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 행정구역: 9면 9동
면적 : 403.23㎢
인구( 2020년 9월 ) : 246,231명
인구밀도 : 610.65명/㎢
개요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한 시. 시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섬 거제도는 대한민국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며 인구도 제주도 다음으로 많고 섬을 본토로 하는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유일한 시이다.
지리와 기후
본섬 거제도 포함 73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속해 있으며, 총 면적은 402.64㎢(본섬의 면적은 379.5㎢, 대략 동서간 27.45km, 남북간 39.75km)이다. 그 중 임야 71.2%, 농경지 17.3%, 대지 2.8%, 기타 8.7%를 차지하고 있다. 본섬의 해안선은 2011년 기준 약 328km로 우리나라 섬 중 가장 길지만 간척으로 점차 줄어들고 면적은 넓어지고 있다.
섬이지만 육지와 가까워 서쪽 통영은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 북쪽 부산은 거가대교를 통해 연륙되어 육로운행이 자유롭다.
해안은 굴곡이 심하며 섬이 많고 몽돌 ‧ 모래 해변, 해식애가 발달해 있으며 만입부의 충적지를 제외하곤 평지가 드물다. 해발 500~600m 내외의 화강암 산들이 많고 경사도는 급격하다. 이 때문에 일부 지역은 선상지가 나타난다.
기후는 온난습윤하다. 겨울은 북서계절풍의 영향이 덜하고 여름은 남동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편. 특히 쿠로시오 난류가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해안에 접한 장승포와 지세포 일대는 겨울철 평균기온이 제주도 다음으로 높다.[4]
장마와 태풍의 영향을 많이 받고 연평균 강수량이 2000mm를 유일하게 넘는 곳으로 한반도를 통틀어 연강수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국내 가장 비가 많이오는 지역은 거제도. 여름철 강수량이 높긴 하지만 해양의 영향으로 여름이 아닌 계절의 강수비율은 내륙에 비해 고른 편이다. 눈이 내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덕분에 아열대 식물이 잘 자라는 편. 남부면 해안가에는 야자수들을 많이 볼 수있고 바다에선 아열대 어종도 잡힌다.
역사
산달도 패총에 빗살무늬 토기 등의 신석기 유물, 소동리에 간돌칼, 사등면에 남방식 고인돌 등 여러 유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문화가 육지 못지 않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 초기에는 변한의 영역이었는데, 거제에 독로국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5]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 677년에 문무왕이 거제에 상군(裳郡)을 두었다. 이 당시 상군의 관소는 사등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지금까지 사용하는 이름인 거제군으로 고치고 속현으로 아주현(아주동), 남수현(南垂縣, 현 남부면), 명진현을 관할했다. 신라 9주 5소경 중에서 지금의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강주에 포함됐다.
고대부터 일본을 왕래하는 길목으로서[6] 변한 ‧ 가야 시절에는 한 군현 ‧ 일본과 교역하는 항로였다. 김해 등지에서 생산된 철은 낙랑 ‧ 대방으로 갈 땐 견내량을 지나 서진하고 일본으로 갈 땐 거제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 지세포 부근에서 대마도로 건너갔다.[7]
이는 대한해협의 강한 해류와 편서풍으로 인해 대마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동해로 떠내려가 버리는 위험이 있어 대마도와 가까우면서도 최대한 남쪽인 거제 남단에서 출발하는게 안전했기 때문이다. 돌아올 때는 대마도 남단에서 출발하여 거제도 남단에 도착한 뒤 해안선을 따라 김해 창원 통영 등지로 이동하는 것이 기본 항로였다. 이 항로는 조선 전기까지 지속되어 여말선초 무렵에도 정몽주, 신숙주 등 초기 통신사는 부산이 아닌 거제의 지세포나 다대포를 통해 일본을 오갔다.[8] 이때 방문한 통신사들은 거제의 인상깊은 절경을 보고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개성과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의 길목이자 이를 노리는 왜적을 방어할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고 군마와 목재도 생산하였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는 견내량과 동부면이 고려 수군의 진영이었다. 한때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주민이 비기도 했지만 왜구를 물리친 수군이 주둔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고 3차에 걸친 대마도 원정(1389년 창왕, 1396년 조선 태종, 1419년 세종) 때 원정군의 출정지가 되기도 했다. 조선 태종은 이 수군을 개편하여 산련포와[9] 탑포를 거쳐 오아포에 경상우수영을 설치하고 수많은 예하 진을 두었다.[10]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축성도 많이 이루어져 거제읍성인 고현성을 비롯해 둔덕기성, 지세포성, 옥산금성, 가배량성, 구조라성, 오량성 등의 평지성과 다대산성, 탑포산성, 중금산성 등의 산성을 포함해 24개의 성이 남아 있어 다양한 시대의 성들을 볼 수 있다.
섬인 데다 상주한 군영이 많아 관리 ‧ 감시가 용이하다 보니 유배의 역사가 깊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고려 중기와 역성혁명이 일어난 조선 건국 시기에 이주된 고려 왕족들의 집단 거주지였으며 의종이 거제 둔덕기성에 폐위되었다. 의종을 향해 부른 고려가요 정과정의 작가 정서나 연산군 때 사화를 겪은 김세필과 이행, 예송을 겪은 송시열과 같은 수많은 인물들의 유배지이자 유배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11]
임진왜란 시기에는 옥포 해전, 율포 해전, 한산도 대첩, 장문포 해전, 칠천량 해전 등의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옥포 해전에서 배를 잃은 일본군들은 고현성을 함락시켜 이때부터 경상우수영 인근에 위치한 거제면이 중심지가 되었고, 북쪽 해안선에는 일본군이 축성한 영등포왜성, 송진포왜성, 장문포왜성, 견내량왜성이 남아 있다.
1663년(조선 현종 4년)에 관아를 현재의 거제면으로 이전하였고[12], 1895년 고종 때 거제군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은 송진포를 무단 침탈해 해군기지를 세우면서[13]거제전역이 요새화 되었고, 일제시대 때는 장승포를 어업기지로 삼아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이 때문에 장승포와 지심도는[14]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 6.25 전쟁 때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남단 방어선이었고 거제 둔덕에 집결해 거제 방어 임무를 맡은 국군이 통영 상륙 작전을 성공하였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배를 타고 월남한 15만 실향민의 터전이[15] 되었고 1951년에는 지금의 고현동과 수양동 지역에 17만의 전쟁포로를 수용한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중립국...중립국" 이란 대화로 잘 알려진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공간적 배경이기도 하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통영군에 통합되어 버린 흑역사가 있다. 그러나 1953년 다시 거제군으로 분리되어 나왔으며 1963년 일운면 고현출장소가 신현면으로 분리되었고 1979년 신현면이 신현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장승포읍이 시로 승격되어 장승포시로 떨어져 나갔다. 이후 1995년 시, 군 통합 때 거제군과 장승포시를 다시 합쳐 거제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