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장망혜 불원천리길 단종임금 문후를 한달에 3번씩 왕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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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歸鄕)후 함안군 군서면 원북동 백이산(伯夷山)자락 아래
수석(水石)의 승개(勝塏)가 아름다운 자리에 복지(卜地)하시며
은둔의 군자로서 시문(詩文)과 낚시로 세월을 드리우고, 때를 기다리며 상앙 하시었다.
1456년 병자년(세조 2년)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자 어계선생께서는 첩첩산중 벽지 영월땅에
귀양살이 하는 어린 단종임금의 만수무강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누 밤을 지새우시다가
불현듯 행장을 차려 불원천리 먼길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죽장망혜로 한달 세번씩이나 왕래하시며
접근하면 능지처참한다는 추상같은 어명에도
"지금 죽어서 만고에 살리라는 충절과 어기로 어린단종임금을 문후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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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악산 제명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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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계 조려, 관란 원 호, 도촌 이수형등 세분의 벗들은
법흥천과 섬안이 강이 합수되는 무릉도원 요선암 건너편 무릉리 입구의 큰바위에다
단종임금의 신변의 안전과 만수를 소원하고, 복위를 기원하며 세분의 이름을 새겨넣었는데
1987년(정묘년)에 도로 확, 포장공사로 파손되었다가
1990년(경오년) 8월 25일에 세분의 후손들에 의해 치악산자락
(현재: 영월군 주천면 무릉리에 <무릉계곡 3공 제명석>을 복원하였다.
* 치악산 제명록은
어계선생의 경우 함안에서 왕복 천리 먼길을
자주 왕래하셨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증표로 매우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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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도 청령포 조옹 렴 노산(虎渡령浦 趙翁殮魯山)과 호도비(虎渡碑) 제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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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년 정축년(세조 3년) 10월 24일에
유배된 단종임금이 승하하셨다는 부음을 듣고,개나리 봇짐에 짚신을 메어달고,
불원천리길 주야(晝夜)로
통곡을 하시면서 달려가 청령포에 도착하였으나
무심 한 나루터의 물은 불어 건너지 못 하고,
마침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그 강(江)도 따라 울었다 한다.
마침내 의복을 벗어 등에지고, 강을 건너려하니
문득 누군가가 옷깃을 당기는 지라 뒤를 돌아보니 큰 범이였다.
어계선생이 말씀하시길
"천리분상에 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다.
이 강을 무사히 건너면 다행히 임금을 수렴할 것이요,
건너지 못하면 창해의 귀신이 될 것인데, 너는어찌 나를 당기는고 ?" 하니
큰범이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므로
선생은 그 뜻을 짐작하고 등에 엎혔으니,
큰범은 어계선생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네주니
마침내 시소(屍所)에 들어가 보니 다만 수직하는 사람 둘 뿐이더라,
통곡 사배한후 옥체를 수렴하고,
문을 나오니 기다렸던 범이 다시 강을 건네주었다.
이는 하늘만이 아는 일로
남 추강의 시(詩)와 강원도지, 규장각보관 영월부(府) 읍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호도 청령포 조옹 렴 노산(虎渡淸령浦 趙翁殮魯山)]이라
전(傳)하여 절개와 더불어 선생의 만고에 충절을 치하하고 있다.
<후손들이 효도비를 1988년(무진년) 5월 23일 함안조씨 대종회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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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로동혈/ 동혈의 지조를 지키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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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는
1455년(을해년) 단종임금 3년/ 세조원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탈취)하시니,
분격 하시어 하늘을 우러러 세상을 개탄하시면서 불사이군(不死二君)의 정충대의(貞忠大義)의
사상(思想)을 마음속에 새기시며,
1456년(병자년) 세조 2년 4월 춘절(봄)
선생께서 37세 되시던 해애 태학(성균관) 동문수학 유생들과 하직인사를 하고
본향이신 함안 원북동 백이산자락 낙동강가에 은거하시며, 스스로 어계처사라하였다.
산천경개를 벗 삼으시고, 글을 읽고, 시를 읊으시며,
때로는 긴 낚시대를 드리우시니, 지금의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고마암과 어조대의 계곡에서 세월을 낚으시며, 자연과 더불어 상앙하시면서 우거하였다.
1457년 (정축년) 세조 3년 10월 24일
단종임금께서 승하하셨다는 부음을 들으시고,
불원천리길을 주야로 통곡하시며 달려가 영월 청령포에 도착해보니
나룻배는 없고, 물은 불어 동분서주하시다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하늘도 감동하시어 대호(큰범)을 내려주셔서 도강하여
단종임금의 시소에서 통곡 4배 한후 옥체를 수렴 하였다.
그 이후
그리운 님을 따라 죽음을 같이 못하였으나, 뜻만은 <해로동혈>의 맹세를 하시며,
1457년(정축년) 세조 2년에 스스로 물고기(漁)와 시내(溪)가 되어
낙동강 하시(下始)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창강 영월 청령포로 이어지는 -
그리운 님의 혼령을 만나기 위해
어계(漁溪)의 기나긴 유영(遊泳)의 장대한 대서사시로 이어지시니 ! -
가을빛 국화꽃 향기로웁고,
백이산자락의 한마리 두견이되어 그리운 님따라 죽음을 같이 못한
피끓는 사모곡의 울부짖음이, 이 밤을 흰빛 서늘한 비늘을 퍼뜩이며,
그리운 님의 혼령을 만나기 위한 장대하고도 기나긴 어계(漁溪)의 유영(遊泳)이 시작되고,
1489년(기유년) 성종임금 20년 시월 스무이튿날
칠순으로 고용히 눈을 감으시니 그리운 님(단종임금)과 육신(六臣)과 함께
죽지는 못하였으나, 뜻만은 <해로동혈>하여 스스로 <동혈의 지조>를 굳게 지키시니
어계(漁溪)의 33년간의 기나긴 유영을 끝내시고, 지하에서 사모하는 님과 해우를 하셨다.
선생의 정충대의의 숭고하시고도 장대하신
애끓는 그 마음은 <어계(漁溪)>의 자호(字號)로 청사에 길이 남기셨으며,
선생의 청고(淸高)하신 그 사상은 백이산의 한마리 학(鶴)이되시고,
애끓는 사모곡(思慕曲)의 혼령(魂靈)은 한마리의 물고기(漁)가 되시어
정녕 한세상을 풍미한 호걸 선비의 기상과 도리로서,
정충대의(貞忠大義) 사상(思想)과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고고한 유맥(儒脈)을 청사(靑史)와 후인(後人)에 기리 남기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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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충절은 남다른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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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어린 단종임금에 대한 불사이군의 충과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효를 다하신 우리 어계선조님께서는,
영월에 유배된 어린단종임금을 그리워하며, 누밤을 지새우시다
1년 4개월을 한달에 3번씩이나 함안에서 영월까지 불원천리길을 죽장망혜로 달려가
임금께 문후를 드리며, 신변의 안전과 만수를 소원하고, 복위를 기원하며 치악산제명록을 새기고,
하늘도 감동하고 강물도 울었다는
<호도 청령포 조옹 렴 노산(虎渡淸령浦 趙翁殮魯山)> 이야기와
스스로 어계가 되어
낙동강 하시에서 남한강을 거쳐 평창강 영월 청령포로 이어지는
애끓는 사모곡(思慕曲)의 혼령(魂靈)은 한마리의 물고기(漁)가 되어
그리운 님을 따라
죽음을 같이 못 하였으나, 뜻만은 <해로동혈>의 맹세를 하시며,
그리운 님의 혼령을 만나기 위해 어계(漁溪)의 기나긴 유영(遊泳)의 장대한 대서사시로 이어지고,
그리운 님(단종임금)과 육신(六臣)과 함께 죽지는 못하였으나,
어계(漁溪)의 33년간의 기나긴 유영을 끝내시고, 지하에서 사모하는 님과
해우를 하시고. 뜻 만은 <해로동혈>하여 스스로 <동혈의 지조>를 굳게 지키시니
정녕 한 세상을 풍미한 호걸 선비의 기상과 도리로서
정충대의 사상과 백세청풍의 고고한 유맥을 청사와 후인에게 일기유맥으로 이어지게 하시니 ----!!
하지만 백이산(伯夷山) 아래 은둔(隱遁)의 군자(君子)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진정한 징현천유(徵顯闡幽) 하신 뜻을 후인(後人)들은 능히 표현할수있으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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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선생의 충절과 신의가 242년후에 생육신 (生六臣)으로 추봉(追封)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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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년(계미년) 조선 숙종 29년에
예조판서 조상우가 임금의 어전에 무릎꿇어 재배한 다음에
어계 조 려선생의 아름다운 충절을 이렇게 아뢰었다.
" 전하 ! 근자에 올라온 상소 가운데 이를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 있사와 삼가 아뢰옵니다.
진사 조 려는 원호, 김시습, 이맹전, 성담수, 남효온과 함께
살아서는 뜻이 같으며, 죽어서도 그 이름을 함께 하였나이다.
또한 조 려가 읊은 구일등고(九日登高)란 시(詩)에는
<머리 돌려 눈을 뜨니 강산이 저물고, 땅넓고 하늘 높아 생각이 아득하네.
복희 훤원 어디갔소 슬프기 그지없고, 요순시절 못 만나서 마음이 아프구나,
슬프다 이내신세 어인일로 괴로운고, 연연한 구군 그리워 잊어지기 어렵구나>라는
대목에 이르러 조 려의 절개를 능히 요량할 수 있나이다.
세간에 김시습일만 크게아나 이는 기행이 세간에 널리 회자되어
그런 것뿐이며, 조 려를 비롯한 여섯사람의 충절을 비교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마땅히 크게 포상하시어
동렬(同列)의 은혜를 베풀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상소는
생육신의 충절을 찬양하고 덕의를 숭모코자
어계선생께서 은둔 소요하시던 이곳 서산(西山: 지금의 백이산)아래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에
1703년(계미년) 숙종임금 29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생육신을 봉향할 서산서원을 세우고
경상도의 유생 곽억령 등이 서원의 건립 재가를 상소하여,
다음해 1704년(갑신년) 숙종임금 30년에 예조판서 민진후의 진달로 윤허가 내려졌으며,
임금이 제문(지제교 이언경이 지음)과
봉안문(병조좌랑 곽수구가 지음)을 예조좌랑
도영하를 보내 생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영령을 위로 하였다.
생육신의 향사를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는 미천제(薇薦祭)를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에는 국천제(菊薦祭)를 봉향한다.
1713년(계사년) 숙종임금 39년에
경상도 유생 손경장 등의 사액(賜額) 상소에 의하여
동년 예조판서 김우항의 진달로 윤허가 내려져 서산서원(西山書院)이라는
액호(額號: 나라에서 하사한 현재의 현판)를 내려져 사액서원(公認書院)이 되였으며
그리고 임금이 제문(지제교 정유점이 지음)을
예조좌랑 홍도달을 보내 생육신의 영령을 위로하였으며.
이맹전, 조 려, 원 호, 김시습, 남효온, 성담수 등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야 한다고 임금께 상소하여 윤허를 얻어 여섯 분의 제향을 올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1871년(신미년) 고종황제 8년 음력 3월 18일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액서원 중 47개 서원만 남기고 훼철됨에 서산서원도 훼철되어
채미정(采薇亭)에서 생육신의 향사를 봉향하고 있던 중
1980년 정부보조와 유림 및 후손들의 성금으로 대지 3243평 위에 착공하여
1984년 10월 3일(음력 9월 9일) 113년 만에 서원을 복원하여
준공식을 갖고 생육신의 위패를 봉안하여 국천제를 봉향하고 있다.
서산서원의 경내에는
숭의당(崇義堂), 충의사(忠義祠), 육각정(六角亭), 양정당(養正堂), 상의재(尙義齋),
생육신 사적비(生六臣 事蹟碑), 정절공 사적비(貞節公 事蹟碑), 전사청(典祀廳),
소청각(溯淸閣), 숭의문(崇義門 外三門), 경앙문(景仰門, 內三門), 등이 있다.
@ 사단법인 서산서원 역대이사장. @ 사단법인 서산서원 역대원장.
* 초대이사장: 조일제(趙一濟) 1980년. * 초대 원장: 조찬규(趙瓚奎) 1980년
* 2 대이사장: 조병규(趙炳奎) 1983년. * 2 대 원장: 조용소(趙鏞韶) 2002몀
* 3 대이사장: 조일제(趙一濟) 2002년. * 3 대 원장; 조영제(趙英濟) 2004년
* 4 대이사장: 조성훈(趙性勳) 2005년 * 4 대 원장: 조명래(趙命來)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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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배도강설화(虎背渡江說話)는
"영월읍지" "강원도지" "대동기문" 에까지 수록되어 있어 우리는 그것의 사실여부를 따지지않는다.
보다 이러한 이야기가 발생유포된 배경과 원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선생의 행적에 대한 학사대부
들의 찬술이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 이야기는 일반서민들의 선생에 대한 흠모의 정을 보여주는 것으
로 매우 아름다운 자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추강 남효온의 작이라 일러오는 "호도청령포 조옹렴노산"
이라는 시는 이 이야기가 그만큼 오래된 것임을 말해준다.
영월읍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노산군을 영월에 안치시키고 청량포나루에 배를 금지시켜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어계 조려는
함안에 살면서 오백여리나 되는 영월땅을 매월 세 번씩 찾아가서 단종께 문안드렸다. 그는 관란 원호의
초막에서 유숙하며 매일 밤 하늘에 단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정축년 10월 24일 노산군이 승하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밤에 청량포에
당도했는데 역시 배가 없었다. 이에 동서로 방황하며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있다가 날이 밝아오려 하므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강물도 따라 울었다. 조려가 의관을 벗어 등에지고 물을 건너려 할 때 문득 누가
등에 진 옷을 당겨서 뒤를 돌아보니 큰 호랑이 한마리가 있었다. 공이 맣했다.
"상을 당하여 천리 먼길을 달려 왔는데 이 강을 건널 수 없구나 내가 무사히 이 강을 건너 임금의 시신을
염습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건너지 못하면 푸른 물에 빠져 귀신이 될 것인데 너는 어찌 나를 잡아 당기는고"
이 때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고 포구에 엎드리므로 공이 그 뜻을 짐작하고 등에 업혔드니 과연 나루를
건네 주었다. 시소에 들어가 보니 다만 수직하는 사람 둘 뿐이었다. 통곡 사배한 후 옥체를 수렴하고
문을 나오니 호랑이가 다시 강을 건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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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육신 사적비문(生六臣 事蹟碑文) 서산서원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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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간공 경은 이맹전(靖簡公 耕隱 李孟專)선생.
이맹전선생의 자는 백순(伯純)이요 호는 경은이니 벽진(碧珍)인이다. 도원수 희경(希慶)의 손자요.
판서 심지(審之)의 아드님이다. 일찍이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에게 배워 세종조에 등과하여
한림과 사간원 정언을 거쳐 거창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청백리로 칭송이 높았다.
수양의 찬위에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에 낙향하여 거짓 맹농(盲聾)으로 문벆을 나가지 아니하고
숨어 살았다. 항상 영월로 향해서 경배(敬拜)하되 서을을 향해 앉지 않았다. 가난하여도 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그때 선생의 거짓임을 가족도 몰랐는데 다만
점필재 김종직(점畢齋 金宗直)이 알고 이존록(彛尊錄)에 남겼다.
정조때 와서 이조판서의 증직(贈職)과 정간의 시호가 내렸다. 월암서원(月岩書院), 용계서원(龍溪),
서산(西山)서원,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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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절공 어계 조 려(貞節公 漁溪 趙 旅)선생.
조려선생의 자는 주옹(主翁)이요 호는 어계이니 함안인이다. 고려전서 조열(趙悅)의 손자요.
사복시정 안(安)의 아드님이다. 단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태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수양의 찬위에
분개, 제생들과 하직하고 백이산 하 원북동에 숨어 살았다.
단종이 영월에 안치되니 자주 문후를 드렸다. 관란 원호와 공복헌 이수형(李秀亨)과 함께 치악산 에서
성수를 기원하면서 암벽에 제명(題名)했는데 참판 목만중(睦萬中)이 서문을 지어 삼선생의 절의를
찬양하였다.
단종의 승하에 분상렴습(奔喪殮襲)한 사실과 그때 일을 추념(追念)한 남추강의 시가 영월읍지에 있고
동학사(東學寺)에서 김시습 등과 초혼치제(招魂致祭)를 올렸다.
정조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를 정절이라 내렸다. 용계서원, 서산서원, 숙모전에 배향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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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간공 관란 원 호(貞簡公 觀爛 元 昊)선생.
원호선생의 자는 자허(自虛)요. 호는 관란이니 원주인이다. 증 병조참판 원헌(元憲)의 아드님이다.
세종조에 등과하여 직제학으로서 수양의 찬위에 참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단종이
영월에 안치되니 원주서 영월로 옮겨 돌을 쌓아 관란이라 이름하고 임금을 향해 슬퍼하였다.
어계 조려, 공북헌 이수형과 함께 치악산에서 성수를 기원하였고 단종이 사사되시니 복상 삼년하고
일상 기거를 동으로 행했는데 장릉이 동편에 있기 때문이다. 세조의 부름에 나가지 아니하고 저술괴
기록 문헌을 불태워 생졸연월을 알지 못한다.
숙종 무인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정조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를 정간이라 내렸다.
원천석(元天錫)의 칠봉(七峰)서원, 용계서원, 서산서원, 숙모전에 배향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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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간공 매월당 김시습(淸簡公 梅月堂 金時習)선생.
김시습선생의 자는 열경(悅卿)이요. 호는 매월당이니 강릉인이다. 고려때 시중 태현(侍中 台鉉)의
후손이고 충순위 일성(忠順衛 日省)의 아드님이다. 삼세에 능히 시를 지었고 오세에 중용(中庸)과
대학을 통독하니 사람들이 신동이라 했다.
삼각산에서 독서하다가 수양의 찬위를 듣고는 삼일간 문을 잠그고 울었다. 서책과 저술을 불사르고
머리를 깍고 중이되어 편력(遍歷)하면서 세사를 비분하엿다.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엇고 동학사에
들어가 위령제를 지냈다.
성종 계축 홍산 무량사(泓山 無量寺)에서 입적(入寂)하니 향년이 오십구세였다. 많은 시문들과
금오신화(金鼇新話)에서 민본(民本)과 애민(愛民)적인 사상을 보이었다. 정조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를 청간이라 내렸다.
용계서원, 서산서원, 청절사(淸節祠), 창절사(彰節祠), 숙모전에 배향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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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숙공 문두 성담수(靖肅公 文斗 成聃壽)선생.
성담수선생의 자는 이수(耳수)요. 호는 문두이니 창녕인이다. 대제학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이고
교리 희(僖)의 아드님이다. 세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부공이 성삼문의 친족으로 단종 복위의
모의에 연좌(連坐)되어 유배당했다가 풀려나서 별세하시니 이로부터 파주 선대인의 묘하에 은거하여
포의(布衣)로서 세상을 살았다.
그 때문에 선생의 고매(高邁)하신 뜻을 아는이가 적었다. 조가(朝家)에서 경릉(敬陵)참봉을 제수(除授)
했으나 거절하고 서울 땅을 밟지 않앗다. 조카 성몽정이 경기관찰사로 파주에 순지(巡至)하여 선생의
거처를 보고 탄식하고 돌아가서 초석(草席)을 보냈는데 받지 아니하고 돌려보냈다.
정조때 이조판서의 증직과 시호를 정숙이라 내렸다. 용계서원, 서산서원, 물계(勿溪)서원, 숙모전에
배향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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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정공 추강 남효온(文貞公 秋江 南孝溫)선생.
남효온선생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이니 의령인이다. 영의정 남재(南在)의 오세손이고 생원
전의 아드님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기절(氣節)이 호매(豪邁)하였다. 사육신전을 지어 충신의
고절(高節)을 찬양(讚揚)햇고 십팔세의 나이에 소릉복위(昭陵復位)를 항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햇다.
이로부터 세사(世事)와 절연(絶緣)하고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향년이 삼십구세였다. 연산조의 갑자사화에
소릉복위를 추죄(追罪)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중종조에 소릉의 복위와 동시에 신원(伸寃)되었다
육신전(六臣傳)이 간행되엇고 추강령화(秋江령話)와 사우록(士友錄) 등의 선생 유고가 휼륭한 사료로서
세전(世傳)된다
정조때 이조판서의 증직과 문정의 시호를 내렸다. 용게서원, 서산서원, 예양(汭陽)서원, 창절사, 숙모전에
배향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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