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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지금도 나는 정치학도
2007. 10. 6.
나는 정치학도입니다.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정치학도이기는 하지만 치국안민에만 관심이 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마음을 다스리는' 정치학도입니다.
42년 전 내가 정치학과에 입문한 것은
돌아가신 어머님이 하시던 기도에서 늘 말씀하시듯이
‘나라의 큰 기둥, 큰 일꾼, 큰 재목'이 되어
'부국강민의 나라'을 이루어 보자는 염원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참고:경희궁터에 자리) 넓은 교정 뒷산에 오르면
왼쪽으로는 듬직한 바위산인 인왕산과 삼각 바위산인 북악산 사이로
길게 누은 북한산 남쪽 능선이 보이고
그 선 위에 비봉과 문수봉이 뚜렷이 솟아나 보였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는 서울시내 중심가의 빌딩숲과
빌딩숲에서 돋아난 지붕들이 내려다 보이고
그 곁으로는 애국가로 각인되어 있는 남산도 가까이 다가와 보였습니다.
나는 점심 때가 되면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고나서,
반 친구와 함께 뒷동산 오솔길을 걸었고
뒷산에서 가장 높아 앞이 확 트여보이는 언덕(국립기상대 바로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계사 속의 걸출한 영웅, 뛰어난 재상들과 정치가들을 논했습니다.
각자의 흉금과 포부를 도도하게 펼쳐냈습니다.
나는 군인 한니발과 나폴레온이 좋았습니다. 징기스칸과 알렉산더가 좋았고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좋았고
파이오니어와 프론티어를 외치는 케네디가 좋았습니다.
나는 육사에 가고 싶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 가고 싶었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 소원으로 전국 대학에서 경쟁율과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던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에 입문했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라의 귀중한 기둥이요 일꾼이 되려는 눈으로 사회를 봤습니다.
재수하는 1년 동안 3.24와 6.3으로 구속되어 재판받는 대학생들이 읽었다던
압수서적 '모택동사상'도 읽었습니다.
입학한 해에도 4.19 기념행진이나,한일협정 비준반대 데모 때에도
선배 동학들 보다 한발 앞서 걸었습니다.
선배들이 걸었던 대로를 걸었고
최류탄에 맞서 돌도 던졌습니다.
문리대 사회과학 핵심써클에도 끼어 들었습니다.
일찌기 졸병으로 군대에 갔으나
졸병생활에서나마 틈이 나는대로 '제갈량 심서'와 '황석공 소서'
그리고 '천하통일병략군략총서'도 읽었고
제대하여 복학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경제는, 사회는 '혼자''많이 가진' 기득권자들의 독무대였습니다.
권력은 철저히 그들의 손아귀에만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이익과 배치되는 세력이라면
사회주의는 물론 민주주의라 해도 그들의 철저한 적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자리, 국민들의 자리, 서민들의 자리,
농민과 노동자들의 자리는 사회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도시 서민들의 생활, 농촌 농민들의 생활,
공장과 광산 노동자들의 생활현장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생활현장에서 그들을 보려했고,
그들의 아픔과 고뇌를 함께 느끼려 했고,
그들의 삶의 눈으로 책을 보았고,
그 속에서 역사와 세계를 보았고,
가진 나라 미국보다는 대륙 인민의 나라 중국을 보았습니다.
베트남을 보았고, 큐바를 보았고, 소련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꿈 나의 희망 나의 길을 키웠습니다.
드넓은 만주 평원을 피로 물들인 선렬들의 장쾌한 독립운동도 보았습니다.
그러노라니 이제까지 내가 알아온 우리의 역사는
가진 자, 지배자 중심의 궁중(宮中)역사일 뿐이었습니다.
내가 본 나라와 겨레의 뿌리,
우리 민중의 역사는 늘 붉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문리과대학 정치학도로서의 삶이었고 관점이었고, 교우관계였습니다.
민중의 역사와 민중의 삶 속의 젊은 정치학도로서
나는 미국과 서양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강의보다는
거리에서 민중 속에서 막걸리 앞에서 정의파 학우들과
혁명의 노래를 불렀고, 시를 읊었으며,
이불 속에 후랫쉬를 켜놓고,
숨죽여 '오적'과 '금강'을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새 사회건설의 의지를 불태웠고,
그곳에서 나의 뜻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서민의 바다, 노동자들의 땀의 현장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평생을 그들의 삶과 함께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싸우면 나도 싸움 속에 죽어도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졸업직전인 겨울방학 때부터 주물공장의 용접공으로 지냈고,
광산으로 들어가 막장 후산부로 일했고,
친구의 불찰로 인해 '반공법'으로 감옥생활도 했지만,
석방후 잠시 출판사에도 있다가
다시 철공소의 철공으로 지냈습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주최로 실시한
'노동조합 중간간부 노동교육'에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노총이 발주한 ‘한국노동조합의 노동조합 교육활동의 총체적 연구’에 참여한 인연으로
7년 7개월 11일 동안 7개공장 1만여명의 조합원들로 조직되어 있는
대기업 대공장 노동조합의 전임 기획실장으로
노동조합의 대장인 지부장과 사무국장 곁에서 노동조합의 일상활동을 도맡아 하다가
민주의 큰 힘 큰 흐름이 군부의 총칼로 인해 한풀 꺽여야 했던 80년대 초인
30살 중반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노동조합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후 군부독재의 서슬 아래에서도 월간 노동잡지의 편집장으로
월간지를 28차례(28개월)나 만들어 냈습니다.
만들어 낼 때마다 언제 잡혀갈지 몰라 남몰래 마음 졸여야 했습니다.
노동조합 활동 말기에 잠깐 동안이나마
이스라엘에서의 협동과 노동조합 국제교육과정에 참여하여
세계사의 숨찬 현장이자 십자로, 이스라엘의 사막 한 가운데에서
병정들이 보던 밤 하늘과 풀한포기 없는 누우런 허허벌판,
헐벗은 황색빛 계곡을 보았고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 그리고 사해에도 누워보았습니다.
눈 감고 귀 기울여 사막의 한가운데를 누빈 병정들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 했습니다.
이스라엘 여기저기에 심어진 협동조합의 마을 '키부츠'는
움추려 있던 내 마음 안에
자본주의 하에서도 이상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꺼지지 않는 꿈과 이상의 불씨를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만에 맛본 현지에서의 자유의지는
현지 끄나풀의 그릇된 제보로
느닺없이 백주대낮에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무력으로 무릅 꿇리우고 문초당하기도 했습니다.
한동안은 학생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경찰서의 철창신세도 져야 했습니다.
군부독재 말, 어쩌다가 야당의 노동정책전문위원이자 수석전문위원의 생활도 했습니다.
연장 선 위에서 여당의 전문위원이자 국회정책위원생활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민중과 노동자의 삶 속에서 떠난
이국(異國)의 땅 국회와 정당의 노동정책 전문가로서의 삶은
운 좋게도 내가 그 자리에 선택될 수 있었을 뿐
나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거대한 정치조직의 메카니즘 속에 매너리즘에 빠져들었고,
보면 볼수록 나는 큰 역사의 물줄기에서 한 모퉁이에 멈추어 있는
아주 작고 초라한 한 점(點)일 뿐이었습니다.
정치학도로서의 학창시절과 땀과 피로 얼룩진 노동현장에서 꿈 키우던
파이어니어, 프론티어, 볼룬티어의 생활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것의 연장선 위에서 고위공무원으로 두 지방노동위원회의 위원장으로도 지냈지만,
이것 역시 나에게는 허세요 허례였습니다.
그후 시민자원봉사활동의 중심에 자리틀고 활동하기도 했지만.
명칭이 자주적 시민활동일 뿐
물주는 어디까지나 지방정부였기에 주인은 지방정부였지 내가 아니었습니다.
살아 숨쉬는 민중의 현장, 나의 삶의 궁극적 이상에서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군생활 포함, 8 년만에 '내 자랑'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사회 속의 정치학도로서
공장 노동자와 막장 광부생활로부터 7여년간의 대기업 노동조합의 기획실장
그리고 이 경험이 바탕이 되어 현장 노동전문가로서
정당의 전문위원이자 국회정책연구위원으로서의 국가정책수립과 집행과 관리의 감시자로,
별정직 고위 행정관료인 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이어 광역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은 시민자원봉사센터의 소장으로 있었던
세월과 시간을 모두 모으면 훌쩍 30년이 넘어 섭니다.
30여년 동안의 나의 생활은 좀처럼 남이 겪기 어려운 생활이었슴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초지일관 노동자와 시민의 정서에 가까이 할 수 있었던 점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꿈, 나의 공동체생활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주인은 자본이었고 권력이었기에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 시대를 훌쩍 뛰어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학도로서의 진정한 나의 꿈은 결코 '복많은' 봉급생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33년 삶의 역사도
모두가 현실 사회 안에서의 '정치학도'의 삶이었고
지울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슴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정치학과에 입문하고자 노력한 1년 동안의 재수생활,
동숭동의 정치학도로서의 8년 생활, 감옥생활,
사회 안의 정치학도로서의 현장 노동자생활, 노동조합 기획실장
우연한 기회로 얻어진 고급 공직자 생활 등
33년을 모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지나간 일입니다.
그것은 나의 역사와 나이의 삶의 한낱 파노라마일 뿐
지금의 나의 생활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일들입니다.
지금의 나의 삶은 오로지 내 방식 내 선택의 삶과 철학으로
새로운 정치학도의 면모로,
팔팔하게 팔팔(88살)까지 살기로 작정되어 있습니다.
손에 거머쥔 것 없지만, 청빈과 소박함으로
소박함은 질박함으로
그러나 마음만은 풍요롭게 살기로 했습니다.
일찌기 때이른 자유인 자연인 되어
대지와 흙과의 어울림과
대자연과 대우주와의 교감 속에
지금은 자유인 자연인으로서의 나만의 철학이 이룩되어 있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내 안에도 세 가지 세계가 숨쉬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세계입니다.
우주는 무한히 넓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지구가 속한 태양계, 태양계가 속한 은하수,
그 은하수에는 2000억개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2000천억개의 별로 구성된 은하수가 또 2000억개가 있다고 합니다.
우주에는 얼마나 별이 많고, 그 별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얼마나 광대 광활합니까.
그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작고도 작은 존재입니까.
인간은 얼마나 많은 우주의 작은 원자들로 채워진 존재입니까.
또하나는 마음의 세계입니다.
나의 마음은 바로 내 앞에 우뚝하니 버티고 있는 바위철벽이라도 찰라간에 뛰어넘어
당장이라도 드넓은 태평양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광풍노도 때로는 부드러운 바람, 찬 이슬과 풀꽃 향기로
우주 대자연의 노호와 신비를 느낍니다.
내 마음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 마져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입니다.
오묘극치의 자연현상도 담을 수 있고,
희로애락도 담을 수 있고,선과 악도 담을 수 있고, 사랑과 증오도 담을 수 있습니다.
시간마져 담을 수 있습니다.
나의 육체는 작고도 작지만,나의 마음은 얼마나 크고 오묘한 그릇입니까.
나머지 하나는 영혼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갖가지 종교의 창시자가 말한 것에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농촌의 일각에서 자연과 어울려 확립되어진 나만의 관점이요 철학입니다.
영혼의 세계가 있기에 나는 어제 돌아가신 어머님 아버님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역사상의 영웅호걸 시인묵객 성인성현과도 이야기 합니다.
동문님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이러한 세 세계를 내 안에 갖고 있습니다.
이제 정치학도로서의 나의 관심은
이러한 나만의 육체의 세계, 마음의 세계, 영혼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의 구현이 예술의 세계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당면된 나의 삶은
나의 몸을 닦고,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나의 영혼을 빚고, 나만의 예술혼을 낚는 일입니다.
이를 생업으로 여기고
이를 이루기 위해 나는 하나님이 빚었던 흙을 빚는 일
일년계획으로 도자(陶磁)일에 발을 들여놓은 지가 한달이 되어갑니다.
호불호(好不好)로서가 아니라
나는 지금도 영웅호걸의 기상, 시인묵객들의 시상, 으뜸 과학자의 이상
인류의 위대한 스승, 성인성현들을 묵상하는 속에
흙 속에 묻혀사는 숲속의 현역화가인 아내의 도움으로 한 종교에 입문하였고,
자유의사 자유의지로 그 앞에 무릅을 꿇고 두 손을 모읍니다.
나의 종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쩌다가 산사(山寺)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차디찬 마루 바닥에 무릅꿇고 앉아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노라면
마음이 저밉니다. 눈물이 솟아납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발길로 길들여 있는 소나무 숲 오솔길에 들어서서
내 스스로 만들어낸 기운동을 하며
우주와 자연의 에너지를 느낍니다. 호흡합니다.
찰라간에 지나가는 좋은 생각을 낚아채어 되색임 합니다.
숲속의 물기를 모아 만든 옹당샘에서 물목욕을 합니다.
나를 다스립니다.
정치학과를 나왔슴이 천만다행입니다.
문리대 정치학도로서 사회운동을 하였으니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
정치학도로서 나라의 중심에서 생활하여 보았으니 또한 다행한 일입니다.
정치학도로서 때 이른 자유인 자연인 되어 흙도 만져 보고,
대지와 자연과 우주의 바람과 향기도 맡아보았으니 더욱 더 다행한 일입니다.
생활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아쉬운 점도 많지만
지금까지 모아놓은 것 없으니 더욱 다행스런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정치학도였기에 가능했다고 나는 봅니다.
확신합니다.
나는 이제 일심정념으로 도예를 익힙니다.
도시락을 싸매고 들길을 걷습니다.
신작로에 들어서서 시골버스에 오릅니다.
대인(大人)의 면모를 갖춘 후배 도예가의 지도로
외떨어진 시골 작업장에서 홀로 도예를 익힙니다.
흙을 빚습니다. 나를 빚습니다.
작업장에서의 모든 일이 나에게는 공부입니다.
10년이나 연배가 적은 나의 선생은 긴 말 하지 않습니다.
달인의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책을 보지 말라고 합니다.
가능한 한 옛 친구도 만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역시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끊었습니다.
선생은 작업장을 직장처럼 여기고 시간을 철저히 지키라고 합니다.
간혹 한두 마디 도움되는 말을 할 뿐 일일이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냥 내쳐 둡니다.
주저없이 청소도 시킵니다.
말을 안해도 나는 선생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제는 말 안해도 나는 합니다.
손가락 끝에 흙감이 잡혀갑니다.
지금 나는 흙을 빚는 게 아닙니다.
나를 빚는 것입니다.
나와 후배선생과는 아침이면 차(나는 커피)를 앞에 놓고 웃음으로
선담과 덕담도 나눕니다.
대화를 통해 얻어지는 게 많습니다.
때때로 나는 가까이 있는 깊은 자연의 계곡,
카톨릭 성지(聖地) 미리내의 일을 도웁니다.
몇 사람과 '이땅사랑'이란 모임도 갖습니다.
'바인(바른 사람의 모임, 칡얽힘, 와인 등의 뜻이 함축되어 있고
별칭 '바사모'라고도 할 수 있겠슴)도 있습니다.
도예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지만
흙빚음을 통해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시 봅니다. 다시 일굽니다.
나를 봅니다.
내가 나를 키웁니다.
홀로 키웁니다.
나는 지금 흙을 빚습니다. 나를 빚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세계도 조금씩 조금씩 빚어 갑니다.
오랜 후에는 내 마음 속의 나의 우주와 나의 벗 자연의 향기와 바람을 빚을 겁니다.
나의 영혼을 빚을 겁니다.
흙빚음으로 나를 발언할 겁니다.
정치학도로서 말입니다.
나는 지금도 정치학도입니다. 문리과 대학 정치학도임을 자랑합니다.
나는 정치학도로서 많은 세월, 국가와 사회와 노동자를 빚으려 했지만,
지금 나는 모든 것을 접고
나를 빚습니다.
다스립니다.
정치합니다.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도 나는 정치학도일 것이고,
정치학도임을 자랑할 것입니다.
정치학도로서 나는진정
지고지순한 예술의 세계를 사랑합니다.
도예를 생업(프로)으로,
도예로 '우주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빚어낼 것입니다.
도예로 정치학도임을 자랑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앞으로도 20년이란 소중한 시간이 있습니다.
'팔팔'하게 살도록 사생결단(?) 용맹정진(?) 할 것입니다.
멀리 동쪽 차령산맥 큰 줄기 칠장산 위로 찬란한 아침해가 솟습니다.
맑은 날이면 쌍용산 바로 위로 북극성이 보입니다.
춘분 추분이면 보개산 삼각꼭지 위로 태양이 솟아오릅니다.
나의 집은 마을 한쪽 언덕진 곳 안성땅 비봉산 끝줄기에 돋아나 있습니다.
나의 곁에는 솔 숲 솔 바람도 있고,
나의 마음에는 사랑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흙으로 나를 다스리고
흙으로 나의 마음과 영혼을 빚을 겁니다.
나의 몸을 닦아내고,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나의 영혼을 빚어내고,
예술을 낚아 낼 것입니다.
정치학도로서
예술과 삶의 면면을
흙으로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빚고
인간은 하늘을 빚고
또한 예술과 문명을 빚네요.
나는 과거에도 정치학도였지만
지금도 나는 분명히 정치학도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