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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6.26 순교자 시복시성 기도로 육이오에 돌아가신 7명의 신부님들의 시복시성 되시기를 우리는 항상기도하고있습니다. 성직자 묘지도 새로 훌륭하게 개축중이고 이제 새봄에 잔디만 입히면 우리성당을찾는이들에게여기 묻히신 분들의 내력을 알려드리는것도 좋은생각같아 이난을 만들었습니다 많이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7분이외에 두분의 주교님이 계시고
전쟁후 사목하시다 돌아가신 신부님이 우리가 들어와 보는 왼쪽부분에 11명의 신부님이 우리
성직자 묘소에 계십니다.
춘천교구 6.25 순교자시복시성기도문
○세상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을 보내 주시고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신앙의 열정을
하늘나라 완성을 위한 씨앗으로 삼으신
전능하신 아버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섭리는 강산을 닮아 아름답고
선한 이들이 사는 이 땅에도 일찍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고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해 주셨나이다.
○이념대립과 분단의 상처 속에서 온 산하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을 때에도
착한 목자들과 충실한 신앙의 증인들을 보내 주시어
사랑이 미움보다 위대함을 알게 해 주셨음에 감사하나이다.
●지금도 저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죄와 현실의 유혹에 맞서 싸우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선조들의 믿음과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배우고
세상 끝 날까지 그 믿음을 용감히 전하고 선포하게 하소서.
◎또한 당신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춘천교구의 6.25 순교자들에게
하루 빨리 시복시성의 영광을 허락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춘천교구의 주보이신 예수성심! ◎저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한국의 모든 성인 성녀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직자 묘소 배치표시도(사진설명부분)
성직자묘소로 들어오시면 오른쪽부분에 계시는 신부님들 7분이 한국전쟁시 북한군에게 납북되어사망하거나
한국에서 납치후 사망하신 신부님들입니다.
사진상에서 앞줄에 계시는 7분신부님은 아라비아숫자로 위치를 표기했습니다.
1.카나반프란치스코신부. 2.김교명베네닉도신부.3.라바드리시오신부.4.백응만다마소신부 5.고안토니오신부.6.이광재디모데오신부. 7.진야고보신부
뒤쪽으로 주교님두분은 알파베트순으로 표기했습니다.
a.구인란 토마스 주교님 b.박토마주교님
**들어가면서 왼쪽에 계시는 신부님들은 일반적으로사망하신신부님들**
위치 뒤쪽부분에서계시는 신부님들은
오른쪽부터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했습니다.
1.임요한신부님 2.공토마스신부님
위치 앞쪽으로부분으로는오른쪽부터 알파베트순으로
a.박청근 베네딕도신부님. b.김종석토마신부님. c.송정식토마신부님. d.이관욱베드로신부님. e.황영택요한신부님. f.오세철 가브리엘신부님
g.천신기요한신부님. h.주영덕비오신부님. I. 방영구베스테르신부님
먼저 6,25때 순교하신 신부님을 소개 하겠습니다.
1.카나반프란치스코신부
1.손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 《1915.2.15∼1950.12.06》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1915년 2월 15일 아일랜드에서 태 어나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1949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듬해인 1950년, 손신부가 춘천에서 한국말 을 배우며 사목활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났 다. 그래서 미군들이 선교사들을 피신시키려하자 당시 교구장인 구인란(Thomas F.Quinlan)주교는 양들을 지키 기 위해 피난을 거부하면서,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았던 손신부에게는 떠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떠나지 않고 주교와 함께 남아 있었다. 일주일후 공산군은 성당안까지 들어와 주일미사를 봉헌하던 구주교와 손신부를 체포하여 감옥으로 데려 갔다.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다른 성직자 수도자들 및 수백명의 전쟁포로들과 함께 북한 깊숙이 압송되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내몰렸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들과 포로들이 사살 당하거나 더러는 지쳐 쓰러져 죽었다. 손프란치스코 신부도 1950년 12월 6일 폐렴으로 병사하여 구인란 주교와 동료들의 손에 의해 차디찬 압록강변에 묻혔다.
[출처] 춘천교구 6.25 순교자들 (강릉 옥천동 성가정성당) |작성자 야생화
2.김교명 베네 닉도 신부님
2.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1912.07.15∼1950.06.26 연행 이후 행방불명》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1912년 7월 15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에서 태어났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그 의 어린시절이나 신학교를 가게 된 경위들에 대해서는 자 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39년 6월 24일, 김교명 신부는 그해 4월 25일에 설립된 춘천교구의 첫 번째 방인사제로 서품되었고, 풍수원본당 이광재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사재생활을 시작하였다.
1942년 5월, 일제 당국에 의해 미국인 신부들이 추방되자, 사제가 부족해진 평양교구는 타 교구에 의해 미국인 신부 들이 추방되자, 사제가 부족해진 평양교구는 타 교구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때 김교명 신부도 평양교구로 파견되었다. 그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기에 사목 활동이나 교회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원만한 성품과 열성으로 극복했고, 1944년 말 평양교구에 파견되었던 타 교구소속 신부들이 본 교구로 돌아갈 때에도 목자없는 양들을 위해 의주본당에 남아 사목활동을 계속하였다. 해방 후 공산정권 수립으로 종교 생활이 여의치 못하고 신변에 위협도 다가왔으나 김교명 신부는 단호히 월남을 거절하고 임지를 지키며 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교구장주교와 사제들이 차례로 체포 또는 납치되는 가운데 거의 연금 상태에 있던 중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고 다음날 새벽(6월 26일) 김교명 신부도 연행되어 의주 보안서에 일주일간 억류되었다. 그 후 아무도 그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출처] 춘천교구 6.25 순교자들 (강릉 옥천동 성가정성당) |작성자 야생화
3.라바드리시오신부님
3.라 바드리시오(Patrick Reilly) 신부 《1915.10.21∼1950.08》
바드리시오 신부는 1915년 10월 21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았다.1947년 한 국에 온 라 바드리시오 신부는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원주에서 사목하였으며, 1949년 묵호본당 주임으로 부임 하였다. 지역에서 영어도 가르치면서 사목을 하던 중 전쟁 이 발발했다. 이에 교우들이 배를 마련하여 피난할 것을 청했으나,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 갈 수 없다”면서 거절하였다.
공산군이 들어오자 라신부는 전교회장의 집의 작은 골방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몰래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라신부는 이미 순교를 각오한 듯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자신으로 인해 교우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염려하던 라신부는 결국 공산군에게 체포되었고,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매질을 당하며 끌려갔다. 라 바드리시오 신부는 이후 다른 포로들과 함께 묵호에서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아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불안해 하던 공산군에 의해 밤재굴에서 총살 당해 순교했다. 후일 군종사제와 교우들이 도로변에 묻힌 라신부의 유해를 찾아내 묵호 경비사령부 앞에 매장하였다가 묵호성당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출처] 춘천교구 6.25 순교자들 (강릉 옥천동 성가정성당) |작성자 야생화
4.백음만 다마소신부님
4. 백응만(白應萬 다마소)신부《1919∼1950.1》
백응만 다마소 신부는 1919년 황해도 신계군 고면 삼차동 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다니던 즈음 강원도 이천으로 이사 하여 어린시절을 보냈다. 1939년 소신학교를 졸업한 후 용 산대신 학교에 진학했고, 1945년 11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아 신부가 된 후, 서울 혜화동본당 보좌로 임명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공산화된 이북지역의 종교상황이 악화되어 많은 성직자들이 위험을 피해 남하하였고, 이에 당 시 서울교구장 겸 춘천교구장 서리였던 노기남 주교는 백 응만 신부를 38선 이북의 평강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냈다.
그러자 가면 죽는다는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응만 신부는 교회와 장상에 대한 순명의 정신으로 1947년 7월 초 38선을 넘었다.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무릎쓰고 평강본당에서 양들을 위해 사목 활동을 하던 백응만 신부는 1949년 4월초 본당 사제 관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공산군은 백응만 신부를 끌어내어 양팔을 뒤로 묶고 눈을 가린 채 밧줄로 묶은 맷돌을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게 하였다. 이후 백응만 신부는 원산과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초를 당하다가 1950년 1월초에 옥사했다. 당시 백응만 신부의 시신은 감옥 근처 밭에 버려져 있었는데, 백응만 신부의 얼굴을 알던 수사가 피난 갔다 돌아오면 처리하기 위해서 큰 돌로 표시를 해 놓고 갔고, 이후 평양 교외에 안장되었다.
[출처] 춘천교구 6.25 순교자들 (강릉 옥천동 성가정성당) |작성자 야생화
고 안토니오 신부님
5. 고 안토니오(Anthony Collier) 신부 《1913.6.20.∼1950.6.27.》
고 안토니오 신부는 1913년 6월 20일 아일랜드에서 태어 나 1938년 12월 21일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사제 품을 받고, 그 이듬해인 1939년 선교사로 한국에 했다. 일제 말의 혼란기에 말을 배우며 연금과 추방을 경험 한 한 후 강릉과 횡성본당의 보좌를 지낸 고 안토니오 신부는, 1950년 1월 5일 춘천 시내에서 두 번째 본당으로 신설된 소양로본당 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소양로본당에 부임하여 성당을 지을 준비와 함께 사목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앞마당에까지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성당에 남아 교우들을 돌보던 고신부는 6월 27일, 복사였던 김 가브리엘과 함께, 춘천을 점령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공산군은 한적한 강변으로 그들을 끌고 가 아무런 예고 없이 총을 쏘았고, 고 안토니오 신부는 복사를 안고 쓰러졌다. 그 자리에서 고 안토니오 신부는 순교했고, 김 가브리엘은 총상은 입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났다. 1951년 10월, 교우들은 살아난 김 가브리엘과 함께 얼굴과 팔에 총상을 입고, 항상 차고 다니던 성패가 있는 고 신부의 유해를 수습하여 죽림동성당 뒤뜰 성직자 묘역에 안장했다.
[출처] 춘천교구 6.25 순교자들 (강릉 옥천동 성가정성당) |작성자 야생화
6.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1909.06.09∼1950.10.09》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1909년 6월 9일 강원도 이천군 낙 양면 냉골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가난하지만 열심한 가정 에서 신앙생활하며 자란 그는, 1923년 9월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의 길 을 준비하게 되었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탓에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타고난 성실함과 노력으 로 나중에는 동료들로 부터도 인정 받는 뛰어난 품성과 성 덕을 갖출 수 있었다.
1936년 3월 28일, 사제품을 받은 이광재 신부는 강원도 횡 성군 소재 풍수원본당 보좌로 임명되어 열성적이면서도 헌신적 사목에 임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프란치스코 3회 회원이 되어 복음적 가난과 완덕의 삶을 살 고자 했다. 1939년 양양본당 주임사제로 부임한 이광재 신부는 강원도 산골 마을 교우들의 영혼을 돌보았고, 양양성당을 건축하는 등 교회와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해방 후 38선 이북인 양양이 공산화되자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고, 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무사히 넘어가도록 도와 주었으나 정작 본인 은 “양들을 두고 갈 수 없다.” 며 월남하지 않았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끝까지 남아 교우들을 돌보고 성사를 집전하던 이광재 신부는 공산당에게 체포되었 고, 1950년 9일 새벽, 원산 방공호에 인민군의 총탄으로‘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었다.
[출처] 춘천교구 6.25 순교자들 (강릉 옥천동 성가정성당) |작성자 야생화
7.진야고보 신부님
7.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 《1911.11.15.∼1950.07.04》
진 야고보 신부는 미국 몬타나 (Montana, USA)주에서 1911년 11월 15일에 태어나, 1935년 12월 21일 사제서 품을 받고 이듬해인 1936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말을 배우 며 광주교구에서 선교사제의 삶을 시작한 진신부는,1939년 신설된 춘천교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적국 출신 사제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연금했기에 정상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고, 해방 후에야 비로소 홍천본당 주임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1949년 휴가를 마치고 입국한 진 야고보 신부는 새로 생 긴 삼척본당의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신앙의 불모지였던 바닷가에서 진신부는 친절과 사랑으로 주민들을 대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진 야고보 신부가 삼척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지 일년도 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다. 신자들은 진신부에게도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피난 가는 신자들에게 지니고 있던 돈을 나누어주며 곤궁에 처할 때 쓰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성당을 지켜야 한다고 하며 떠나지 않았다. 이후 공산군이 삼척을 점령하면서 진 야고보 신부는 체포되었고, 총구 앞에서도 차분하고 의연하게 감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며칠 뒤인 7월 4일 하천변 야산에서 순교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발견하여 가매장하였다. 진 야고보 신부의 유해는 1951년 10월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출처] 춘천교구 6.25 순교자들 (강릉 옥천동 성가정성당) |작성자 야생화
오른쪽앞줄에 계시는 신부님들 소개에 이어
그 뒷쪽으로는 두분의 주교님이 잠들어 계십니다.
오른쪽에 계시는분이
a.구인란 토마스 주교님
그위쪽에 계시는분은
b.박토마 주교님
성직자묘지에 들어오셔서 오른쪽에 계신분은 모두 소개해올렸습니다
다음 처다보시는쪽의 왼쪽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왼쪽 앞줄에 9분이 나란히 영면하고 계십니다.
오른쪽부터 소개드립니다.
a.박정근베네딕토신부님
b.김종석토마스신부님
c.송성식 토마스 신부님
d.이관욱 베드로신부님
e.황영택요한신부님
F.오세철 가브리엘 신부님
G.천신기 요한 신부님
H.주영덕 비오신부님
I.방영구 베스테르 신부님
앞줄에 9분의신부님 뒷줄에 계신신부님들은
오른쪽에 계신분은
1.임요한 신부님
2.공토마스 신부님
이상으로 성직자 묘소에 영면하고 계시는 20분 신부님 계신 위치를 설명 드렸습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제 기억에 남는 신부님은 공토마스 신부님과 방영구 실베스테르 신부님 두분입니다
어릴적 중앙시장 쪽에서 성당으로 걸어오시는 두 신부님을 만나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가락에 끼신 반지에 입술을 맞추곤했지요 두 분 신부님은 체격도 좋으시고 인자하신 분으로 돌아가신 탁순임 수산나 어머님 께서도 생전에 저와 함께 많은 추억담을 나누곤 했습니다. 어느새 일흔을 앞둔 제 기억에 남아계신 두분 신부님을 추모하며 하느님 나라에서 영생하실것을 믿으며 기도드립니다/송광호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