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조씨 16세조 휘 감(堪,1530-1586) 옥천공께서는 부친 휘 정견(庭堅,1504-1556) 참봉공과 배위
진주하씨 여사님의 3남2녀중 장남이시며, 영남 진양 천석지기 부자 집안의 유복한 자손으로 자라셨고,
조부는 이조참판 휘 순(舜, 호 옥봉 1465-1527)님으로 함안조씨 참판공파 파조(派祖) 이시다. 부친 참봉공과 기호학파의 거두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선생 간의 사돈지교 언약의 결실로 맺어진 역사적 인연의 주인공 이시다.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으면서 을사사화(1545)시 직간 상소문으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鄭順朋)·최보한(崔輔漢)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적폐세력으로 몰려 삭탈관직을 당한 백 휴암 선생께서 고향 파주 월롱산 자락의 생가터 초라한 초가로 쫒겨 내려와 빈곤한 상황에서 학문 활동을 하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참봉공께서 사화가 미치게 될 위험도 무릅쓰시며
1546년경 17세의 아드님 옥천공 유학의 길을 열어주시고 백 선생의 여식 수원 백씨 여사님(1531-1620)과의 혼인을 동시에 추진하시어 빈궁한 처지의 백 휴암 선생님의 성리학 학문 활동을 돕고자 하는 결단 하에 옥천공에게 혼인의 연유를 말씀하시고 백 휴암 선생께 친영(親迎)토록 재물과 혼수를 보내 혼인지교를 실천 하셨고,옥천공은 파주로 오신 그 즉시 비바람이 들이치는 초라한 생관(甥館)에 신혼 생활을 시작으로 이십여연간 백 휴암 선생이
관직에 복귀(1565년) 할 때 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지근에서 친부모 모시듯 백 선생의 후학 양성과 성리학 연구를 도우며 참봉공의 유지에 따라 서당운영과 가계 살림은 옥천공의 전담하에 운영 하여 장서지간의 도리와 수제자 의 예를 다하셨는 데,(이를 우계 성혼 선생께서 기록으로 남김) 옥천공과 배위 숙인 수원백씨 여사님 슬하에 1남1녀를 두셨다.
아드님은 휘 의도(毅道,1548-1601) 강백공 이시고,따님 함안조씨 여사님은 옥천공의 집우(執友) 우계 성혼 선생의 장자 창랑 휘 문준(文濬)공과 혼인 하시어 슬하에 3남3녀를 두셨다.옥천공은 당시 서당 문하생으로 우계 성혼,장포 김행,낙금당 신제현,율곡 이이 등과 동문수학 하시고 성리학의 높은 경지에 오르셨으며 백 휴암 선생님을 부모처럼 공경함에 명문가 부자집 자손의 티를 내지 않아 하여 주위의 칭송이 많았다.(우계 지음 옥천공 묘갈)
옥천공께서는 한양과 파주, 함안를 연고로 생활하셨고 관직은 사포서별좌,의금부도사,평시서직장,1585년 종부시주부로 계시며 공명정대하신 관리로서의 표상을 보여주시며 부당한 상부의 청탁을 거절하고 백성과 부하를 배려하신 대인의 면모를 지니신 성리학자 이시고 장래가 촉망된 관리셨으나 건강상 지병으로 이를 극복하지 못하시고 한양 순화방(현재 서울 청운동) 자택에서 1586년 돌아 가셨다.
20여년간 서당과 처가 살림을 도맡아 하며 함안 천석지기 재산을 정리해 1576년경 파주에 정착한 것은 연로하신 백 휴암 선생님을 모시기 위함 인데 백 선생님은 힘든 시기를 잘 보필한 옥천공 내외 에게 보답으로 당산(능산리)전답 9석지기와 노비 27명 임야 64정보를 내주시어 1578년경 부터 파주 월롱면 능산리에 세거하시게 되었고, 함안조씨 입향조(入鄕祖)가 돼셨다. 옥천공께서 파주 능산리에 거주하며 후학을 가르치시 던 곳,오봉산 자락에 유택을 모셨고, 약400여년 전에 묘소 우측에 영모재를 신축하고 오봉사 암자를 지어 선조님의 안녕과 후손의 번영을 기원해 왔으며,
재실은 1927년 9월에 다시 중수,1967년 주손 현대(顯大) 종친대표와 종친들이 합심해 개축 했고 1995년8월10일 조재천 전 종친회장과 후손들의 성금을 모아서 현 위치 이전 중건하고, 옆에 2010년경 봉선당을 신축 했으며, 2020년 11월15일 영모재를 재중창건 하였다. 공의 후손은 파주 양주 고양 용인 서울등 수도권과 함안 안성 진천 등 전국에 걸처 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 되나 종친간 교류가 많지 않다.("조감선생의 행적과 그의 후손"주손 조재천 전 종친회장 지음)
<함안조씨 참판공파 중심으로 본 계보>
(시조부터 19세 까지)
시조 휘 정(鼎)고려 대장군- 2세조 휘 간(幹) 중랑장- 3세조 휘 단석(丹碩)원윤-4세조 휘 시우(時雨)오위도령장-5세조 휘 석화(錫和)군보랑-6세조 휘 열(烈)광정대부-7세조 휘 희(禧)좌윤-8세조 휘 지흥(之興)참군-9세조 천계(天啓)판도판서-10세조 휘 열(悅)공조전서-11세조 휘 안(安)시정공-12세조 휘 려(旅)정절공 생육신 증 이조
판서-13세조 동호(铜虎)진산군수 증 이조참판-14세조 휘 순(舜),이조참판 참판공파조 경기관찰사 개성유수-15세조 휘 정견(庭堅).목청전 참봉 -16세조 휘 감(堪,호 옥천공)사헌부 집의,(용주서원 배향,파산서원 경현단 입위)-17세조 휘 의도(毅道,호 강백공),군자감주부 선무원종공신 증 호조참판-18세조 휘 탁(鐸)봉사공,휘 거(鐻)처사공,휘 일(鎰)평시서령 증 이조팜판,휘 익(釴)
공조좌랑-19세조 휘 형원(泂源)통덕랑,휘 득원(得源)중추부사,휘 광원(光源),휘 준원(浚源),휘 봉원(逢源)파서선생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휘 진원(進源)진사,휘 장원(長源),휘 순원(淳源)덕산현감-
20세조
* 고려시대 선조님들의 생활이 개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10세조 이전 선조님 들의 행적과 사료등 묘의 위치가 불분명하여 안탑까울 따름이다. 통일이 되면 확인해야 될 과제이다.
<참판공파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