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공(幼恭)
成化癸卯生 員 配仁川李氏 都事次惠女 墓咸安白岩南嶝艮坐合封有床石
성화계묘생 원 배인천이씨 도사차혜녀 묘함안백암남등간좌합봉유상석 장인:이차혜
성화 연간 계묘년. 생원. 배필은 인천이씨 도사 차혜의 딸이다.
묘는 함안의 백암 남쪽 비탈의 간좌(艮坐)에 합장하였고 상석이 있다.
成化1483年癸卯生成均進士公天賦穎異早事學間常處靜室潜心讀諸子經書詩文尤著成廟登生員進士尤琢磨不倦將欲大成適値戊午政亂横被迃拙齋子三寃獄而忠賢多竄死公亦以以堂叔之故而不免連累故筮遯于咸州之東白岩不求名利潜跡晦影之八年于玆矣逮至
中廟反政而復權後公始陞上庠丕闡世業至 今數百子孫之盛莫非公見機而行藏 卜基而積德之厚蔭也公之生率不可詳實弟幼檢帶同初入咸安白岩墓在咸洲白岩南嶝有碣銘
配端人仁川李氏宣人都事次惠女 墓咸安白岩南嶝艮坐合封有碣床石艅航面晴岩洞有
성화 19년(1483) 계묘생. 성균관 진사. 공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학문에 전념하였다. 항상 고요한 방에 거처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자(諸子)의 글과 경서(經書)를 읽었으며 시문(詩文)에 더욱 두드러졌다. 성종조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더욱 부지런히 수학(修學)하여 장차 대성(大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무오정란(戊午政亂)으로 뜻밖에 우졸재자(迃拙齋子, 박한주)가 여러 번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충현(忠賢)들이 귀양 가서 죽는 일이 많이 생겼다. 공도 역시 당숙(堂叔)인 까닭에 연루(連累)를 피할 수 없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함주(咸州, 함안)의 동쪽 백암(白岩)에 숨어서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종적을 감춘 지가 어언 8년이었다.
중종반정에 이르러 복권된 뒤 공은 비로소 성균관에 올라 가업을 크게 열었으니, 오늘날까지 수백년 동안 자손들이 번성한 것은 모두 공이 기미를 보아 출사(出仕)하거나 은거하고, 터를 잡아 덕을 쌓은 두터운 음덕 때문이다.
공의 생졸(生卒)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우 유검(幼檢)을 함께 데리고 처음에 함안(咸安) 백암(白岩)으로 들어갔었다. 묘는 함주(咸洲) 백암(白岩)의 남쪽 비탈에 있고 묘갈명이 있다.
배필은 단인(端人)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선인(宣人)의 품계를 받았으며, 도사(都事) 차혜(次惠)의 딸이다. 묘는 함안(咸安) 백암(白岩)의 남쪽 비탈의 동북 방향을 등진 자리에 합장하였고 묘갈과 상석이 있다. 여항면(艅航面) 청암동(晴岩洞)에 ......이 있다.
*단인(端人): 정‧종팔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외명부의 품계.
*선인(宣人): 육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품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