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의 생애와 순교
황사영은 정5품 정랑직(正郞職)을 역임한 바 있는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윤혜(李允惠) 사이의
유복자로 1775년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강화로 추정되나 최근에는 서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도 한다. 그는 1790년(정조 14년) 9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土)가 되었다. 나이 열 여섯
에응시하여 시를 지어 급제한 황사영은 종이 2권, 붓 3자루, 먹 2장을 선물로 받았고 정조(正祖)가
특별히 불러 격려한 후 친애하는 표시로 손목을 잡으며, “네가 20세가 되거든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전시(展試)에 나갔지만 매번
백지를 제출하였다. 이에 정조는 대신들을 통해 충분히 공부하여 응시하도록 하였고 후에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알고 몹시 슬퍼하며 연정을 나타냈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한 직후 황사영은 정약용(丁若
鋪)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결혼하였다. 1791년 이승훈 (李承勳)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정약종(了若鍾), 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한 후 영세를 받고 입교하였다. 세례명은 알렉시오(Alexius) 다.
영세 직후인 1791년 10월(음) 신해 박해가 발생하여 그는 많은 친척과 친우들이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으로 확신하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의 포기는 사대부로서 관직에의 진출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교회내
그의 활동과 행적은「한국천주교회사」,「순조실록」,「일성록」,「승증원일기」,「사학징의(邪
學懲義)」등에 산재(散在)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91년 황사영은 자신의 집에서 유항검(柳恒儉) 등 여러 선비와 천주학을 배우며 토론하였다. 1795년
(정조 19년) 최인길(崔仁告)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처음 만난다. 이후 주 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하였고, 주신부가 조직한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이 되었다.
1796년 황사영은 몰래 한국에 들어 와 있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이승훈(李承薰), 홍낙민(洪
樂敏), 유관검(柳恒儉), 권일신(權日身) 그리고 최창현(崔昌顯)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협의하
여 북경(北京)의 주교(主敎)에게 해로(海路)를 통한 서양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였
다. 청년 황사영이 이와 같이 당시 교회의 극비 상황에 관여하고 있음을 보면 교회 내에서 그의 위치
가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1797년(정조 21년)부터 황사영은 이국승(李國昇)을 자기 집에 와 머물게 하며 서학(西學)을 강습하게
하였다. 1798 - 1799년 이후 같은 동리에 사는 신자 김의호(金義浩)의 아들 희달(喜達)에게 글을
가르쳤고, 신앙 서적을 필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직전에
는 가장 활동적인 교회 지도자로 부상되어 나간다.
1799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에 피신시키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성사(聖事)를 받게 하였다.
1800년 4월에는 피신해 있던 주문모 신부가 다녀갔다. 그리고 그 해 12월 20일 남대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종 등 교회 지도자들이 연이어 체포되는 가운데도 황사
영은 그 해 1월초 양근에 있는 권철신(權哲身)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부인에게 2일간 교리를 강습하
였다. 급기야는 1월 29일에는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후 황사영은 체포를 피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2월 보름쯤 정동(井洞) 송재기(宋載紀) 집에
사흘간 묵으면서 김희호를 만나 그의 충고대로 최설애(崔雪愛)가 지어 준 상복을 입고 변장을 하고
피신생활을 계속하였다. 며칠 후 김한빈(金漢彬)을 만나 의논한 끝에 제천 배론의 김귀동(金貴同)
집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는 서울 사는 이씨(李氏)로 상을 당한 이라고 행세하였다.
김한빈(金漢彬)은 전라도 고산(高山) 출신으로 충청도 청양에 이주했다가 다시 서울로 옮겨 살던 중
신유박해를 만난 인물이다. 그는 충청도 청양인 김귀동(金貴同)이 지방에서 일어났던 박해를 피해
제천에 피신하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황사영을 배론에 있는 그의 처소로 인도했던 것이다.
한편 2월 26일에 조정에서는 포도청으로 하여금 황사영을 체포토록 하였고, 2월 29일에는 어린 순조
임금 대신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정순황후)가 10일 이내로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제천으로
피신한 황사영은 김귀동(金貴同)의 집에서 은신하면서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을 기록하였다. 1801년
3월 그믐께 김한빈(金漢彬)을 서울로 보내 박해의 진행 과정을 알아 오게 하였다. 7일만에 돌아온
김한빈(金漢彬)은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 홍교만(洪敎萬), 최필제(崔必悌)
이승훈(季承薰)이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4월 19일 주문모 신부가 사형 당할 때 4백리 밖에 있던 황사영은 심상치 않은 바람과 진동을 듣는다.
5월 20일 대왕대비는 하교하기를 “황사영을 기필코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8월 26일 박해를 피해 떠
돌아다니던 황심(黃沁)은 김한빈(金漢彬)을 만나기 위해 제천으로 왔다. 황심(黃沁)은 이미 1798년과
1799년 쇄마구인(刷馬驅入)의 명색으로 북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했
던 인물이다. 황심은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비롯한 서울 교회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황사영이 백서에 씌여진 사실들을 수집, 정리하고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2월 전후로 짐작된다. 그는 피신 중 박해에 관한 사실을 김한빈 등을 통해 계속 수집하고 있었고 이
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6일 황심을 만나게 되자 그날 밤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북경으로 발송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날 춘천으로 되돌아 간 황심(黃沁)은 9월 15일
체포되었고, 심문을 받던 중 9월 26일 포장에게 황사영의 거처를 직고하였다. 또한 백서(帛書)의 전달
자로 예정되었던 옥천희(玉千禧)는 9월 20일에 체포되었다.
이에 황사영도 9월 20일 제천 배론에서 체포되었고 10월 3일 의금부(義禁部)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10월 7일 대왕대비의 추국 명령이 내려져 10월 9일부터 15일까지 6차에 걸쳐 황사영과 관계된 인물
들을 심문하였다. 그 결과 백서 제작의 배후 인물로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도 잡히게
된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서양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한 사실 등이 드러남에 따라 1801년 ll월 5일 서소문 밖
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
면 부곡리에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
한편 그의 처형(處刑) 이후 황사영이 소유했던 가산(家産)은 적몰되었고, 그의 노비 5인은 관노비로
몰수되었다. 그리고 그의 숙부 황석필은 경흥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처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군에
유배되었다. 그의 아들 황경헌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추자도에 유배되었다.
황사영에게 교리를 배운 배론에 사는 교우 김세귀(金世貴)와 김세봉(金世奉) 형제는 각각 칠원과
창원으로 유배되었으며, 황사영을 숨겨 주었던 집주인 김귀동(金貴同)은 형벌을 받은 후 고향인 흥주
로 이송되어 1810년 12월 30일 참수 당했다.
<황사영 백서의 주요 내용>
백서(帛書)는 비단에 씌어진 글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主敎) 구베아(De Gouvea)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
각되어 압수 당한 비밀문서이다.
백서의 원본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여졌다. 모두 122행으로 되어 있고
각 행의 글자 수는 95×127자이며 본문 13,264자, 세주(細主) 120자 도합 13,384자(이외 표시가 44개
있음)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으며 원본을 볼 수가 없어 확인할 길은 없으나 몇 부분의 가필(加筆)
한 흔적이 있다.
이 백서의 내용은 구베아 주교에 대한 인사말과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부터 1801년 신유박해(申
酉迫害)까지의 순교한 주요한 교계 인물들의 입교과정과 신앙활동과 순교상황에 대한 행적과 그리고
한국 교회의 재건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 백서의 발신자는 황심(黃心) 토마스로 되어 있다. 황심은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한 바 있었던 인물이므로 황사영은 그의 이름을 빌어 조선 교회의 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의 마련
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압수된 이후 의금부(義禁部)에서 계속 보관해 오다가 1894년 옛 문서들을
파기할 때 그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회 수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이 자료를 교황 바오로 ll세
에게 선물하여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조정에서는 황사영의 체포로 압수한 백서 중에 중국 교회와 비밀 연락이 누차 있었던 것을 알게
되자 그간 주문모 신부의 처형과 관련하여 중국과의 외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1801년 청나
라로 가는 사신 동지사(冬至使)를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황사영 백서의 축약본을 작성,「토
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중국에 보내게 된다. 이는 황사영 백서의 원본 중에서 조선 조정에 유리
한 부분만을 발췌, 요약한 문서로 원본 백서와 똑같이 가로 39.5㎝, 세로 5㎝로 된 흰 비단에 16행 923
자로 되어 있다.
이의 내용은 서양 선박(船舶)의 청래(請來)와 국경을 넘는데 있어서의 통신 등 두 가지 만을 지적하
고 있다. 이 축약(縮約)된 백서는 당시 외교 관계에 있어서 중국에 대한 조선의 고민을 잘 나타내는
자료이며 아울러 황사영 백서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는 장해물이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축약된 백서도 황사영 백서의 원본이 한국 천주교회에 입수될 때에 뮈텔 주교에게 입수되었으며
1931년에 민간에 공개된 바도 있었다. 백서(帛書)의 사본은 발각 당시부터 작성되기 시작해서「벽위
편(闢衛編)」을 비롯한 몇몇 자료에 재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황사영 백서 원본이 발견된 이상 다른 이본들은 이본으로서의 큰 의미는 갖지 못한다. 다만
위의 축약된 백서처럼 관(官)의 입장에서 작성된 이본에는 왕실과 조정에 불리한 부분(예를 들어 은
언군과 관련된 부분 등)이 다소 누락되어 있는 정도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천주교 박
해를 둘러싼 왕실의 권위와 작성자의 현실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뮈텔 주교는 백서 의 원본을 로마로 발송하기 이전 이를 실물 크기대로 동판에 담아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하였다. 또한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1966년 이를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황사영 백서의
번역본으로는 1925년 뮈텔의 프랑스어 번역본, 1946년 야마구찌 마사유끼의 일본어 번역본, 1976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윤재영의 한글 번역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