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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1. 조선 야소교 장로회 총회
우리나라에 장로교 선교사가 온 것은 1884년이고 <조선 야소교 장로회 총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조작한 것은 1912. 9. 1일로 알고 있다. 이 조선 야소교 장로회 총회는 왜정 치하에서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성장하여 오다가 1938년 제27총회 때에 신사참배를 결의하므로 총회, 교단 역사상 치명적인 먹칠을 한 적이 있고, 1942. 9월을 기해서 일단 조선 야소교 장로회 총회가 해체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나라도 해방이 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조선”이라는 말이 싹없어지고 “대한”이라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 기독교 내의 교회, 노회, 총회에서도 조선 야소교 대신 대한 예수교라고 부르게 되었다가 얼마 후 우리나라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라고 호칭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3. 총회의 분열과 합동
행불행은 하나님만 아실 것이고 역사는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여러 조직으로 분열되었다.
1) 고려측 총회로 분열
1946년 4월초 처음으로 부산에 고려 신학교가 설립된 후 총회에까지 각종 문제를 일으켜 나오다가 1946. 4. 29. 제31회 총회를 기해서 이 고려 신학교를 중심한 세칭 고려측이라는 교단을 창설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기장측 총회로 분열
이 기장측 총회의 시발은 전항, 고려측 집단보다 먼저다. 다시 말하면 해방 이전 서울 성동 교회당 하층에서 당시 김재준 교수 등 인사들이 조선 신학원이라는 신학교를 창설해 나오다가 8.15 해방이 되자 1946. 12월 당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부 총회에 대하여 총회 신학교 인준해 줄 것을 신청한다. 이 신청은 이듬해 1947. 4월 제2 남부 총회 때 인준을 받은바 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이 신학교 교수 중에 신 신학을 가르친다는 문제가 총회에까지 비화되어 몇 해를 끌면서 나오다가 1952년 4월 29일 제 37회 총회에서 전기 인준을 취소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김재준 교수가 총회에서 처벌받게 되는 등 수습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져서 전 총회와 분쟁으로 확대되었다가 1953년 4월 제38회 총회에 와서 그들 조선 신학교 일파에서는 총회를 이탈한 후 1954. 6. 10에 와서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였다가, 그 후 전기 “대한”이라는 표시를 “한국”이라고 변경하게 됨으로써 한국 기독교 장로회 총회라고 부르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보수파 진리파로 분리된 총회
이 총회는 다시 보수파와 진리파로 분리된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1948년 8월 WCC가 조직되고 우리나라 장로회 총회도 WCC에 가입 교단이 된 후 10년을 넘기지 못한 채 이 WCC 찬반 문제가 총회와 노회, 심지어는 교회에까지 번져서 신구 신앙 사상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급기야 1959년 9월 24일 대전 중앙 교회에서 소집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44 총회에서 절판 나고 나누어지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그 WCC 찬성파를 진리파라고 부르고, 그 반대파를 보수파, 혹은 NAE 복음주의 동자회 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4) 통합파 총회와 합동파 총회
① 통합파 총회
위에서 말한 진리파가 이듬해 1950년 2월 17일에 새문안 교회당을 장소로 하여 나누어질 제44 총회를 통합한다는 가치 아래 모였으나 전기 보수파에서 이를 거부하고 참석 아니 하므로 총회의 통합에는 일단 실패하고 말았으나, 교단 명칭으로는 통합 총회라고 굳어지고 말았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현재도 자타가 통합 총회라고 부르고 있다.
② 합통파 총회
한편 WCC 반대파인 보수파 진영에서는 그해 1959. 11. 27에 서울 승동 교회당에서 전기 제44 총회에 속회로 모임을 갖고, 나머지 사건을 처리하는 일방 총회를 보수 신앙파로 수습하고 단합한다는 뜻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원칙과 정책”을 제정 통과하고 이는 1912년 9월 1일 조상들이 우리나라 장로회 총회, 교단을 창설할 때의 신조 신앙이자 헌법의 재천명이라고 말하면서 자파가 법통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 원리와 정책은 아래와 같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원칙과 정책
원칙
가)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오랫동안 독립 주권을 가진 교회로 알려져 왔다. 우리는 이제 이 주권 행사에 있어서 또는 이 주권에 따르는 의무 이행에 있어서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분한 발전 성장을 기한다.
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계시된 말씀에 틀림이 없고, 또는 우리의 믿음과 모든 생활에 유일, 최고의 지침이 된다는 믿음을 항시 명백히 하여야 한다.
다) 칼빈선생이 가르친 장로교회의 신학과 모든 원칙들을 준수한다. 웨스트민스터 신도 계요서는 이러한 원칙들을 잘 표시한 것으로 인정하므로 이레 준거하여 작성된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신경을 충실히 준수하여야 한다.
라) 교회는 본질상 거룩하며,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령한 유기체라는 터 위에서만 교회의 통일성이 존재한다.
교회의 신령한 속성들과 증표들을 가리움이나 흐림 없이 드러내야 한다.
마) 성신의 내주와 역사로 개인 생활에서나 교회에서 늘 스스로 반성하여 죄를 회개하며, 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의의 품성이 더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원칙들을 양보나 타협이 없이 또는 모든 저해와 반세력은 이를 대적하고 물리치면서 명백하게 선양 실천하기로 한다.
정 책
우리는 목전에 여러 과제와 상태에 대처함에 있어 전기의 원칙들 하에서 여좌의 정책을 수행하기로 한다.
가) WCC와 그 노선의 에큐메니킬 운동은 우리 교회의 거룩함과 또 그리스도와의 합일의 속성을 저해함을 중외에 선언한다.
나) 우리는 교회의 권징을 진실히 행하여서 이로써 교회의 순결을 확보 유지하기를 기한다. 이 관점에서 지난 9월에 제44회 총회 전회 직후에 일부의 교두들이 별달리 서울에서 이를 조직하고 이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그러한 권위를 주장한 일로 단정한다. 잠시 생각을 달리하여 이 조직에 가담하거나 이를 용인한 교우들은 우리의 선언한 이 원칙들과 이 정책들을 승순하고 다시 돌아와 함께 형제애와 수고를 나누기를 간망한다.
다) 비록 우리와 동일한 신앙을 위한 단체라 할지라도 그와의 관계가 우리 교회의 거룩한 사랑의 구현이나 그 성장에 일으킨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우리는 이와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뺏지 아니하기로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의 교역자들로서 NAE에 가입한 분들은 이에서 탈퇴하여야 한다.
라) 우리 교회와 70여년간 고락을 같이 하여 온 선교회들과 그 선교사들의 수고와 노력은 높이 칭송하고 감사한다. 우리는 이 선교사들과의 우애를 앞으로 더욱 계속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이 선교회들의 정당한 권리를 신분 존중한다.
우리는 이 선교회들이나 그 선교사들이 우리 대한 예수교장로회에 애와 봉사의 협조를 제시 품여 할 때에 우리의 상기 원칙들을 추호도 정감함이 없이 오히려 더욱 고조하는 데 우에서 이러한 제공을 감사히 받아 실효 있게 하여야 한다.
1959 년 11 월 27 일
대 한 예 수 교 장 로 회 총 회
위에서 말한 보수파 총회는 당시만 해도 대외에 대하여서나 전국 성도들 앞에 대의명분을 지킨 셈이 된다. 다시 말하면 1959. 11. 24. WCC 찬반 분쟁 때문에 총회를 비상 정회로 중단했다가 그해 1959. 11. 27 전기한 바 있듯이 서울에서 계속 회를 열고 모든 잔여 사무를 처리함과 전기 총회의 “원칙과 정책”을 제정하여 보수 교단임을 교내 외에 과시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주효하였다고나 할지, 총회가 이 여세를 힘입어서 전기 1945. 4. 29 분리하여 나갔던 고려측 초회와 합하기 위하여 공작이 생기고 상당한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진보와 신신학주의자들이 교단을 떠났으니 합해도 되지 아니하는가?” 하는 듣기 좋은 합동 공작이 주효됐다고 할 수 있다. 1961. 12. 13에 가서 드디어 두 교파가 서울 숭동교회당에서 합동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곧 합동 총회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도 이 당시 합동파인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5) 합동파 총회의 2중 분열
① 합동파와 호헌파
한마디로 하면 합동파 총회는 전기와 같이 1961. 12. 13 고려파와 합동을 하고 나서 말로는 한국 보수 교단이라 하면서 뒷구멍으로 전기 진보파, 통합총회와 제합동을 펴하고 국제 고아 신세를 면하여야 한다는 구실에서 미국 기독 개혁 교회와 유계를 맺고 그 조건부 따라 보따리를 들여다가 총회 신학교를 건립하여, 한걸음 나아가서는 RES라고 불리우는 복음주의 히큐메니칼 대회에 목사로 보내며 가입하는 한편 온전히 전기 1959. 11. 27의 제44 총회 원리와 정책을 망각하고 1912. 9. 1 제정한 헌법을 무색케 하는 대로 급진정 하게 됨에 따라서 이를 반대하고 총회 자체 정비나 정화 운동을 부르짖는 이들에 의해서 급기야 1962. 9. 21 제47회 총회 때에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합동파, 다른 하나 즉 호헌총회가 바로 그것이다.
② 또 나누어진 합동파 총회
이듬해 1963. 6. 2 그러니까 합동한지 두해 반 만에 들이 또 나누어진다. 합동 총회 교단안, 고려파, 지도자들이 합동 총회에서는 더 이상의 신앙 보수, 순교자들의 신앙을 믿고 선교할 수 없는 껍데기 보수 교단인 것을 전파하게 된 것이다. 부패가 나날이 증가일로에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더 이상 잔류할 수 없음에서 1953. 6월 그러니까 제48 총회를 두 달 앞두고 “환원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싹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의 한상동씨가 함께 돌아간 것은 하나의 넌센스다. 이같이 합동파 총회가 산산조각이 나고 고려파가 나누어지므로 그 합동이라는 의의가 없어졌는데 왜 오늘까지 교단 명칭을 합동총회라고 부르는지 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호 헌 총 회 교 단>
1. 호헌총회 조직의 불가피 사유
1) 사전 경고
여기 사전이라면 1962. 9. 21 합동 총회 제47회 총회 개회 건을 말한다.
경고라는 것은 그 총회에 대하여 전비를 뉘우치고 1959. 11. 27 제정한 총회 우너리와 정책에 따라서 보수 신앙 교단, 다시 말해서 1912. 9. 1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경고다. 이런 의견은 노회 지도자들의 당시 통일된 의견이기는 하였으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필자가 이끄는 경부노회에서 앞장을 서고 노회결의를 제47 총회에 보낸 것이다.
경고의 내용은 동 경고문을 일독하면 짐작할 수 있기에 여기 재론치 아니한다. 그 경고문 성명서를 전기한다면 다음과 같다.
성 명 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소금이 그 맛을 잃듯이 그 본래의 성화성을 잃어버렸고 한 속화의 집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다음에 지적되는 것들이 대개 그 주되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① 1951년 8월 28, 29 양일의 대전 유성 온천장의 소위 유지회라는 부정선거 모의 밀회 사건을 위해서 그가 낳은 제46 총회의 임원 선거 시의 불법을 감행한 것.
② 1961년 9월 21일 제46 총회 제2일의 경북노회의 회원권 문제, 제5일의 정치부보고 채택 시 동의 불법 자행과 임원 취임의 비법
③ 은혜를 입고 신앙과 사상이 같은 벗되는 국제교연합회(ICCC)에 대한 배은망덕의 처사로서 우호관계까지 끊어버리는 성경과 신경을 범하 죄를 범했고 지금도 그 같은 범행을 지속 중에 있는 것.
④ 경기, 경북 양노회에 대한 열 위원들의 불법 치사를 옳은양 받아들임으로 영원히 속죄 못할 장로회 정치 원리를 무시하고 만 것.
⑤ 담배, 술, 맨쓰를 마음대로 하고 성수주일과 신자생활의 경건을 전혀 무시하는 그리고 또 천년 왕국과 예수 재림을 불신하는 교파의 선교사를 받아드려 지도를 받고 그러한 교회에서 오는 돈(영적인 호금)을 받아 교회 정치에 악용함으로서 총회와 교회가 속화일로에 있는 것.
⑥ 터가 있어 일단 에큐매니칼측과 합동함으로서 선배들의 WCC 탈토의 수교를 할뿐 교회로 하여금 도여 금으로 WCC측에 넘겨주려는 위험한 처사를 열을 내여 하는 것.
⑦ 계명을 범한 자, 거짓 증거로서 동역자를 해한 자, 폭력으로 교회를 다스리기 현저한자들이 오늘 총회를 지도하고 교권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적 명망이 전혀 없어지고 만 것.
⑧ 총회 지도자들이 그 교권 장악에만 급급한 나머지 허다한 산하 노화들의 분규와 분리를 방치하며 교단 등록 하난 제대로 못하고 신학교 문제 등에 산적한 비를 자부함으로서 소란한 교계를 비저내여 타에 대한 대교파의 면목을 여지없이 추락시키고 만 것.
이상 이러한 어두운 점이 속출되고 거룩해야 할 총회가 범죄일로에 떨어지는 현상이기에 이를 시정시키기 위해서 쌍방으로 노력하고 충고하며 때로는 애원까지 시도했으나 그 개전의 여망이 전혀 없기에 오동 경북노회는 말없이 여기 머물므로서 범죄를 묵인하는 자가 되어 예언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허물을 하나님께 질수밖에 없다. 한편 이렇게 경고함으로서 우리 총회가 하루 속히 비를 시정하고 그 본래의 순수한 보수 신앙과 성경을 믿는 근본주의 교회로서 정총회의 면목을 만세에 계승되기를 희망해서 여기 다음과 같은 결의하고 단행한다.
가) 전기 모든 비가 깨끗이 시정될 때까지 우리 경북노회는 총회에 대표 파송을 중지한다.
나) 적기가 도래할 때까지 상기 모든 비행 중에 폐기, 또는 수정된 현재 헌법을 중지하고 소급해서 1934년 개정판 헌법에 의하여 하나님을 예배함과 복음 전파 및 교회 설립에 전력한다.
다) 장로회 본래의 원리와 정신에 입각하여 교회 발전을 시도하되 현재 우리 노회가 직영 중에 있는 신학교 및 성경 학교를 통해서 교역자 및 지도자 양성을 기한다.
라) 우리는 1959년 11. 27 총회 시에 제정한 총회의 원리와 정책을 준수하는 뜻에서 타와 상호 연락하되 신앙과 생활 상방이 우리 장로교회와 동일한 경우 상호 연락과 우호 관계를 맺는데 주저치를 아니한다.
마) 전항의 원칙에서 기히 은혜를 입은 바 있고 앞으로의 전우 인 ICCC에 가입을 단행하고 금후 상호 협조를 아끼지 아니한다.
바) 만약 하나님의 뜻을 계시면 우리 노회는 총회를 바로 잡고 옛 신앙 보호의 보수 운동에 선봉 되기를 희망한다. 위 퉁소하고 차지 중외에 이 성명으로서 표한다.
1962년 9월 20일
대한예수교장로회경북노회
회 장 박 병 훈
회 원 일 동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7회 총회장 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