는 것도 좋았다.
더구나 일요일이면 식구들과 고궁을 찾는 재미도 있어 왜 진작 직장을 고만두지 못했나 하는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1년간을 꿈같이 보내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너무도 뜻밖에 남편에게 큰 사고가 난 것이니 그것은 다니는 회사의 아파트 건축물의 옥상에서의 일이었다.
아파트 맨 꼭대기의 슬래브를 친 곳을 점검하던 중에 물이 잘 내려가도록 하수구 설치를 한곳이 시멘트 작업이 잘못되어서 물이 역류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영서는 아무래도 시멘트를 깨서 하수관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다른 인부들을 불러서 시켜도 될 일을 자신이 무거운 쇠망치를 들어서 깨다가 한쪽의 시멘트자락이 부서지면서 그 쪼가리가 두 눈으로 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고꾸라진 것이다.
가까스로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서 눈 수술을 받고 난 후에 사흘 만에 눈을 떠 보라고 하여 떠보았지만 영상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수술이 잘못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서울의 전문 안과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아본 결과 동자가 둘 다 파손이 되어 시력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으니 이날 이후 영서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절망을 하고 만 것이다.
멀쩡하던 눈을 잃고 앞을 못 보는 처지가 되니 일상생활의 제약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 모든 것이 깜깜한 그믐밤처럼 암흑뿐이었으니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절망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희망의 싹으로 움이 틀수가 있는 여지가 있지만 지금 영서의 앞에 놓인 절망은 희망의 씨앗마저 눈을 트지 못하게 하는 기로에 서게 한 것이다.
인간이란 자고 깨면 식전에 할 일이 참으로 많이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없는데 반해 영선의 하루는 자고 깨면서부터 난관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욕실엘 들어가도 평상시 같으면 눈을 감고도 수건이나 비누곽이 놓인 자리에 손이 자연히 가지만 앞이 캄캄하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한숨을 쉬어도 해결되는 일이 없고 아무리 후회를 해도 원상회복이란 난망일 뿐이니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삶을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이 하루에도 수 십 번 일어나고 있었다. 날마다 술독에 빠질 지경으로 술을 마셔도 보았지만 몸만 축이 나고 가족에게까지 괴로움을 주고만 있었다. 이대로 인생을 정리한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도 억울한 생각이 들지만 이 인생을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혼자 죽는 것은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리 되면 가족들의 삶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루도 골백번을 생각을 해도 묘안이 서지를 않는 가운데 문득 언젠가 춘천맹아학교에 봉사활동을 하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때의 느낌은 비록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이지만 그들이 지닌 마음은 비단결처럼 곱고 더구나 그들의 말소리에서는 맑은 샘물이 흐르는 것 같이 순수한데다가 그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생각을 하다가 영서는 나이를 생각하고 자신도 거기에 동화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바로 아내를 부른 것이다.
“ 여보 참으로 훌륭한 아이디어에요. 당장 맹아학교엘 가봅시다.”
“ 그렇지만 나이 36세에 무슨 맹아학교를 다녀요.”
영서는 그 말을 바로 취소를 하였지만 아내는 남편을 한참동안이나 설득을 하고는 남편의 손을 잡고 맹아하교로 간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듣고 난 영서는 지금까지의 생각에서 한발 벗어나는 감이 들긴 하였지만 손자 같은 아이들과 학교생활을 한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아내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서 학교엘 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니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살아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된 것이다.
다음 날부터 우선 점자 공부에 들어갔는데 너무도 깜깜한 그믐밤처럼 점자는 생소하기만 하여 도저히 공부를 할 것 같지를 않았지만 앞으로 이 일을 해내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자 밤을 새워서 모르는 것은 재 복습을 하면서 침술과 안마술까지 익히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의 피눈물 나는 노력 덕분에 3년 과정을 마치고 나니 그에게는 국가가 인정하는 침술과 안마술의 자격증이 나온다고 하였다.
졸업식 날 소라는 아이들과 같이 남편이 졸업장을 받는 순간 꽃다발을 남편의 품에 안겨 주자 그것을 받는 순간 남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온가족이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 자랑스러워요 당신의 모습이.”
“ 이 모두가 그동안 당신이 뒷바라지를 잘 해준 덕분이에요.”
영서는 이날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을 앞에 앉히고는 그동안 엄마가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펴주었기에 아빠가 성공할 수 있었다면서 엄마를 잘 보살펴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생각하면 영서가 실명을 하고 나서 마음을 잡지 못하다가 그래도 워낙 남다른 집념이 강한 바람에 맹아학교를 졸업을 하게 되고 자기가 배운 의술을 이제는 사람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후 영서는 장애인 협회에 등록을 마쳤으며 협회의 지시를 따르면서 개인별로 영업도 하고 봉사활동을 하게 되니 시력이 왕성할 때 이상으로 활동을 많이 하게 된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이렇게 어려운 고비를 용케 넘기고 자립을 하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일요일이면 그동안 여행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식구들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한번은 부부가 나란히 해외여행지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까지 가서 그 나라의 풍습을 접하면서 우리 음식과는 또 다른 맛의 향연을 즐기기도 하였다.
사실 소라는 그동안 남편의 공부를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애로 사항을 해결해 주는 한편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다니기까지의 뒷바라지는 그것대로 쉬운 일이 아니어서 어느 한날 쉴 사이가 없이 지나다 보니 저녁이면 온 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입 밖에도 내지를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큰딸이 결혼을 하고 용범이가 대학을 다니고 막내가 중학교를 다니게 되니 어느 결에 영서도 50줄에 접어들고 아내 또한 40을 넘기게 되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소라는 먹은 것이 소화가 덜 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자고 깨면 입맛까지 없어지는 것이어서 혼자 걱정을 하다가 아무래도 병원엘 가보고 싶어서 진단을 받은 결과 뜻밖에도 위암 3기라는 것이었으니 소라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라는 남에게 해로운 일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집안 살림에만 열심이었는데 암이라니 도무지 그 말이 믿기지를 않았지만 현실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집에 돌아와서도 한 이틀 동안은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남편에게 말을 하니 남편은 깜짝 놀라면서 어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서 의사를 만나자 의사는 시기가 너무 늦어서 수술을 해도 1년을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으니 그 말을 들은 영선은 온 몸이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자기가 실명을 당한이래. 아내는 그야말로 물불 가리지 않고 갖은 일을 다 하느라 고생도 많이 하고 이제야 길을 펴려는 중에 그런 병이 몸에 침투를 하였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마침내 아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한 결과는 예상보다는 훨씬 경과가 좋다고 하였다.
영서는 병원의 약에만 의존할 수가 없어서 암에 좋다는 사약은 다 찾아서 헤매었으니 약도 가지 수가 많고 그것을 다 하자니 진이 빠질 지경이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좋은 약이 농부들이 제일 싫어하는 밭에 서 나는 쇠비름이라고 하였다.
이 풀은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여름날 이 풀을 뽑아서 빨래 줄에 매달아 놓아도 한 달 이상을 죽지 않으며 이것으로 환을 만들어 먹이면 암에 큰 효과가 있다고 하여 영선은 환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먹인 것이다.
이 약의 효과를 보아서 그런지 소라의 건강이 차츰 더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2년이 지나면서 부터는 평상시대로 원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만날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던 영선은 그 다음부터는 건강에 자신을 하고는 그 약을 열심히 복용토록 한 것이다.
의사의 말에 겁을 먹던 영선이었으나 이제는 안심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라는 생각으로 가끔씩 병원의 진단을 받게 되면 의사는 머리만 기웃거릴 뿐 별 다른 말을 하지를 않았다.
암이라는 것은 수술 후에 5년이 경과하면 안심을 해도 된다고 들었는데 어느 듯 소라가 5년을 무사히 경과를 하게 되자 가족들은 모두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어 만세를 불렀다.
“ 여보 그간 고생을 많이 하였어요. 이제 5년을 무사히 경과하였으니 음식을 어느 정도 마음대로 먹어도 되겠어요.”
남편이 기뻐서 말을 하자 소라는 그냥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2년 후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 돌아오는 날로 식구들이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한 것이다. 큰딸이며 작은 애들이 모두 집으로 오고 아빠도 잠시 후면 집으로 돌아오신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부터 거실의 소파 위에 앉아있던 엄마가 상을 찌푸리는 것이 이상하여 큰딸이 엄마를 부르자 엄마는 그냥 자리에 눕고 싶다는 것이다.
“ 엄마 왜 그러셔요. 어디가 아파서 그래요.”
큰딸이 말을 하자 엄마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더니 스르르 눈을 감는 것이다.
“ 엄마. 엄마.”
큰 딸이 엄마를 흔들면서 불러 보았지만 엄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들이 엄마를 부르고 막내가 엄마에게 달려드는 사이 아빠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는데 평소 같으면 환하게 웃을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 여보 이게 어찌된 일이요 . 어서 정신을 차려요.”
영서가 아내를 붙들고 통곡을 하자 아이들도 소리 내어 울고 이웃사람들조차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다가 엄마가 갑자기 운명을 하였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가 상심을 하는 것이었다.
1년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7년을 무리 없이 살게 되어 영선은 안심을 하였는데 너무도 갑자기 소라가 세상을 뜨게 되자 그제야 너무 방심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되는 것이었다.
영서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내가 한 번도 자기를 거역한 배가 없이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헌신해 온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몸이 아파서 고생을 하면서도 한 번도 괴롭다는 내색을 하지 않을 정도의 강인함을 지닌 아내는 남편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앞에 나서서 해결을 해 주었다.
아내가 병이 났을 때 왜 이런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나야 하는가 하는 원망을 하기도 하였지만 누구에게나 인간에게는 시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긍정적으로 받아 드렸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영서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한동안 아내가 묻힌 곳을 매일같이 찾아 간다.
“ 여보 그렇게 무정하게 한마디 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나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용범이가 엄마가 좋아하는 국화꽃 한 다발을 엄마에게 받치면서 엄마를 부른다.
“ 엄마. 엄마.”
아들과 영서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金 斗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