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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느 상엿소리꾼보다 구구절절한 사설과
판소리 기본을 바탕으로 앞소리를 잘 메기고
상여 행렬의 분위기를 잘 잡는 덕분도 크지만 말이다.
"젊은 시절엔 너무 쪼끔(조금) 내놓으면
상주나 호상한테 더 주라고도 혔지만,
이젠 안 그려.
우리 동네서 2등 가라면 서러울 만큼 사는데
돈 욕심낼 필요없잖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한테는 꽁껏으로(공짜로) 해 주기도 허제."
그는 ‘공연료’에 대해 “요즘엔 얼마 주라는 말을 절대 안 하고,그냥 주는 대로 받는다”고 덧붙였다.
보통 상가(喪家)에서는 30만~50만원을 준다.
부자 집들은 100만원씩 쥐어 주기도 한다.
"근동에서 알만헌 사람은 다 나를 앙께(아니까)
상을 당하면 부르지.
글구(그리고) 조문객들이 내 소리에 반해 전화번호를 받아갔다
나중에 자기네 집안에 일이 생기면 연락을 허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웃에게서 쌀을 얻어다
사잣밥을 지었을 정도로 집이 가난했던 그는 열일곱살 때 판소리를 맛보는데,
이것이 상엿소리 선소리꾼으로 먹고 사는 데 큰 밑천이 됐다.
‘보성소리’ 완성자로 평가받는, 보성군 회천면 도강리 송계 정응민 선생의 집에 들어가
1년 동안 ‘동냥’ 소리 공부를 한 것이다.
김씨는 “돈을 낸 사람은 방안에서 배왔고,
나 같은 사람은 쇠죽 끓이고 농삿일 해 주며 서럽게 배왔제.
남들 배울 때 곁에서 어깨 너머로 듣고 따라 해봄서 말여.
” 그리고 그는 장터나 동네에 약 장수들이 와 노래하고 만담을 하면,
세심하게 듣고 본 뒤 집에 와서는 흉내를 내보고 살을 더 붙여 연습해 봤다.
원래 끼가 있던 터라 소리와 입담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상여 앞잡이로서는 ‘아주 어린’ 스물일곱에 데뷔를 했다.
그는 스스로 “내 재주가 상엿소리를 빼고도 여섯가지”라고 자랑한다.
“판소리를 할 줄 아는 디다, 꽹과리·북·장구를 잘 갖고 노니께 네가지요.
만담 잘 하고, 재미진 말로 좌중을 휘어 잡으니 여섯가지나 되제.안그려.”
그는 “꽃시절(젊고 잘 나가던 시절)엔 만담 잘 한다고 널리 소문나,
장소팔씨가 고춘자씨와 함께 호남지방에 공연을 오면 나를 오라고 불렀고,
무대 위에 세우곤 했다”고 했다.
그는 나이와 경륜이 쌓이면서 ‘보성 명물’로 떴고,
심금을 울리는 소리와 마음을 휘어잡는 재담 덕에 상엿소리꾼으로 인기를 끌었다.
잘 나가던 시절에 한달에 열댓번은 보통이요,
많게는 스무번 넘게 ‘출장’을 나갔다.
초상집이 쌍립하면, 서로 자기네 상가에 와 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상엿소리를 하면서 남의 집 품도 팔아 식솔들을 먹여 살렸다.
그 식솔이 부모와 부인,자녀 4남2녀에
여·순사건과 연루돼 숨진 큰형의 아들 둘과 장애인 누이동생까지 무려 열두명이었다.
그는 요즘은 한달에 너댓번 일을 한다.
일반 초상집 말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제나
여수·순천사건 희생자 위령제 같은 행사에 초대받기도 한다.
“고되니까 이젠 그만두라고 자식들이 성화여.
어려서부터 오른쪽 귀는 먹통이고,
왼쪽 귀로만 들으니께 몇시간씩 소리를 하고나면 귀가 무지 아프당께.”
그는 그래도 자기가 필요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한바탕씩 놀아 주고 오지,
그냥 못간다고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젊어서부터 외우고 실제 써먹고 한 사설이 2000자리는 된다”며
“지금도 한번 한 소리는 안 하고서 한나절은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줄 자신이 있다”며 웃었다.
보성군 득량면에 사는 한성수(56)씨는
“시골에 묻혀 있었기에 그렇지,안 그랬으면 한 가락 했을 양반이다”고 김씨를 치켜세웠다.
첫댓글 참말로 대단한 양반이지요 ! 아제 건강 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어~ 우리 매형이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