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조(始祖) : 이한(李翰)
2. 유래(由來)1 :
시조(始祖) 이한(李翰)은 덕망(德望)이 높고 문장(文章)이 탁월(卓越)하여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 후(後) 대대(代代)로 신라(新羅) 시대(時代)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世孫)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代代)로 전주(全州)에 살아온 호족(戶族)이었는데 새로 부임(赴任)한 지주의 탐학(貪虐)을 규탄(糾彈)하자 지주가 군사(軍士)를 휘둘러 보복(報復)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曾孫)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高麗) 시대(時代)에 공(貢)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李子春)의 아들, 즉(卽) 시조(始祖)의 22세손(世孫)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國政)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王位)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창건(創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3. 유래(由來)2:
전주 이씨의 시조(始祖) 이 한(李 翰)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閥族)인 대성(大姓)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
그 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阿干)을,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 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린(璘)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였다.
호방(豪放)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살다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江陵道三陟縣)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강릉도의 안렴사(安廉使)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이어서 목조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咸吉道德源)에 정착하였다가 원(元)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 : 경흥부의 동쪽 30리에 있었다.) 땅으로 이주(移住)하여 원주민 5천 호(五天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벼슬 제도)가 되니 이 때가 고려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조(朝)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에게 쏠려 쫓으니 이씨 조선 왕업(李氏朝鮮王業)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