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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이다. 원래 김주원은 각간(角干)으로 시중(侍中; 신라 최고 관직) 겸 병부령(兵部令; 군사 총책임자)를 지냈다. 785년(신라 선덕왕 6년) 선덕왕이 후손이 없이 죽자 군신 회의 끝에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으나 경주의 알천 북쪽 20리 밖에 살던 김주원이 갑자기 큰비가 내려 알천을 건널 수 없어 입궐을 못하였다. 이에 군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다" 하여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 원성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가 개인다음 그가 대궐에 들어가자 원성왕은 그에게 즉위 할 것을 권유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에 내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하고 명주(溟州: 강릉), 익령(翼嶺: 양양), 근을어(斤乙於: 평해), 삼척, 울진 등을 식읍으로 하사 하였다. 김주원은 명주성을 쌓고 영동일대를 통치했으며 이에 따라 후손 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하였다. (참고 : 삼국유사, 삼국사기) 능묘(아래 사진)는 강원도 명주군 성산면 보광리 삼왕릉에 있으며 강원도내에서 알려진 유일한 신라시대의 대묘이다. 실전되었던 것을 조선 명종때 후손 김첨경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으며, 1971년 강원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묘는 전후 2기로 되어 있고 묘앞에 명주군왕 김주원묘라고 새긴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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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번영 김주원은 김종기(金宗基), 김헌창(金憲昌), 김신(金身)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김헌창은 헌덕왕 때 공주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전라, 충청도 지방을 점령했으나 실패로 끝나 자결했다. 첫째 아들 김종기의 손자 김양(金陽)은 838년(민애왕 1년)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죽게하고 왕위에 오른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으로 추대하고 각간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초 명주(溟州)장군으로 끝까지 항거하다 왕건에게 설득을 받고 왕건에게 협력하여 후백제 정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대광(大匡)에 오르고 왕씨 성을 하사 받았으나 조선개국 후 왕씨가 탄압을 받자 원래 성인 김씨로 환원하였다. 9세손 김상기(金上琦)가 고려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인존(金仁存)은 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고려 인종 때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대표적이다. 1435년(세종 17년) 성균관 부근에서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신재(神才)로 불리워진 그는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四方分)" 그가 5세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40여 년간 대사성을 지낸 김반(金泮: 후손을 강서김씨라 함)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상(尹詳)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21세 때인 1455년(단종 3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며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 9년)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2남)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1468년(세조 13년)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서기 1481년(성종 12년)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마쳤다. 사예(司藝) 김충정(金忠貞)의 아들 김첨경(김添慶)은 1549년(명종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어사(御史), 부수찬(副修撰), 지평(持平) 등을 거쳐 1561년(명종 1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史)로 나갔다가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외 감찰(監察) 김종윤(金宗胤)의 아들 김충렬(金忠烈)이 중종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 경기도사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館: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예조 판서 김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김시혁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김시환(김始煥)과 김시형(金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년(광해군 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한 김기종(金起宗)은 김철명(金哲命)의 아들로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 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무훈을 세워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호조판서를 지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대사간(大司諫),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 예조, 호조(吏禮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김상성(金尙星)과 영조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서 봉조하(奉朝賀)가 된 김상익(尙翼), 예조(禮曹) 및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김상적(金尙迪)이 유명했다. 김시현(金始炫)의 아들 김상중(金尙重)은 영조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 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김상집(金尙集)과 학자로 유명한 김홍운(金鴻運),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김상철은 1775년(영조 5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우의정(右議政)때 편집청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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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너무나조은자료올려주셔서----
지산군파38세손입니다.감사합니다.
질문 카페지기님 평의공 감찰공 (21세손인 자자 현자) 쓰는 파는 보이지 안네요. 봉화종중문회 김종기배상.
청풍파 37세 손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백동파 37세손 입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뿌리에관심이 없는거같아 아쉽습니다.38세손임돠.지산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