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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능참봉의 관직생활과 왕릉수호
김두벽(金斗璧)의 『지문일기(咫聞日記)』
장서각 ACADEMY_2012년도 역사문화강좌
김경숙 (조선대학교 교수)
능참봉은 왕릉을 수호하는 최하위 관직으로, 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족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초입사(初入仕)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임무는 왕릉 내의 산림을 수호하면서 일반인들의 범경(犯境), 경작(耕作), 투장(偸葬), 투작(偸斫) 등을 방지하는 역할이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임무는 산림에서 생산되는 땔나무, 숯, 마초(馬草), 횃불 등의 산림 생산물을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온돌의 보급에 따른 땔나무의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산림 생산물의 중요성 및 효용성이 커지고 있었는데, 능참봉에게는 이를 자율적으로 관리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어느 정도 관례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능참봉이 주위의 친지들에게 주는 혜택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능참봉의 관직 생활을 18세기 초반 정릉(靖陵)․영릉(英陵) 참봉을 지낸 김두벽(金斗璧)의 『지문일기(咫聞日記)』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김두벽과 『지문일기』에 대하여
김두벽(1651이후~1721이후)은 본관이 경주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에 충청도 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인물이다.
김두벽 집안은 관료 집안으로 그 또한 부친을 이어 관직에 나가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여 젊은 나이에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1709년에 4, 50대의 나이로 천거를 받아 정릉 참봉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일반 재지 사족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산계를 가질 수 있는 길은 대체로 부형(父兄)으로부터 품계를 대신 받는 ‘대가(代加)’에 의해서였다.
김두벽의 경우에도 조부가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부친이 찰방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대가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정릉 참봉을 시작으로 1710년 영릉을 거쳐 1712년 장악원 직장, 1717년에는 개령 현감, 1721년에는 영유 현령을 역임하였다.
김두벽의 사례는 조선 후기 사족들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대가에 의해 품계를 받고 능참봉에 진출하여 이를 기반으로 지방관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매일의 생활을 일기로 기록하여 『지문일기』 2권을 남겼다.
일기에는 1708년(숙종 34) 1월 1일부터 1713년(숙종 39)년 9월 10일까지 총 5년 9개월간의 생활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에는 능참봉을 역임한 기간도 포함되어 있다. 즉, 1709년 4월 정릉 참봉을 제수받아 1년 9개월, 1711년 1월 영릉으로 옮겨 1년 10개월을 근무하였다. 그가 능참봉으로 지낸 3년 7개월 동안의 기록이 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2. 능역 수호와 소나무 보호
1) 정릉 수호와 투작
일기에 의하면 김두벽은 1709년 4월 16일 정릉 참봉을 제수받은 뒤, 22일 서산집을 출발하여 궁궐에 들어가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고 다음달 3일 정릉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능참봉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근무방식은 두 사람이 매월 15일씩 나누어 교대로 근무하고 출근 장부인 공좌부(公座簿)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변통이 허용 되었다. 김두벽 또한 1-2개월을 주기로 서산 집과 왕릉을 왕래하면서 교대근무를 하였다.
능참봉의 핵심 임무는 능역을 수호하고 산림을 보호하는 일이다.
조선후기 사회적으로 유행하고 있던 투작의 피해는 왕릉도 예외가 아니어서, 능역에 몰래 들어와 땔나무를 하거나 목재를 베어가는 일이 빈번하였다. 당시 정릉에도 투작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그는 능역 수호를 위하여 능졸(陵卒), 하인배를 동원하여 산을 돌게 하고 자신도 때때로 순산(巡山)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능졸들이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투작 사건은 막을 수 없었다.
<1709년 정릉의 투작 상황>
날짜 / 내용 / 처벌
5월 6일 능졸이 한사람을 잡아서 낫 2개를 빼앗아 바쳤다.
5월 9일 저녁에 상위와 서원(書員)을 보내 산을 돌았는데, 두 사람을 잡아 왔다.
5월 15일 저녁에 수복(守僕)이 진목(眞木) 수십 그루를 도둑맞았다고 한다. 패를 내어서 앞서 당번을 선 수복을 잡아오게 했다.
5월 18일 새벽에 상위를 보내 노비 6명과 하인 2명을 거느리고 가서 한강가에 이르러 땔나무를 훔친 군인 5인을 잡아왔다. 모두
태 30을 치고 풀어주었다.
7월 14일 신 선달을 보내 능역을 적간하니 투작한 곳이 자못 많다고 한다.
7월 24일 수복에게 나누어 맡긴 곳에서 투작한 어린 소나무 10여개를 발견하였다. 수복 귀중을 잡아다가 장 15대를 치고 적발해
서 아뢰게 하였다.
7월 26일 귀중이 투작한 사람을 잡아와서, 중장 30대를 쳤다.
8월 29일 무도 사람들이 화소(火巢) 안에서 풀을 베어갔다. 잡아다 장을 쳤다.
12월 6일 초군 4-5인을 잡아다가 장을 쳐서 보냈다.
12월 7일 독고리에 사는 투작 초군 수십명을 잡아다 모두 중장을 쳐서 보냈다.
12월 19일 향탄산을 적간한 하인배들이 와서 낫 수십자루를 바쳤다.
12월 23일 어제 봉은사 승려가 소나무를 투작하다가 박참봉에게 붙잡혔다.
이들 투작 중에는 촌민들이 풀을 베거나 땔나무를 하는 가벼운 사건부터 상업적인 전문 초군(樵軍)들의 사건들까지 다양하였다. 투작의 내용에 따라 처벌도 달라지고 있는데, 낫으로 풀을 베는 가벼운 경우에는 낫을 빼앗는 정도에서 마무리되었으나 땔나무를 하는 경우에는 태와 장, 나무를 베는 심각한 경우에는 중장으로 다스렸다.
특히 7월에는 인근의 헌릉(獻陵)에서 투작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에까지 알려져 문제가 되어 단속을 강화하였다.
헌릉 봉사(奉事)가 능졸과 결탁하여 나무를 베어다 가 팔아서 사용하였는데, 그 사실이 발각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붙잡혀간 것이다. 김두벽은 7월 14일에 그 소식을 듣고, 정릉에까지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염려되어 당장 그날로 신 선달을 보내어 관할 구역 안을 적간하게 하였다. 그런데 우려했던대로 투작한 곳이 상당히 많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곧바로 하인배들을 동원하여 투작인을 찾아내는데, 그 과정을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제 하인배들을 시켜 인근 마을을 수색하게 하였더니, 와서 말하기를 “무동에 사는 세 사람 집에 벽골신송목(辟骨新松木)이 있다”고 한다. 패를 내어 잡아오게 했더니, 남자들은 모두 배를 타고 나갔고, 노파 세 사람이 왔다. 그래서 진술을 받고 남정들이 들어온 후에 다스리기로 하고, 하인배 5, 6인을 장을 쳤다. (『지문일기 』 1709년 7월 16일)
이처럼 투작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인근 마을까지 수색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투작사건이 재발하였다. 7월 24일에 하인배들에게 나누어 맡긴 곳에서 어린 소나무 10여 그루가 투작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는 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던 하인 귀중(貴中)을 잡아다 장을 치고 투작인을 잡아올 것을 엄명하였다. 이틀 뒤에 투작인을 잡아와 중장으로 다스렸다.
투작은 그가 정릉에 있던 동안 계속 발생하였고, 투작인을 잡아다 엄하게 다스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재발하는 골칫거리였다. 투작은 관리가 엄격한 왕실의 능에서도 피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능참봉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인 추세였다.
2) 동료 능지기의 투작 사건
심 지어는 능역을 수호해야 하는 능지기가 투작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1709년 7월 헌릉 봉사가 능졸들과 결탁하여 나무를 팔아먹은 사건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는 헌릉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었다. 정릉에서도 동일한 사건이 발각되어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다.
김두벽의 상관 황봉사(黃奉事)가 근무 중에 나무를 베어 팔아먹은 것이다. 그가 황봉사의 투작 사건을 처음들은 것은 출번으로 고향에 내려 갔다가 다시 정릉으로 돌아온 지 한 달 쯤 지난 1710년 6월 28일이었다.
낮에 조카 윤봉조(尹鳳朝)가 편지를 보내서 정릉에 대한 여론을 끝내 막을 수 없다는 뜻을 알리면서, 나더러 진술서를 받아 논보하면 죄를 면할 수 있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참으로 옳지 않다. 어찌 가볍게 동료의 실수를 보고하여 죄를 면할 것을 도모할 사람이 있겠는가?
우습다. 오후에 미정동에 가서 윤 조카와 성응을 불러 셋이서 논의하였는데, 그 실수는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니 동료 대관에 잘 말해서 탄핵이 일어나지 않게 무마해 달라고 힘써 얘기하였다. 윤 조카가 허락하고 돌아갔다. (『지문일기 』1710년 6월 28일)
조카는 탄핵이 있기 전에 먼저 사건을 정확히 조사하여 보고하면 그는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죄를 면하기 위하여 동료의 실수를 먼저 보고하는 것은 사대부로서 올바른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도성에 들어가서 조카를 설득하여 대간들에게 청탁을 넣어서 사건 자체를 무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간에서 탄핵을 준비하는 동안 그 소문은 이미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서 사대부들이 모이는 자리에 화제 거리로 떠올랐다. 서울 친지들도 정릉에 있는 김두벽에게 계속적으로 정보를 보내왔다. 그러나 김두벽은 자신이 죄를 면하기 위하여 동료의 잘못을 보고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결국 탄핵을 막지는 못하였다.
결국 7월 16일 대간에서 황봉사를 탄핵하였고, 그날 저녁에 황성응이 탄핵 내용을 편지로 알려왔다.
정언 신사철이 왕에게 아뢰기를 “원릉(園陵)의 사체는 지극히 엄중하여 비록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의 하찮은 것이라도 훼손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국왕께서 신칙하신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니 능지기는 더욱 마음을 다하여 수호하여 직책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정릉은 멀지 않은 곳이며 수 백 년 동안 잘 기른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있습니다. 근래에 입직한 관리가 예조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많은 나무들을 베어내어 판자를 만들어서 혹은 팔아 이득을 취하고 혹은 말에 실어 서울로 보내니, 소문이 시끄럽고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일이 한심한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엄히 조사를 하여 각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능관을 잡아다 조사하여 죄를 주고, 당시의 수호군인 및 판자를 만든 목수들도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죄를 주게 하십시오” 하였다.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여라” 하였다. (『지문일기 』1710년 7월 16일)
당시 능관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관할 구역의 나무를 베어다 파는 행위가 관행적으로 자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황봉사가 죄를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오히려 김두벽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황봉사는 작목한 이유를 측간 및 집사청의 문간을 개조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원정(原情)을 내어 김두벽에게 죄를 전가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사건은 곧바로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화하였다. 의금부에서 사건을 담당하였는데 8월 20일야 판결이 이루어졌다.
오후에 선릉에 가서 종일 담화하고 밤이 깊은 후에 재소(齋所)로 돌아왔다. 능의 하인배가 서울에서 와서 말하기를 “어제 의금부에서 모임을 열어 황봉사 일을 의논하여 왕에게 아뢰었는데, 내용은 형조의 계목(啓目)을 보십시오” 하였다. 계목을 보니, ‘각 사람들의 진술이 이전 진술과는 구구절절이 모두 상반되니, 황봉사가 변명하여 꾸민 실상이 극히 통악스럽습니다. 거리의 원근과 소나무의 생사는 원래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령 말라죽은 나무가 수백 보 밖에 있다해도 급히 담당 관청에 보고하지 않고 임의로 작벌한 일은 극히 통악스러운데, 하물며 자기 집으로 수송하였으니 팔아먹은 일이 없다해도 삼가지 않은 죄를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로써 조율(照律)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지문일기 』 1710년 8월 21일)
의금부의 결정은 황봉사가 나무를 팔아먹었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황봉사는 장 100에 충주 가흥으로 정배되었고, 능졸 이계웅 등 은 장 80에 직산으로 도배(徒配)됨으로써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후임으로 새문 밖에 사는 이덕소가 임명되어 9월 8일 정릉에 도착함으로써 정릉은 정상화될 수 있었다.
정릉 사건을 계기로 예조에서는 왕릉에 대하여 일제히 점검 작업을 실시하였다.
각 능의 공좌부를 가져오게 하여 근무 상황을 점검하고, 예조에서 직접 낭관이 파견되어 각 왕릉에 대한 적간을 실시하였다. 또한 김두벽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마음 고생이 매우 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교대하지도 못하고 장기간 근무를 계속해야 했다. 5월 30일에 입번하였다가 117일, 약 4개월을 계속 정릉에서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그는 후임자 이덕소가 정릉에 도착한 9월 8일에야 출번하여 고향에 내려갈 수 있었다.
3. 땔나무 청탁과 선물
김두벽은 일련의 투작 사건을 겪으면서 투작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왕릉에서 생산되는 땔나무, 숯, 횃불, 말꼴[馬草] 등 산림 생산물을 사적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도성에 사는 친지들에게 수시로 땔나무, 숯, 말꼴 등을 실어 보냈다. 그가 1709년 한 해 동안 친지들에게 보낸 선물 및 친지들의 청탁으로 보낸 산림 생산물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709년 땔나무 선물 및 청탁 상황>
날짜 / 선물 및 청탁 내용 / 전체 횟수
1709년 5월 숯 1가마, 말꼴 1가마, 땔나무 3회, 말꼴 2회, 횃불 1회 7
6월 출번 중
7월 땔나무 1회, 말꼴 3회 3
8월 땔나무 1동 2태, 말꼴 3태, 시초 1태, 숯 1회, 말꼴 2회, 횃불 1회 7
9월 땔나무 1동, 숯 3가마, 썩은 목재 2태, 땔나무 1회, 숯 1회, 마초 1회 10
10월 출번 중
11월 숯 18가마 8말, 낙엽 2동, 고시(枯柴) 여러 조각, 땔나무 1회, 약간 1회, 숯 1회 25
12월 숯 5가마 5말, 땔나무 3태 3속, 썩은 나무 1뭉치, 땔나무 7회, 숯 1회, 낙엽 1회, 땔감 1회 22
총계 74회
부임한 직후부터 친지들의 요청이 쏟아졌다.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그는 1709년 5월 15일에는 친구들의 청을 모두 거절하고 물리치기로 결정하였다. 실제로 다음날 전임관이었던 정 봉사(奉事)가 노비를 보내 말꼴을 베어가려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친지들의 요청을 모두 들어줄 수도 매정하게 거절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겨울철이 되면서 숯과 땔나무를 구하러 오는 사람이 더욱 급증하였다.
이 기간의 수치가 1개월에 25회, 22회로 급증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데, 날씨가 추워져서 난방용 수요가 급증하였기 때문이었다. 11월 6일 일기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침부터 숯을 구하는 사람들이 답지하였다. 이공서, 김차산, 황내가, 이천장, 장내가, 이귀천 들에게 각각 1가마씩 주었다. (『지문일기 』 (1710년 11월 6일)
그는 급증하는 땔나무와 숯에 대한 요청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청을 들어주었다.
비축해 둔 것이 없어서 주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이 안타까워하였고, 숯이나 땔나무를 주지 못하면 낙엽이라도 실어 보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봉은사에서 빌려다 주었고, 자신이 쓰려고 아껴두었던 숯을 내어주기도 하였다.
그가 물품을 실어 보내는 곳은 대부분 도성 안에서 관직 생활하는 관료층이었다. 친지들에게 보내는 선물과 그들의 청탁이 빈번하였던 것은 정릉의 위치가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면 여주의 영릉으로 옮긴 후에는 정릉에서처럼 빈번하게 친지들에게 산림 생산물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능역에서 생산되는 땔나무, 숯, 마초 등을 친지들에게 보내면서 그 스스로 불법이라고 생각하거나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청탁을 받았는데도 쌓아둔 것이 없어 주지 못할 때에는 안타까워하였고 다른 곳에서 빌려다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능관이 산림 생산물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었으며, 관례적으로 행해지던 관행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산림 생산물을 어느 정도 사적으로 사용하면서 친지들에게 보낼 수 있었던 점도 능참봉이 누렸던 관직상의 특성이자 현실적 권한이었다. 이러한 권한을 통하여 능참봉은 평소에 친지들에게 혜택을 베풀고 인망을 얻어 인적 관계를 공고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는 그가 관료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황봉사의 투작 사건으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친지들로부터 계속적으로 정보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인적 관계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김두벽가의 가계도>
<1709년 땔나무 선물 및 청탁 실태>
날짜 / 보낸 곳 / 청탁에 응한 곳 / 보낸 물품 및 내용
5월 4일 서울 숯 1石
5일 부동 제사후 남은 횃불
10일 부동 巡山에서 잡은 땔나무
10일 부동 땔나무, 馬草
15일 尹書房宅 마초
16일 아현 윤서방댁 마초 1石
16일 前官 鄭奉事 尹新寧을 통해 마초를 구했으나 물리침
20일 부동 땔나무, 마초
5월25일~6월 24일 出番 기간
7월 5일 부동 마초
8일 부동 땔나무, 마초
10일 부동 마초
8월 2일 仲明 마초
6일 李大來 땔나무 1同
6일 汝謙 땔나무, 마초 각 1駄
7일 조카 寅慶 땔나무, 마초 각 1駄
7일 조카 麟慶 마초 1駄
8일 李大來 마초, 숯, 횃불
27일 아현 黃棘人家 柴草 1駄를 줌
9월 1일 아현 黃棘人家 숯
1일 崔臨陂家 炭石
1일 崔臨陂家 朽材 2駄
4일 趙尙書 鄭禮山宅 숯 2석
4일 아현 황서방댁 땔나무, 숯
13일 李憲章 땔나무, 마초
14일 부동 땔나무, 마초
16일 黃汝文 땔나무 1同
18일 乧忠 馬草
9월24일~10월 25일 出番 기간
11월4일 黃禹河 숯 1석
<1709년 땔나무 선물 및 청탁 실태1>
6일 李公瑞, 金次山, 黃內家, 李天章, 張內家, 李貴賤 숯 각 1석
7일 新門밖 別坐宅 땔나무, 숯
8일 柳道輝 숯을 구했는데 없어서 落葉을 보냄
9일 新門밖李判書宅 숯 1석
10일 安書房宅 숯 5斗, 땔나무 약간
11일 부동 낙엽 1同
11일 部洞 權進士 숯을 구했는데 남은 것이 없어 봉은사에서 숯 3두를 빌려다 줌
15일 祭官 鄭, 李 숯 각 1石
17일 次生 숯 1石
18일 權叔彬 형제 숯 각 1石
18일 金仲明 낙엽 1同
19일 沈進賢 숯 1石
19일 崔奉事家 숯 1石
24일 安妻 柴炭을 구했는데 남은 것이 없어 안타깝다
25일 李安山 숯을 구해 봉은사에서 1石을 빌려다 줌
26일 金憲章 숯 1石
26일 趙尙書家 숯 1石
29일 再從 李必明家 숯 1石
30일 公瑞 枯柴 數片
12월3일 黃判書宅 숯 1石
3일 金仲明 숯 1石, 땔나무 약간
4일 公瑞 谷草 15束, 朽木 1塊
6일 時萬 片柴 1駄
9일 奉事 李廣叔 숯 8斗
9일 李叔馨 숯 7斗
10일 叔兼 朽木 약간
11일 부동 片柴 1駄
12일 時萬 땔나무 얻어가러 옴
13일 부동 땔나무
13일 苧洞 黃生 樵조선후기 능봉참의 관직생활과 왕릉수호 : 김두벽의 지문일기 • 131
14일 저동 김헌장가 谷草
14일 봉은사 李生 땔나무
15일 高陽 누님댁 숯 1石
16일 李斯立, 爰立 숯을 구했는데 없어서 歲時에 쓰려고 둔 숯 1石을 이사립에게 보내고, 片柴를 원립에게 보냄
18일 趙伯 片柴 3束
18일 압구정 奉事 李仁老 松柴 1駄
20일 黃叔久 부처 落葉, 도끼, 빗자루
22일 李台家 柴炭
23일 李台壽 숯을 구했는데 쌓인 것이 없어 못보냄
23일 苧洞人 朽柴
24일 黃如文 숯을 구했는데 쌓인 것이 없어 못보냄
28일 金憲章 땔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