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군(寧城君.1606-1649)
1606년(선조 39) 12월 24일 태어나 1649년 9월 19일 향년 44세로 별세했다.
생애
1606년(선조 39년) 음력 12월 24일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와 그 후궁 온빈 한씨(溫嬪 韓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이(李), 이름은 계(),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흥안군(興安君)과 경평군(慶平君)의 친동생이며, 정화옹주(貞和翁主)의 친남매이다. 광해군(光海君),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 등과는 이복 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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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군은 선조대왕의 13남으로 어머니는 온빈(溫嬪) 청주한씨이다. 영성군의 휘는
계( ), 시호는 효경(孝景). 1606년(선조 39) 12월 24일 태어났다.
이후 1649년9월19일(인조 27년) 향년 4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그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산42-4(목암리) 묘좌이다.
배위는 회산군부인(檜山郡夫人) 창원황씨)(? ∼1644년 6 월 8 일卒)이며 영성군 묘와 합부이다
사후 효경(孝景)의 시호가 올려졌다 배위는 회산군부인(檜山郡夫人) 창원황씨이다.
슬하에 회원군(檜原君) 윤(倫)을 두었는데 장수하여 효종 · 현종 · 숙종 · 경종 · 영조대까지 5대 임금을 모시고 수 십년간 사옹원 일을 주관하였고 종친부 유사당상까지 올랐으며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그러나 독자인 규령()이 조졸하여 광평대군(세종대왕 제5남)의 7대손을 왕명으로 입양하여 함평군(咸平君)으로 봉군하고 그 후사로 장남 해흥군(海興君)을 비롯 6남을 얻어 비로소 6파로 나뉘어 후손이 번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후손이 귀한 탓인지 6파로 나뉘어진 후에도 자손이 귀하여 6파 상호간 양입출(養入出)하였음에도 약 200세대 미만이다.
그러나 그간 후손들 중에는 문 · 무과에 급제한 이도 많다. 파종회는 해흥군(海興君) · 해춘군(海春君) · 해운군(海運君) · 해청군(海淸君) · 해봉군(海蓬君) · 해영도정(海瀛都正) 등 6개 종파가 있으나 6 · 25전쟁 등으로 헤어졌다가 1978년 10월 29일 종친들이 모여 발기대회를 열고 영성군파종회로 발족하였다.
초대회장은 재항(載沆 : 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취임, 1982년 9월 10일 종약원에 등록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매년 1회 정기총회와 영성군을 비롯한 4세까지의 묘의 사초와 벌초를 하며 음력 10월에는 시제를 올리고 있다. 조선조 말 편찬한 족보를 토대로 1982년 2월 1일 80년만에 족보를 편찬하였다..
가족 관계
영성군은 창원 황씨 황이중(黃履中)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회원군(檜原君)을 두었다. 부인 황씨는 결혼 후 회산군부인(檜山郡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회원군은 이름이 윤(倫)이며, 효종(孝宗) 때부터 영조(英祖) 때까지 살며 사옹원, 종친부, 도총부 등에서 관직을 두루 지냈다. 영조가 즉위한 1724년(영조 즉위년) 회원군은 나이가 90에 가까워 영조로부터 그 손자들이 가자되었고, 1731년(영조 7년) 음력 8월 6일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조정에서 관으로 쓸 재료와 3년분의 녹미를 지급하였다.
회원군은 아들 규령() 하나를 두었으나 요절하는 바람에 세종(世宗)의 7남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대손을 양자로 들여 함평군(咸平君)에 봉하여 후사를 이었다. 함평군은 아들을 6명이나 두었으나, 현재의 영성군파는 총 200세대 미만으로 그 수가 적은 편이라고 한다. 한편 영성군의 후손 중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재항(李載沆) 등이 있다.
*아버지 : 선조 (宣祖, 1552년 ~ 1608년, 재위 : 1567년 ~ 1608년) - 조선의 제14대 왕
*어머니 : 온빈 한씨 (溫嬪 韓氏, 1581년 ~ 1664년)
*부인 : 회산군부인 황씨 (檜山郡夫人 黃氏)
*아들 : 회원군 윤 (檜原君 倫, 1636년 ~ 1731년)
*형 : 흥안군 제 (興安君 瑅, ? ~ 1624년)
*형 : 경평군 륵 (慶平君 玏, 1600년 ~ 1673년)
*남매 : 정화옹주 (貞和翁主, 생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