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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天符經)』해설(解說)
하나이란 우주의 근본이요, 만유의 비롯되는 수이니 이 하나보다 먼저 비롯됨은 없느니라. 이를 분석하면 한울과 땅과 사람의 삼극(三極)이 되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느니라. 이 한울의 근본인 하나는 창조과정에서 있어서 첫째 번이 되고, 땅의 근본인 하나는 그 둘째 번이고, 사람의 근본인 하나는 그 셋째 번에 되었느니라. 이 만유의 비롯인 하나를 쌓아 나가면 열까지의 끝수에 이르도록 커지되, 아무 부족함이 없이 성수(成數)인 셋으로 화하나니 한울의 음(陰)과 양(陽)인 두 가지는 셋이란 성수의 자리에서 되었고, 땅의 음·양 두 원소(元素)도 셋의 자리에서 되었으며, 사람의 음·양 둘도 이 셋이란 자리에서 이루어졌나니 이 삼극(三極)의 큰 셋을 합하면 육대(六大)의 여섯이 되나니 이 여섯에서 일곱과 여덟과 아홉이 낳아지느라.
셋과 넷으로써 한울과 땅이 운행(運行)을 하며, 여섯을 중심으로 그 앞뒤에 있는 다섯과 일곱으로 서로 가락지와 같은 원형(圓形)을 이루는지라 이 근본과 비롯이 되는 하나는 오묘하게 불어서 우주 사이에 만 번 가고 오되, 그 쓰임은 변하지만 근본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이 근본이란 곧 마음이니 이는 태양에 근본하여 사람의 중심에 밝게 비치니 사람의 근본은 한울과 땅과 같으니라. 하나란 근본으로 돌아가면 마침이 되나니 하나에서 더 마칠 수는 없느니라.일시(一始)의 일은 이치의 근원이요, 생명의 근본이요, 수의 비롯이 되는 까닭에 이 일(一)보다 먼저 비롯될 수는 없다. 또 이 일의 비롯을 무()로 보는 해설도 있으나 일(一)을 역(易)에서와 같이 태극(太極)이라 한다면 무()는 곧 무극(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무극은 태극과 달리 음·양의 동정(動靜)이 없는 때를 말함이요, 사실상 일이란 이치와 일과 물건의 비롯이 된다.
비유하면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胎兒)는 이름도 없고 성적 구별도 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번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 세상에 나오면 이름도 지어지고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갈라진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가 아니오. 그 태반에 있던 아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울과 땅과 사람은 그 이름과 작용은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이치와 근본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 한울의 도[天道]는 창조함을 주장하고, 땅의 도[地道]는 변화시켜 기르는[化育] 것을 주장하고 사람의 도[人道]는 이를 본받아 행함[效行]을 주장한다. 이 창조와 화육과 효행의 작용은 다르지만 그 삼극의 근본됨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근본은 시간적으로 무진(盡)하고 공간적으로 무궁(窮)하다. 한울과 땅과 사람은 그 근본되는 이치는 같다할지라도 창조의 과정에 있어서는 차서(次序)가 다르다. 그러므로 음양학에서 한울은 자(子)에서 열리고, 땅은 축(丑)에서 열리고, 사람은 인(寅)에서 나고, 만물은 묘(卯)에서 생겼다[天開於子 地闢於丑 人生於寅 物生於卯]함은 곧 창조의 시간적 차례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를 숫자적으로 나타낸다면 한울의 근본인 하나는 그 첫째 번이요, 땅의 근본인 하나는 둘째 번이요, 사람의 근본인 하나는 셋째 번이 된다. 하나를 쌓아 열에 이르기까지 크다는 것은 꼭 열[十]이라는 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수의 극한된 백(百), 천(千), 만(萬), 억(億)을 뜻하는 말씀이다. 또 부족함이 없이 셋으로 화한다는 것은 하나에서 쌓아 불어난 많은 수들은 결국 성수(成數)인 셋의 원리에 의하여 화성(化成)됨을 말함이니 지구상에 있는 수십억 인류도 이 셋이란 성수에서 이루어졌고, 저 푸른 한울에 있는 수백억의 별들도 다 이 셋이란 성수의 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울에도 음·양이 있고 땅에도 음·양이 있고, 사람에게도 또한 음·양이 있다. 한울에는 몸이 텅 빈 체허천(體虛天)과 이치가 보이지 않는 이공천(理空天)의 두 갈래가 있고, 땅에는 물·불[水火]의 두 상극(相剋)이 있고, 사람에게는 남·녀의 두 상대가 있는 것이다. 이 한울의 이치와 몸체는 둘이 서로 어울리어 천도(天道)를 이루었고, 땅의 물과 불은 서로 부딪쳐 육지와 바다를 이루어 지도(地道)를 다하였고, 사람은 남녀가 서로 만나 인륜을 지켜 인도(人道)를 빛내었으니 삼극에 있어서 상대성(相對性)의 원리가 아니면 그 도가 쉴 것이다. 그러므로 역(易)에서 한울과 땅이 자리를 정하고, 우레와 바람이 서로 부딪치고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하고, 물과 불이 서로 마주치지 않는[天地定位, 雷風相搏 山澤通氣 水火不相射]다 함은 이 상대의 순리 작용을 말함이다. 그러나 삼극이 음·양 배합으로 이루어짐은 결국 삼차(三次)의 과정인 생(生)·화(化)를 거쳐 성(成)의 단계에서 완성되므로 이를 수로 표현하여 한울과 땅과 사람의 두 상대가 다 셋에서 이루어졌음을 천이삼(天二三)·지이삼(地二三)·인이삼(人二三)이라 한 것이다.
큰 셋이 합하여 여섯이 된다함은 우주의 만유는 한얼님의 신공인 대덕(大德)과 대혜(大慧)와 대력(大力)의 삼대(三大)로서 성·명·정(性命精)의 삼진(三眞)을 받지만 이것만으로서는 형체를 갖추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심·기·신(心氣身)의 삼망(三妄)이 뿌리 박혀서 비로소 육체를 완성하게 된다. 이 삼진과 삼망은 우주의 구성원소인 천·화·전·수·풍·지(天火電水風地)를 상징한 것으로 성품은 한울을 상징하고, 목숨은 불을, 정기는 전기를, 마음은 물을, 기운은 바람을, 몸은 땅을 제가끔 상징한 것이다. 이 육대원소에서 만유가 이루어짐은 천·화·전의 삼양(三陽)과 수·풍·지의 삼음(三陰)이 서로 합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천대(天大)·지대(地大)·인대(人大)의 세 음양이 합쳐서 여섯이 되고, 이 여섯인 모체(母體)에서 일곱과 여덟과 아홉을 낳게 된다.
역(易)에서도 세 번 변하여[三變] 소성괘(小成卦)를 이루고 여섯 번 변하여 대성괘(大成卦)를 이루며, 이 음양배합인 여섯에서 나온 일곱은 소양(小陽) 여덟은 소음(小陰) 아홉은 태양(太陽)이라 하며 여섯은 태음(太陰) 곧 어미와 같은 것이다.
셋과 넷으로 운행한다 함은 한울에서 있어서는 천체(天體)의 운행을 말함이요, 사람에 있어서는 사지(四肢)의 운동을 말함이다. 한 계절(季節)은 석 달이요, 한 해는 네 철[四時]이며 팔다리는 모두 넷이요, 한 지체(肢體)의 마디는 셋으로 되어 있음은 삼변사분(三變四分)의 원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울의 운행과 사람의 운동이나 그 운명(運命) · 운수(運數)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다를 바 있으랴!
다섯과 일곱으로 가락지 같은 원(圓)을 이룬다 함은 다섯은 중궁수(中宮數)로 복판을 차지한 변화의 수[化數]이니 육칠팔구(六七八九)는 이 화수인 다섯에 일이삼사(一二三四)를 더한 것이다. 중궁이란 복판을 말함이요, 또 복판이란 원(圓)의 중심을 뜻한다.
일곱은 독양수(獨陽數)라 하는 바 육칠팔구(六七八九)의 수 중에서 여섯과 여덟은 음수요, 아홉은 셋과 셋을 곱한 양수이지만 일곱은 양수와 양수를 곱하여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곱은 양중(陽中)의 양수라 하며 이 수는 한울에서는 태양을 상징하고 땅에서는 남방이칠화(南方二七火)를 상징한다. 이 불은 양중의 양물(陽物)로서 그 형상은 원(圓)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다섯과 일곱은 여섯의 앞뒤에 자리하여 항상 천운(天運)의 순환(循環)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라고 하는 이 근본수는 주체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지마는 작용에 있어서는 천만 가지의 상태로 오묘하게 불어 나간다.
그러므로 인류가 수없이 늘어나고 만물이 한없이 번식함은 다 이 하나의 작용이 있음으로서이다.
그러나 천지의 운행이 몇 억만 년을 지나도 사시(四時)의 차서(次序)는 변함이 없고, 만물의 생성변화(生成變化)가 이 땅 위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일어나건만 그 근본원리에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가 묘하게 불어 만 번 오고 가더라도 작용은 변하고 그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근본은 곧 마음의 근본이요, 마음의 근본은 참 성품[眞性]이다. 이 성품이 태양과 같이 밝게 사람의 속마음에 비치면 마치 한울 복판에 태양과 같이 높이 솟아 우주를 환하게 비쳐줌과 같이 성품에 의지한 마음이 가달길을 돌이켜 참에로 돌아오나니 이같이 하면 사람은 천지의 중간에서 그 근본과 도를 천지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은 만물 중에서 영특하게 빼내어 위로 한얼에 합하고 아래로 뭇별에 응하는지라, 그 도는 천지와 같이 한다[惟人秀於物上合明下應星辰其道與天地參]함은 이 뜻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에서 마친다 함은 천운의 순환이 일 년 중에서 동지로부터 일양(一陽)이 시작하여 다시 제자리로 환원(環元)함은 그 해의 돌아감을 마쳤다 함이요, 사람이 세상에 왔다가 타고난 근본 자리로 돌아감은 인생살이를 마쳤다 함이요, 물이 근원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바다로 들어가 태양의 열을 받고 수증기로 떠올라 비가 되어 다시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도 또한 흐름을 마쳤다 함이다.
이와 같이 만 가지 이치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가면 마침이니 이 근본인 하나에서 비롯하고 하나에서 마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쳤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시 영원히 계속되어 사실상 그 마침이 없으며, 또한 하나인 자리에서 더 나갈 수도 없고 이밖에 더 마칠 수도 없는 것이다.
『천부경(天符經)』내용(內容)
천부경은 글자의 뜻 그대로 「한울 보람[天符]」 곧 한울의 신비를 암시한 글인데 하나로부터 열까지의 수리(數理)에 의하여 천지창조(天地創造)와 그 운행의 법칙, 또는 만물의 생장성쇠(生長盛衰)하는 원리를 여든 한자의 짧은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우주와 인생이 한얼님의 조화신공(造化功)으로 되었고 한울 · 땅 · 사람의 삼극(三極)도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며 또 사람의 마음이 태양에 근본하여 한울과 같다는[天人一理] 그 원리를 가르치시었다. 그리고 천체(天體)의 무형(無形)함이 원적(圓的)으로 되어 있고, 그 운동의 궤도(軌道)도 원형(圓形)으로 운행함과 같이 사람의 참 성품[眞性]도 이 원형을 본떠 작용한다는 것이다.
우주의 만유(萬有)는 하나마저 없는 데서 이치[理]를 일으켜 다시 기운[氣]을 타고[稟] 바탕[質]을 갖추고 모습[形]을 갖게 된다. 이 점은 한울이나 땅이나 사람이 창조된 순서는 다르다 할지라도 그 다함 없는 본체(本體)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쓰임[用]의 변화는 있을망정 근본(本)의 움직임은 없는 것이다.
이 움직임이 없는 근본을 주체[體]로 삼고 나고[生], 되고[化], 이루는[成], 변화를 쓰임[用]으로 삼아 한울과 땅과 사람과 물건의 모든 원리를 밝힌 것이 곧 「천부경(天符經)」에 나타나 있는 하나[一]로부터 아홉[九]까지의 수를 풀어 나가면 열[十]은 완성된 마감 종수(終數)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면, 하나{一]는 수의 시작이고 원(圓)의 약수(約數, 率)이며 우주의 본체수(本體數)를 뜻한다. 곧 상대가 없는 절대수(絶對數)이기 때문에 하늘을 가리키므로 계수(計數)보다 의미로 보는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뚫는다[吾道一以貫之]고 했고, 석가는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萬法歸一]했으며, 노자는 하나는 둘을 낳는다[一生二]했고, 대종교(大倧敎)에서는 세 참함이 하나로 돌아간다[三眞歸一]라고 한 것이다.
둘[二]은 방(方)의 약수(約數)로서 하나가 낳는[生] 수라면 둘은 자라서[長] 변화하는 화수(化數)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하늘을 뜻하면 둘은 땅을 의미한다. 하나가 둥근 수라면 둘은 네모진 수요, 하나가 양(陽)이라면 둘은 음수(陰數)이다.
셋[三]은 각(角)의 약수(約數)로서 이루어지는 성수(成數)이다. 둘이 땅을 뜻한다면 셋은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셋은 돌고 돌아 다함이 없는 수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이치는 하나로써 떳떳함을 삼고 셋으로 변함을 삼는다[天地之理以一爲尙, 而以三爲變]이라 하였다. 이 셋이 아니면 하느님의 신공(神功)이 이루어질 수 없어 만물이 완전하지 못하고 삼일(三一)의 진리도 성립되지 못한다.
넷[四]은 방(方)의 주체되는 체수(體數)요, 만물이 이루어진 작용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 수이다. 그러므로 방위에는 동서남북의 사방이 있고, 계절에는 춘하추동의 사시(四時)가 있고, 사람의 몸에는 팔, 다리 사지(四肢)가 있다.
다섯[五]은 선천(先天)의 중궁(中宮)을 차지한 수로써 넷이 만유가 이루어진 작용을 나타내는 수라면 다섯은 생성(生成)의 형태를 차지한 수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과 사람에게는 물[水]·불[火]·나무[木]·쇠[金]·흙[土]으로 오행(五行)의 기운이 있고, 도(道)에는 어짊[仁]과 옳음[義]과 예(禮)와 지혜[智]와 믿음[信]의 오상(五常)이 있으며, 빛[色]에는 푸른 것[靑]과 누른 것[黃]과 붉은 것[赤]과 흰 것[白]과 검은 것[黑]의 오색(五色)이 있고, 맛[味]에는 신 것[酸]과 짠 것[鹹]과 매운 것[辛]과 단 것[甘]과 쓴 것[苦]의 오미(五味)가 있고, 내장(內臟)에는 염통[心臟]·간장(肝臟)·지라[脾臟]·허파[肺]·콩팥[腎臟]의 오장(五臟)이 있으며, 사람 몸의 손과 발가락도 오지(五指)로 되어 있다.
여섯[六]은 원(圓)의 주체와 쓰임[體用]을 겸한 수로써 우주의 원소(原素)인 하늘[天]·불[火]·전기(電氣)·물[水]·바람[風]·땅[地]의 육대(六大)를 대표한 수이다. 그러므로 만유의 어미[母]인 노음수(老陰數)에 해당되며 성수(成數)인 셋의 배수(倍數)이기도 하다.
일곱[七]은 만유의 생성된 부문을 상징하여 나타내는 수이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일·월·화·수·목·금·토(日月火水木金土)의 일곱 성계(星界, 七曜)가 있고, 무지개[虹]에는 일곱 빛[七色]이 있으며, 사람 머리에는 귀[耳]·눈[目]·입[口]·코[鼻]의 일곱 구멍[七竅]이 있다.
여덟[八]은 방(方)의 쓰임 수[用數]로 그 체수(體數)인 넷의 배수(倍數)이며 역(易)에서 말하는 태음(太陰)·태양(太陽)과 소음(少陰)·소양(少陽)이 변성(變成)한 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괘(卦)는 여덟으로 이루어진다.
아홉[九]은 각(角)의 쓰임 수[用數]로서 셋의 초승수(初乘數)요, 여덟이 입체적(立體的) 수라면 아홉은 각추적(角錐的)인 역할을 하는 수이다. 넷과 짝하여 노양(老陽) 수를 이루며 그리고 수의 가치로 제일 윗자리가 되고 성수(成數)의 가장 높은 수이다. 그러므로 음양학(陰陽學)에는 구궁(九宮)의 법칙이 있고, 사람 몸의 위아래에는 아홉 구멍[九竅]이 있는 것이다.
대체 이 수에 있어서 하나[一]와 다섯[五]과 일곱[七]은 형상으론 원(圓)이 되고 그 쓰임에는 고르게 변화함을 나타내고 뜻으로는 중심이 되며, 셋[三]과 여섯[六]과 아홉[九]은 운동과 성립을 뜻하고, 둘[二]과 넷[四]과 여덟[八]은 나눔과 형상을 나타내는 수이니 일삼오칠구(一三五七九)의 양수(陽數)는 시간적인 것을 의미하여 움직임을 상징하고, 이사륙팔십(二四六八十)의 음수(陰數)는 공간적인 것을 뜻하여 고요함을 표상(表象)하는 수이다.
『천부경(天符經)』전문(前文)
무릇 하늘엔 운수(運數)가 있고 땅에는 이치(理致)가 있으며, 인사(人事)엔 법도(法度)가 있다.
큰 고이[德]로 만들고 큰 슬기로 가르치며 큰 힘으로 다스림이 하늘의 권능(權能)이요, 곧게 낳고 곧게 되며 곧게 이룸이 땅의 효능(效能)이며, 바로 느끼고 바로 숨쉬고 바로 부딪침이 인간(人間)의 지능(知能)이니, 만물(萬物)의 시작과 끝·모이고 흩어짐·만나고 헤어짐·조이고 풀림·흐르고 멈춤·가고 오는 모든 현상(現象)이 이 운도(運度) 속에 존재한다.
천부경(天符經)은 이러한 원리(原理)를 징험(徵驗)한 하늘의 예언서(豫言書)로, 물리(物理)에 있어서는 구심(求心) 즉(卽) 원심(遠心)임을 일깨우는 변화무쌍(變化無雙)의 과학(科學)이요, 수행(修行)에 있어서는 외허(外虛)인 듯 내공(內空)의 성력(聖力)을 북돋는 현묘운기(玄妙運氣)의 비방(秘方)이며, 철학(哲學)에 있어서는 신리(理)로써 인생(人生)을 꿰뚫는 천인관통(天人貫通)의 고전(古典)이요, 경전(經典)에 있어서는 천경(天經)으로서 속경(俗經)의 질서(秩序)를 바로 세우는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진경(眞經)이다.
그러므로 천수(天數)·지리(地理)·인사(人事)의 기본이 되는 만듬의 섭리(攝理)가 이 틀에 있고 가르침의 묘리(妙理)가 이 속에 숨쉬며 다스림의 순리(順理) 또한 이 안에서 작용하니, 인간(人間)의 사상(事象)이 아무리 넓고 크다한들 천부(天符)의 추천(鞦韆)에 불안좌정(不安坐定)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천부경(天符經)이야말로 이와 같은 불안(不安)과 무질서(無秩序)의 세상(世上)을 안정(安定)과 질서(秩序)의 세계(世界)로 정치(正置)시키는 대종교(大倧敎)의 고래(古來) 경전(經典)이요 민족(民族)과 인류(人類)의 옥경보전(玉經寶典)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시종(始終)과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철리(哲理)를 담은,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한 불멸(不滅)의 진리태(眞理態)다.
까닭에 선(善)한 마음으로 접하면 천심(天心)이 열리고 악(惡)한 마음으로 접하면 인심(人心)이 망가지며, 맑은 기운(氣運)으로 대하면 천경(天鏡)이 비추고 흐린 기운(氣運)으로 대하면 홍진(紅塵)이 뒤덮으며, 두터운 뜻으로 받들면 천기(天氣)가 감응(感應)하고 엷은 뜻으로 받들면 속기(俗氣)가 몸을 덮나니, 천부경(天符經)은 실로 견성(見性)과 연성(煉性) 그리고 솔성(率性)의 삼합(三合)을 통한 성통공완(性通功完)의 귀감(龜鑑)이요 자비(慈悲)와 천도(天道) 그리고 인의(仁義)의 삼화(三和)를 통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나침반(羅針盤)으로, 우리 종문(倧門)《삼일신고(三一誥)》의 주경(主經)이요《참전경(參佺經)》의 모전(母典)임을 받들어 새긴다.
대종교 종경 편수위원회
천부경(天符經)』내력(來歷)
우리 천손 천민의 배달겨레는 개천 이래로 위대하고 거룩한 3대 경전으로 조화경인《천부경》과 교화경인《삼일신고》와 치화경인《참전계경》이 있다. 81자로 구성된《천부경》은 한배검께서 천부삼인을 가지시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인간을 넓고 크고 유익케 하기 위하여 만백성을 가르치실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참 경전이다.
말로써 전해 오던 것이 신지 혁덕(神誌 赫德)에 의하여 녹도문자(鹿圖文)로 기록되었고, 뒤에 신라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께서 신지[*글을 맡은 사관 벼슬이름]가 쓴 그 천부경이 전자(篆字)로써 옛 비석에 적힌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작은 수첩에다 한자로 옮겨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경전이 오랫동안 묻히게 되었는데, 특히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유교의 책만을 읽게 하고 이를 돌보지 아니 하였고, 그러는 동안 개천 4373(1916)년에 일시당(一始堂) 계연수(桂延壽) 선생께서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개천 4374(1917)년 대종교에 전했으니, 당시 계연수 선생의 편지는 아래와 같다.
"제가 일찍이 스승에게서 들으니,
「동방의 거친 땅을 개척하신 할아버지 단군님은 한얼 사람(신인)이시라,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잡으시고 한울로부터 세상에 내려오사 그 덕화가 행하여진 지 이제 사천여년이 되는지라. 그 동안 어두움에 빠져서 이 삼인이 어떠한 것인지 또는 어떠한 보물인지를 알지 못하였나니 이 천부는 곧 단군께서 교화를 베푸신 글이라. 오히려 이제야 세상에 전하게 되니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재액이 변화하여 길한 상서(祥瑞)가 되고, 어질지 못한 이가 변화하여 착한 이가 되나니 이같이 오랫동안 도를 이루면 자손이 번창하고 장수함과 부자됨이 계속되어 반드시 신선 결과를 얻을 것이요, 다만 어리석은 이라도 이 책 한 권을 감추어 가지면 가히 재앙을 면하리라」하신 바,
[원본대조]
계연수서탑천부경원본어묘향산석벽송래시서(桂延壽書搭天符經原本於妙香山石壁送來時書)
복(僕) 상문지사(嘗聞之師)하니 동방개황지조 단군(東方開荒之祖 檀君)은 신인(人)이시라 지천부삼인(持天符三印)하시고 자천강세(自天降世)하사 덕하대행우금사천여년(德化大行于今四千餘年)이라 사재홍몽(事在鴻濛)에 미지삼인(未知三印)이 위하물(爲何物)이오 여하보물이천부(如何寶物而天符)는 즉설교지경야(卽設敎之經也)라 상금유전처(尙今遺傳處)하니 인약득이송지즉재액(人若得而誦之卽災厄)이 하위길상(化爲吉祥)하고 불량화위인선(不良化爲仁善)하니 구구성도칙자손(久久成道則子孫繁昌)하고 수부연면(壽富連綿)하여 필득선과(必得仙果)요 단우매자(但愚昧者)라도 장지일본(藏之一本)이면 가면재앙의(可免災禍矣)라
제가 이를 마음속에 새겨 두고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였더니 정성껏 성품 단련함을 기능으로 삼고, 약 캐기를 업으로 삼아 명산에서 구름과 놀기를 십여 년 동안 하다가 지난 가을에 태백산(*묘향산의 옛 이름)에 들어가서 유심히 깊은 골짜기를 걸어감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곳에 이르니, 시내 위 돌 벽에 옛날에 새겨 놓은 것이 있는 듯한지라. 손으로 바위에 낀 이끼를 쓸고 보니 글자 획이 분명한《천부경》이 나타나는지라. 두 눈이 문득 밝아옴에 절하고 꿇어앉아 공경히 읽으니, 한편으로 한배검의 보배로운 글임에 기쁘고, 한편으론 고운 선생(신라 말엽의 학자 최치원의 호)의 기적(奇跡)이 있음에 기뻐한지라.
운이복(云而僕)이 명재심중(銘在心中)하고 구지불득의(求之不得矣)리니 준련성위공(浚乃鍊成爲工)하고 채약위업(採藥爲業)하여 운유명산십허년의(雲遊名山十許年矣)하다가 작추입태백산(昨秋入太白山)하여 신보궁원(信步窮源)에 행도인적불도지처(行到人跡不到之處)하니 간상석벽(澗上石壁)에 약유고각(若有古刻)이라 수소태선(手掃苔蘚)하니 자획분명(字劃分明)에 과시천부신경(果是天符神經)이라 쌍안(雙眼)이 홀명(忽明)에 배궤경독(拜跪經讀)이라 일이희단군천조지보경(一以喜檀君天祖之寶經)이오 일이희고운선생지기적(一以喜孤雲先生之奇蹟)이라
마음속에 가득하여 이를 얻음에 옛 스승이 허황한 말씀을 하지 않았음을 비로소 깨닫고 이에 백 걸음이나 돌을 쌓아 그 길을 기억하게 하고, 돌아와 종이와 먹을 가지고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니 전 날의 지나던 곳이 아니라 동서로 찾다가 마침내 산신령에게 빌며 사흘 밤을 자고 비로소 찾아 얻으니, 이때는 구월 구일(서기 1916년)이라 겨우 한 벌을 박으니 글자가 심히 흐릿하여 다시 박으려 하니 구름과 안개가 문득 일어나는지라.
심중(心中)에 충연(充然)하여 약유소득(若有所得)에 시각오사불발허언(始覺吾師不發虛言)하고 내백보척석(乃百步疊石)하여 기기도룍(記其道路)하고 귀휴지묵(歸携紙墨)하여 갱입산중(更入山中)하니 비복전일경과처(非復前日經過處)라 동심서멱(東尋西覓)에 암도산령(暗禱山靈)하여 삼숙이시득(三宿而始得)하니 시구월구일야(時九月九日也)라 재탑일본(纔搭一本)하니 자심모호(字甚模糊)라 갱욕탑지(更欲搭之)하니 운무홀기(雲霧忽起)라
이에 그만 산 절[山寺]로 돌아와 밤이 새도록 풀어 보았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젊어서 배움이 짧고 늙어 총명함이 덜어짐으로 다시 연구하여 뚫을 길이 없고 다만 입으로 읽을 뿐이더니 마침 서울에서 온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서울에 단군교가 있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심히 기뻐서 뜻으론 가 보고자 하나 걸음이 어긋나서 그 뜻을 수행하지 못하고 덧없이 봄이 되는지라. 길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 박은 책을 드리오니 바라건대 이 글 뜻을 잘 풀어 중생을 열어 가르치면 그들이 반드시 복록을 받고 교운(敎運)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그윽이 귀교(貴敎)의 하례(賀禮)가 됨이여, 또 들으니 단군 때에 신지의 옛 글자가 고구려에 전하여졌다 하니 깊이 구하여 만일 얻으면 다시 응당 보낼 계획이오나, 얻으면 다행이요, 얻지 못하면 보내지 못할지라도 신용이 없다 하지 마시고 양해하시기를 바라노라.
내간관이반산사(乃間關而返山寺)하여 종야해석(終夜解釋)하되 불득요령(不得要領)하니 자고소단학식(自顧少短學識)에 노멸총명(老滅聰明)으로 무복연지도(無復硏之道)하고 단구송이이의(但口誦而已矣)하니 적유자경래인(適有自京來人)하여 설도경성(說到京城)에 유단군교운이(有檀君敎云耳)라 문심흔연(聞心欣然)하여 의욕궁왕(意欲躬往)이나 족적(足跡)이 저어(齟齬)하여 이득수의(未得遂意)하고 임재발춘(荏재(草+再)發春)이라 노봉귀경인(路逢歸京人)하여 자이탑본(玆以搭本)을 헌상(獻上)하오니 망수해석경지(望須解釋經旨)하여 개유중생칙중생(開喩 衆生則衆生)이 필수복록(必受福祿)하고 교운(敎運)이 종차발여의(從此發與矣)리니 절위귀교하지(竊爲貴敎賀之)하오며 우문신세(又聞檀世에 유신지씨고문자(有神誌氏古文字)하여 전래우고려운(傳來于高麗云)하니 절유구지(竊惟求之)하여 약득지(若得之)면 갱당부정위계(更當付呈爲計)나 연득지칙행의(然得之則幸矣)요 약불득이불송(若不得而不送)이라도 물이무신(勿以無信)으로 수량언(垂諒焉)하노라.
성심으로 수도함을 빌면서 정사(丁巳) 정월 초열흘 날
위축성심수도정사정월초십일(爲祝誠心修道 丁巳正月初十日)
향산유객(香山遊客)·계연수(桂延壽) 재배(再拜)
향산유객 계연수 재배(香山遊客 桂延壽 再拜)
단군교당(檀君敎堂) 도하(道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