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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김완(金浣)에 대한 초사(招辭), 『해소실기』 작성자 한길
[출처] 임진왜란 史料연구소, http://blog.naver.com/hangiree/30006073953
[1918년 간행된 조선 중기의 문신 김완의 시문집.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내용 요약]
3권 1책. 목판본. 1918년 11대손 우상(羽祥)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장석영(張錫英)·유필영(柳必永)의 서문이, 권말에 이매구(李邁久)의 발문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에 시 1수, 용사일록(龍蛇日錄)·서술(敍述)·군지(郡誌)·전(傳) 각 1편, 권2·3은 부록으로 정문(呈文)·행장·묘갈명·유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용사일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까지 저자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체험한 전쟁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전쟁상황, 특히 해전의 전황과 일본에 끌려간 우리 동포들의 생활상 및 탈출현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1592년의 일록에는 거북선의 구조와 기능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1595년의 일록에는 군량미 조달상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1597년의 기록에는 바다에서의 격전상황과, 저자가 왜인의 포로가 되어 일본 마가코라고구라(曲高羅小倉)에 끌려가 겪은 역경과 탈출시도, 그리고 다른 포로들의 생활상과 동포애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밖에 필사본 「용사일록」의 일부가 근래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원종공훈녹권(原從功勳錄券)’이 실려 있다. 그 밖에 군지·전·정문 등은 모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저자의 공적과 충절에 대한 기록들을 가려 뽑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김완(金浣)에 대한 초사(招辭)]
만력 26년 무술[1598] 5월 일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장계(狀啓)로 말하기를, 각처의 적의 소굴에 포로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유인(誘引)하도록 동래 수령【東萊守令 당시에 부사(府使)에서 현령(縣令)으로 강등되어 있었다】의 처소에 신칙(申飭)하였더니, 당일 도착한 본월 초3일에 성첩(成帖 → 成貼)된 양산 군수(梁山郡守) 박응창(朴應昌)의 치보(馳報) 내에, 도(道)에서 내린 분부에 의거하여 적세(賊勢)의 정탐을 겸하여 포로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유인할 차로 본군(本郡)의 군관 김백년(金百年)으로써 장차 들여보내려 하였더니, 영천(永川)에 사는 한산도 주사 조방장(助防將) 김완(金浣)이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고성(固城)에 사는 교생(校生) 문대모(文大謨), 정병(正兵) 정원생(鄭元生)과 그의 처 소사(召史)가 같이 유인에 따라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지난 4월 20일에 동래 선암사(仙巖寺)에 도착하였거늘 서로 만나서 이끌고 올 생각으로 진고(進苦 → 進告)해옴에 따라 도망쳐 돌아온 사람 등을 올려보내는 바, 치보(馳報)에 의하면 앞서 말한 김완(金浣)이 당초에 포로가 되었던 절차와 적정(賊情)에 대하여 캐물은 초사(招辭) 내에, 저【矣身 이두(吏讀)로 본인을 낮춰 지칭하는 「이 몸」이라는 뜻인데 이하 모두 현대어 「저 or 제」로 풀이】는 경상 좌도의 영천에 사는 사대부의 자손입니다. 학문에 힘썼으나 여러 해 이래 누차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는데, 늦어서야 손오(孫吳 손자·오자 즉, 병법)를 깨우쳐 그 기묘함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기축년 겨울에 외람되게 선전관(宣傳官)의 직무를 부여받았으며, 역적【정여립(鄭汝立)을 지칭】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에 삼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습니다. 변방의 경보가 급함을 고해오자 사도 첨사(蛇島僉使 → 蛇渡僉使)로 옮겨 차정(差定)되었는데, 부임한 초기에 폐추【廢墜 부서지고 못 쓰게 됨】된 것을 수거(修擧 수리)하고 군무(軍務)를 정리하니, 감사(監司) 이광(李洸)이 이에 장계하여 품계가 오르게 되었습니다.
임진년 여름에 이 흉변(凶變)을 만나 삶을 잊고 목숨을 던져 매번 선봉에 나섰는데, 옥포(玉浦)에서 처음 적을 만났을 때부터 한산도에서 대첩(大捷)을 이룰 때까지 화살로 맞추고 죽인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으며, 적선을 깨부순[撞破] 것도 역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바친 수급도 40여 개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8월 16일에 당상(堂上)에 뛰어올랐으니 성은(聖恩)이 하해(河海)와 같이 깊어 죽음으로 결초보은(結草報恩)하여 정성을 다하여 자급(資級)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스스로를 더욱 격려하여 방비하는 준비에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습니다. 을미년[1595] 가을에는 물고기와 소금을 팔아 군량을 비축한 것이 500여 섬에 이르니,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이러한 사실을 낱낱이 들어 진달(陳達)하여 특별히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되었습니다. 배에 오른 지 5년에 이르도록 바다에서 지내며 형제·처자를 만나지 못하였으나 나랏일이 아직 튼튼하지 못하니 어찌 사사로운 일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옛적에는 임금께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시니 떨어진 바지라도 오히려 귀하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겨울에는 표범가죽으로 만든 귀마개를 내려주시고, 여름에는 삼베옷을 삼가 내려주시어 방수(防戍)하는 노고를 어루만져 주시니, 그 말씀을 받아 깊이 간직하고 은택(恩澤)은 뼈와 살에 사무쳐서 그 하늘처럼 끝이 없는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항상 스스로 받들어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도적들이 물러나 위축되거나 도주하지 않으니 스스로 하늘에 울부짖을 따름이었습니다. 정유년[1597] 6월 22일에 거제(巨濟)의 복병도장(伏兵都將)으로 뽑혀 도장포(道莊浦)에서 왜선 4척을 만나 여러 전선들이 힘을 합쳐 일제히 나아가 사로잡은 숫자가 90여 급에 이르렀으며, 제가 벤 것이 5급이었습니다. 또한 7월 초6일에는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서 왜선 10척과 만났는데 역시 모두 깨부수고 또[優 ?] 말을 빼앗을 때에, 제가 왜장이 탄 배 1척을 혼자서 부수고 수색하여 수길(秀吉)이 삽혈(歃血 피를 나눠 마심)하고 맹세한 문서가 든 붉은 봉투 3장과 은으로 된 항아리[銀甁] 1쌍을 얻고 군량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인 후에 이어 부산을 향하다가 적선 600여 척이 바다를 덮어 건너오던 차에, 주장(主將)과 여러 장수들이 모든 부대를 이끌고 나와 싸우는데, 역풍(逆風)에 날씨도 사나운데 그 기세가 장차 미치지 못하여 영등포(永登浦)로 돌아와 모였습니다. 부산으로 진격하여 싸울 것을 아뢸[啓聞] 일로 통제사와 종사관 등이 함께 의논할 때에 제가 수길(秀吉)의 맹세한 서장을 소매에서 꺼내어 보이니 통제사가 십분 위로하고 기뻐하며 사유를 갖추어 치보(馳報)한 후에, 적과 더불어 대치하며 여러 날을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같은 달 15일에 풍세(風勢)가 불리하여 온천도(溫川島 칠천도)로 진을 옮겼는데, 16일 5경 초【경(更)은 시각의 단위로 밤을 5등분한 단위이다. 5경 초면 새벽 4시쯤 된다】에 적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포를 쏘며 야경 【夜驚 밤에 기습을 할 것처럼 시끄럽게 하여 상대를 놀라게 하는 일】을 하니, 아군은 창황(蒼黃)하여 닻을 올리고 재빠른 자는 먼저 온천도를 나오고, 둔한 자는 아직 나오지 못하였는데, 적은 이미 주위를 둘러싸 포위하였습니다. 전라 좌수영의 군량선(軍糧船)을 이미 먼저 빼앗겼는데, 주장(主將)은 조치를 잘못하여 여러 전선이 붕괴되어 절반은 북으로 진해(鎭海)로, 절반은 거제(巨濟)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홀로 한후선(捍後船 후퇴할 때에 후미를 맡아 지키는 전선)이 되어 고각(鼓角 북과 피리)을 울리고 깃발을 재촉하였는데, 제 관하(管下)의 남도포 만호(南渡浦萬戶 → 南桃浦萬戶) 강응표(姜應彪), 회령포 만호(會寧浦萬戶) 민정붕(閔廷鵬), 조라포 만호(助羅浦萬戶) 정공청(鄭公淸), 해남 대장(海南代將), 강진 대장(江津代將 → 康津代將) 등이 각기 수사(水使)를 따라 이미 먼바다로 도주하여 같이 힘을 합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홀로 군관(軍官), 사부(射夫) 및 노자(奴子 사내종) 등과 더불어 포를 쏘고 일제히 활을 쏘아 서로 죽이며 힘을 다하여 싸우고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나갔습니다. 주장(主將)이 일어나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아! 영공(令公)께서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죽을 각오를 하였으니, 가히 임금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여 제 몸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적세가 이와 같이 급한데, 여러 진의 장수들은 소문만 듣고 여전히 어물쩍하며 달아나기를 임무로 하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곧바로 장수 한 명을 참하여 군대에 위엄을 보이도록 하시오!」라고 하니, 주장은 이억기(李億祺)·최호(崔湖) 등을 지칭하며 말하기를, 「도주한 자들이 이미 있는데도 유독 제공(諸公)이 죽을힘을 다하여 그 공이 크니 가상하오.」라고 하였습니다. 듣기를 마치고 돌아보니 적선의 선봉 2척이 100무【무(武)는 보(步)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리, 따라서 50보】내로 치달려 오기에 제가 배설(裵楔)과 같이 적중으로 달려들었는데, 설(楔)은 이미 배를 돌려 달아났습니다.
저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입하였으나 좌우의 제군은 와서 구원하는 자가 없이 적과 서로 부딪쳐 포를 쏘고 화살을 쏘아대던 차에, 군관 유영호(劉英豪)가 탄환에 맞아 즉사하고, 노자(奴子) 필연(必連)도 또한 탄환을 맞았으며, 군관 이춘연(李春連)도 차례로 탄환에 맞았으나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또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서 세력이 심히 외롭고 약하여 사졸(士卒)들이 빈주먹만 휘두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팔을 흔들어 말하기를, 「주장(主將)! 주장! 어째서 구하러 오지 않는가!」하고 외치던 때에, 주장 원균(元均)은 술에 취하여 베개를 높이고 있어 기강(紀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단지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片箭) 10여 개를 쏘고 나서 노를 재촉하여 점차 물러갈 뿐이었습니다. 수사 배설(裵楔)은 역시 배멀미에 지쳐 선방(船房 선실)에 들어가 누워서 인사불성이 되어 한결같이 군관의 지휘를 따를 뿐이니 어찌 위급한 어려움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군관·사부 등은 나란히 서서 관망만 할 뿐으로 전혀 화살을 쏠 뜻이 없었고, 사도 첨사(蛇島僉使 → 蛇渡僉使) 김익귀(金益貴)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저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왜적 한 놈을 베고서 죽을 것을 결심하였는데, 노자 필연(必連)이 칼을 짚고 방패에 기대어 서 있는 안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왜적 하나가 배를 붙잡고 기어오르는 차에, 가슴으로 부딪쳐 물에 떨어뜨리고 필연은 그가 다시 올라올 때를 기다렸다가 이마를 칼로 찔렀으며, 포수(砲手) 박곤(朴昆) 등은 창을 쥐고서 선미(船尾)에 엎드렸다가 그 목구멍을 공격하여 세 명의 왜적이 모두 죽었습니다. 바닷가에서부터 왜적의 무리들이 일시에 일제히 올라와 칼을 들고 돌입하던 차에, 저는 창졸간에 물에 뛰어들던 때에 빽빽이 늘어선 적의 칼날이 왼쪽 귀밑을 스쳤습니다. 저는 혹은 잠기기도 하고 혹은 뜨기도 하며 떠내려가서 죽을 뻔했는데, 마침 뜸【초둔(草芚) 띠나 부들 따위의 풀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 하나가 큰 뗏목처럼 바다에 떠내려오니, 제가 드디어 손으로 잡아당겨 몸을 의지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간신히 한 절도(絶島)에 닿았습니다. 섬의 이름은 내서기도(乃胥歧島) 혹은 어리도(於里島)라고 하였습니다. 상인(商人)이 사령(使令) 간손(艮孫)과 포수 박곤(朴昆) 등이 이미 먼저 그곳에 도착하여 있다고 하기에 같이 수풀 속에 엎드려 몸을 숨기고 바라보니 주사(舟師)의 전선들이 일제히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으니 보고 있으니 참으로 참담하였습니다. 밤새도록 통곡하며 서로를 베개삼아 칡넝쿨 아래 누웠는데 종놈은 탄환에 맞아 상처를 입었는데, 불시에 바로 죽으니 심히 모질고 모질었습니다. 초경(初更)에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밤을 지샜으나 적선이 바다를 덮고 있어 감히 머리를 내밀 수 없었습니다. 천지가 망망하고 어디 호소할 데가 없어 스스로 절해고도의 귀신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17일 저녁에 왜적들의 소리가 조금 잦아들기에 간손(艮孫) 등과 더불어 칡을 캐어서 나무를 얽어매어 뗏목 하나를 만들어 일곱 명이 같이 타고서 진해(鎭海) 앞바다에 곧바로 도착하니 폭풍이 심하게 연달아 일어나고 미친 파도가 몰려와서 칡으로 만든 끈이 조각조각 끊어져서 뗏목 나무가 각각 흩어지니 절반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간손은 보자기[鮑作]라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자라나 물에 매우 익숙하여 나무 하나를 잡고서 건넜고, 저도 또한 나무 하나를 얻어 붙잡고서 뒤따라 잠겼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구사일생으로 창원(昌原) 앞바다의 마산포(馬山浦)에 이르렀습니다. 먼동이 틀 무렵에 적도들이 붙잡힌 우리 나라의 보자기 4명을 이끌고서 판옥선(板屋船)과 여러 배들을 불태우고서 모여서 장차 돌아가려 하다가 저를 보고 뒤쫓아오는데, 저는 물 속에서 뜨고 가라앉기를 여러 날을 보내며, 날 것을 먹고 기력이 다하여 능히 도망칠 수가 없어 차라리 물에 빠져죽을지언정 포로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죽으려고 하던 때에, 보자기들이 따라 들어와서 새끼줄로 허리를 묶어 끌어당겨 배에 실었습니다. 적이 또 죽이려고 하니 보자기들이 애걸하여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정상(情狀)으로 봐서 오늘 죽이지 않더라도 추위로 얼고 지쳐서 머지않아 이내 죽게 될 것입니다.」하고, 이로 인하여 안골포(安骨浦)의 적진으로 끌고가서 관청에 바쳤습니다.
이 때에 원주(原州)의 사대부가의 여인이 감관(監官)에게 사로잡혀 견고한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흰죽을 내주었습니다. 저를 위로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는 모두 우리 나라 사람으로 순천(順天)의 악녀(樂女), 보성(寶城)·영광(靈光)·진주(晉州) 등지의 격군(格軍)·사부(射夫)들이었습니다. 3일이 지난 후에, 적장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장차 죽이려 하면서 말하기를, 「너는 무엇을 하던 자냐?」하고 원호서(元虎瑞)에게 말을 전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나는 주사(舟師)의 선봉장(先鋒將)이다.」라고 하니, 적도가 말하기를, 「이 자는 높은 관직[太上官]에 있는 자이니, 반드시 머리를 깎아서 관백(關白)에게 바쳐야겠다.」고 운운하므로 제가 죽기로 맹세하고 말하기를, 「머리는 깎을 수 없다!」고 하니, 한 놈의 왜적이 말하기를, 「머리를 깎아서 중이 된다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오.」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어제는 왜적을 토벌하고, 오늘은 칼끝을 돌려세우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오직 빨리 죽여주기를 바란다.」고 하니, 적장이 크게 노하여 부하【궐자(厥子)는 자식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부하로 해석】에게 감독하여 목을 베라고 하였다. 이에 군대의 위용을 크게 베풀고 창검을 빽빽하게 늘여 세워 철사 줄로 단단히 묶고 차꼬와 족쇄를 채워 좌우에서 구타하는 자들이 3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제가 하늘을 우러러 소리지르며 말하기를, 「어찌 빨리 죽이지 않는가?」하니, 원호서(元虎瑞)·윤덕립(尹德立) 등이 옆에서 간곡하게 애걸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문자(文字)를 자못 알고 있으니, 원컨대 일본으로 보내서 조선의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습니다. 이 부하는 원호서와 옛날부터 교분이 두터웠던 자라 급히 그 말을 적장에게 전하게 하니, 적장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잠시 죽이지 말고 곧바로 일본으로 보내라.」고 운운하였습니다.
7월 25일에 배에 실릴 때에, 제가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호서(虎瑞)도 또한 저를 위해 눈물을 닦아주고 옷을 벗어서 입혀주었습니다. 26일에 배가 출발하는데, 영광에 사는 어린 아이 1명, 순천에 사는 어린 아이 1명, 낙안(樂安)에 사는 어린 아이 1명이 내가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서 서로 부둥켜안고 마치 아비를 잃은 것처럼 목놓아 울었습니다. 초경(初更)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으며, 8월 초4일에는 일기도(日歧島)에 이르고, 초7일에는 낭고야【浪古也 나고야[名護屋]의 음차 표기】에 도착하였습니다. 10일에는 범전군【梵前郡 ?】에 이르고, 14일에 곡고라【曲高羅 고쿠라[小倉]의 음차 표기,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당시에 부젠의 고쿠라는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거성(居城)이었으니 김완은 모리 요시나리에게 붙잡힌 것이 아닌가싶다.】에 이르렀는데, 고쿠라[小倉]는 곧 적장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감관(監官)인 도산【道山 일본명 도산, 예를 들어 [道三] 등의 음차 표기】의 집에 감금되었는데, 사방의 성문이 모두 닫혀있고 안쪽에는 자물쇠가 됫박[斗]만 하여 마치 귀신의 감옥보다 심하므로 영영 살아서 돌아갈 희망이 없었습니다. 저는 목을 매어 자진(自盡)하려 하였으나, 그 무렵에 우리 나라 사람 30여 명이 와서 청하기에 만나보았는데, 수일만에 성밖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녀가 서로 안부를 묻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다투어 술과 안주를 가져와서 권하였으나 기가 꺾여서 목이 메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언양(彦陽)에 사는 옹장(瓮匠) 김윤필(金允必)이 도호주(都戶主 마을의 대표자)가 되어 있고, 밀양(密陽)에 사는 이금상(李今尙)은 색장(色掌)이 되어 도자기와 기와를 팔아 입고 먹는 것이 두루 풍족하였습니다. 울산(蔚山)에 사는 정병(正兵) 구막선(仇莫先)이 포목 1필을 주었고, 충청도 보은(報恩)에 사는 전희수(田希守)는 옷을 벗어 주면서 서로 위로하고 구휼하여 주니 이로써 도산(道山)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집의 사환(使喚) 중에 김해(金海)에 사는 보자기 이장춘(李長春)과 흥해(興海)에 사는 보자기 신수연(申守連)은 항상 작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틈을 타서 은밀히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실어 조선으로 갈 수 있게 해준다면 그 후의(厚意)가 막심할 것이다.」라고 하니, 장춘(長春) 등이 쾌히 승낙하여 이내 그의 말[言]처럼 8월 30일 새벽닭이 울 무렵에 몰래 도망쳐 배를 타려고 하는 때에, 말이 누설되어 적도들이 알게 되어 장춘(長春) 등은 도망쳐 면하게 되었으나 저는 홀로 잡혀서 묶이게 되어 장차 다리 위에서 죽게 되었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남김없이 모여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본말을 알지 못하고 또한 병이 들어 걷지를 못하니 비록 도망가게 놔둬도 도망갈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도망친다면 우리들이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라고 운운하니 왜적이 이에 중지하고서 그들과 더불어 거느리고 거처로 돌아와서 돌아가면서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삼동(三冬)에는 눈이 산처럼 쌓였고, 얼어붙을 정도의 심한 추위를 겪었으나 구구한 견마지심(犬馬之心)은 어찌 단 일각이라도 해이해질 수 있겠습니까? 제 몸과 그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겨서[形影相弔 몹시 외로움을 말함] 항상 목놓아 울뿐이었습니다. 울산(蔚山) 병영(兵營)의 진무(鎭撫)인 정세원(鄭世元)이 매일 식량을 가져다 주는 고생을 하면서 서로 만나 같이 도망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성 안에 갇힌 몸인데다 적들의 눈이 사방에서 번개같이 지켜보고 있어서 뜻은 있으나 성취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은화(銀貨) 4냥을 남겨주면서 말하기를, 「절반으로는 배를 빌리는 값으로 쓰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행량(行糧)을 구하십시오.」하니 저는 그것을 얻어 너무도 기뻤습니다. 이번 정월 25일 밤중에 고성(固城)에 사는 교생(校生) 문대모(文大謨)와 약속을 실행하여 도주하여 돌아오는데 적들이 뒤따르는 것이 두려워 산에 올라 험한 곳을 넘는데 길은 막히고 양식이 떨어져서 한 작은 절간에 찾아들게 되었습니다. 한 노선사(老禪師)가 대나무 책상을 깨끗이 청소하고 맞아들여 앉혀놓고 잠깐 사이에 밥을 지어와서 말하기를, 「기장밥[黑飯]이라 비록 심하나 귀공자[王孫]께서는 허기를 채우시오.」라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글로 써서 보였습니다. 제가 역시 글로 써서 말하기를, 「나는 조선 사람인데 포로가 되어 남의 나라에 왔는데, 마땅히 한번 죽어야 하지만 구차히 삶을 도모하면서 신하된 직분을 어기고 있으니 하늘에 부끄러울 뿐입니다.」하였습니다. 승려가 재배하며 위로하고서 선방(禪房)으로 이끌고 들어가 등불을 밝히고서 시(詩) 한 수를 청하여 훗날의 잊지 않을 기념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나는 곤액(困厄)으로 인하여 망명(亡命)해 있는 처지에 어찌 시(詩)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말씀하신 뜻은 사양할 수 없습니다.」하고서 이내 입으로 사성시(四聲詩)를 불러주었으니 그 내용인즉,
나라의 간성(干城)인 장수가 격설(鴃舌) 땅에 표류되었으나
단심(丹心)은 백일(白日)처럼 비추고 충의는 청추(淸秋)에 늠연하네.
몸은 남쪽 오랑캐 땅에서 울고 혼(魂)은 북궐(北闕)을 찾아 헤매니
이 몸이 만 번 죽더라도 어찌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를 참으리.
하였습니다. 이 승려가 또한 시를 지어 화답하니,
당신의 아름다운 글귀를 보니 충심이 글자마다 새롭구려.
창천(蒼天)의 응답이 있으리니 머지않아 군친(君親)을 뵈오리다.
하였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 이내 은 1냥을 주면서 말하기를, 「달리 정분을 표시할 것이 없으니 이것으로 노자로 삼으시오.」라고 하여 이에 사례하고 돌아오는데, 여러 날을 걸어서 고생이 막심하였습니다.
2월 초2일에 범전군(梵前郡)의 화대가【化大加 음차 표기인 것으로 보이는데 본래 지명은 불확실】 선창(船滄)에 도착하니, 조선으로 가는 배는 모두 이미 돛을 올리고 떠나버렸습니다. 제가 땅을 치며 소리내어 통곡하니, 한 늙은 왜인이 묻기를, 「어찌하여 울고 있소?」하기에 나는 조선으로 건너가려고 하는데 미치지 못하여 배를 타지 못하여 이에 울고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금명간에 또 돌아가는 배가 있을 것이니 울지 마시오.」하고서 자기 집으로 이끌고 돌아갔습니다. 마침 김해(金海) 사람으로 물고기를 팔러 다니는 사람이 그 곳에 왔기에 제가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사는 곳을 아는가?」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곧 먼저 도착해 있는 고성(固城) 사람 정원생(鄭元生)이 사는 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원생이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옷을 벗어 입혀주고 진심으로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급하게 재촉하여 돌아갈 배를 물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장삿배를 잘못 타면 오히려 남만인(南蠻人 일본과 무역하던 유럽인)에게 팔릴 수 있으니 모름지기 믿을 수 있는 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분격하여 주먹을 쥐고서 절박하게 고민하기를 한 달을 넘고 열흘을 지나려니 계속해서 먹을 것을 대는 것도 어려워 장차 우리 나라 사람인 울산(蔚山)의 박경택(朴慶澤), 김해(金海)의 박말생(朴末生), 창원(昌原)의 박마동(朴麻同), 언양(彦陽)의 두리동(豆里同), 밀양(密陽)의 황대복(黃大福), 동래(東萊)의 정순걸(鄭順乞) 등의 집에서 돌아가며 먹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 현묘(玄竗)라는 자가 있었는데, 기특하게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글로 써서 보이기를, 「나의 아비는 남경(南京)에서 포로가 되어 와서 이곳에 살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니, 만리타향에서 이처럼 서로 만나 그 괴로움을 알아주니 그 정성(情誠)이 가련하여 그 집에 머물렀는데, 한 달 동안 매우 부지런히 먹여주고 대접하였습니다. 저는 정원생·문대모·두리동 등과 은밀히 약속하여 순풍(順風)을 살폈습니다.
3월 24일에 세 사람이 배를 타고 귀로에 올라[亡歸], 27일에 일기도(日歧島)에 도착하여 바람을 기다렸고, 4월 초9일에는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여 바람을 기다렸습니다. 18일에 다대포(多大浦)에 도착하여 머물렀다가 19일에 부산(釜山)에 도착하였고, 20일에는 동래(東萊) 선암사(仙巖寺)에 도착하였습니다. 승려 탄웅(坦雄)·탄일(坦一) 등이 또한 매우 관대하게 대접하였습니다. 길의 이수[道里]에 대해서 여러 승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천병(天兵 명나라 군대)이 사방에서 습격하니 왜인들이 지난날보다 갑절이나 되는 병력으로 매복을 설치하고 있어서 그 요사스러움을 측량하기 힘들어 심히 위험합니다. 반드시 비어있는 곳을 찾아야 나갈 길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만류하는지라 3일을 머물렀습니다. 24일에는 탄일(坦一) 등이 친히 지휘하여 나설 때에 양산군(梁山郡)의 적정을 정탐하는 군관인 김백년(金百年)이란 자를 만나서 같이 돌아오게 되어, 양산의 구법곡(仇法谷)의 왜적들이 막사(幕舍)를 만들어놓은 곳의 물고기를 파는 집에서 3일을 머무르며 사방으로 적세의 동정(動靜)을 살폈습니다. 29일에 동래(東萊)의 주산인 전원적(田圓積 ?)에 올랐다가 다음날 오시(午時)에 언양(彦陽)의 석남(石南)에 도착하니 양산 군수 박응창(朴應昌)이 적정을 탐지할 일로 와 있었습니다.
저는 전란 초기부터 분투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전후로 수급을 바친 것이 많아 40여 개에 이르렀으며, 힘을 다해 싸워 은상을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은명(恩命)이 지극히 중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실로 깊어서 나라에 보답하는데 미력이나마 다하고자 함이 그로부터 더욱 더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교체되고, 원균(元均)이 대신 지휘하게 되어 그 제도를 잃어버리고 전승(全勝)하던 주사(舟師)가 하루 저녁에 적에게 불타버리게 되었으며, 저는 저들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오히려 군부(君父)께 수치를 드리게 되었으니 그 죄는 천지에 가득 차서 진실로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규례(規例)에 의하면 남은 목숨은 한번 죽는 것이 도리인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분함을 머금고 통분을 참으며 억지로 살아서 돌아온 것은 근폭【芹曝 옛날 중국의 어떤 농부가 봄에 싱싱한 미나리를 보자 임금께 바치고자 하였고, 겨울에 따뜻한 햇볕을 모아 임금께 드리고자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임금께 작은 정성이라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밥 먹을 때나 쉴 때도 항상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회를 틈타 다시 밝은 태양의 빛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두터운 은혜를 입어 한 가닥 남은 목숨을 바치는 정성으로 다시 죽이지 않는다는 용서를 받아 군대의 임무를 맡겨 주시어 영천(永川)·경주(慶州)의 요충이 되는 곳을 지키게 해주신다면 마땅히 한번 죽음으로써 전일의 치욕을 만분의 일이나마 씻고자 한다고 하며, 일본의 적세와 부산·동래·양산의 적정(賊情)을 아울러 별도로 작성하여 올려보냅니다. 초사(招辭)의 내용에, 지난해 주사(舟師)가 패할 때에 주장(主將)의 군령이 엄하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물러나 피하는 것을 다스리지 못하였거늘 김완(金浣)은 스스로 변란 초부터 죽을힘을 다하여 싸워서 홀로 능히 앞장서서 싸우기를 시종 한결같이 하였으며, 적과 교전할 때에 참획(斬獲)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불행하게도 주장[元戎]을 보좌하던[左] 차에 탄환에 맞아 포로가 될 즈음 바다에 몸을 던져 우연히 절도에서 목숨을 건졌다가 진해(鎭海)로 건너올 적에 적에게 잡히게 되었으나 굽히지 않고 항의하기를 그 언사가 심히 격렬하였으며, 고래와 악어 같은 험난한 파도[鯨波鰐浪] 속에서도 여전히 나라를 잊지 않고 남몰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살아 돌아왔는바, 그 정의(情義)를 살펴보면 극히 가상합니다. 다만 이 사람은 오래도록 적의 칼날 속에 잡혀있었고, 또한 거친 바닷물결에 잠겼다 떠오르며 시달린 관계로 그 뜻은 꺾이고 담력은 떨어져 정신을 잃은 것이 이미 심하오니 잠시 진중에 두었다가 왜적을 토벌할까 생각하오며, 아울러 올려보낼 일을 마칩니다.
(상께서) 들으시고 해동소무(海東蘇武)로 포상하시고 특별히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제수하였다.
[원문]
萬曆二十六年戊戌五月日, 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啓曰, 各處賊窟被虜(擄)人誘出亦, 東萊守(縣)令處申飭爲白有如乎, 當日到付, 本月初三日成帖, 梁山郡守朴應昌馳報內, 道分付據, 賊勢偵探, 兼爲被虜(擄)人誘引次以, 郡軍官金百年, 欲將入送爲有如乎, 永川居閑山島舟師助防將金浣, 被虜(擄)日本入去爲有如可, 固城居校生文大謨, 正兵鄭元生及其妻召史, 竝以誘引逃還, 去四月二十日, 東萊仙巖寺來到爲有去乙, 相逢率來爲有臥乎味, 進苦(告)乙仍于, 逃還人等上使爲臥乎所, 馳報據, 向前金浣當初被虜(擄)節次, 及賊情推問招內, 矣身慶尙左道永川居, 士大夫子孫也, 力學年來, 累擧不中, 晩效孫吳, 慣得其妙, 己丑冬, 濫荷宣傳之職, 逆賊之變, 謹愼扈從, 邊警告急, 移差蛇島(渡)僉使, 赴任之初, 修擧廢墜, 整理軍務是如, 監司李洸狀啓陞品, 壬辰之夏, 逢此凶變, 忘生投命, 每次先登, 自玉浦初渡(度)赴賊, 至于閑山大捷, 射中射殺, 不知幾許, 撞破賊船, 亦不可勝記, 獻馘四十餘級, 而八月十六日, 超陞堂上, 恩深河海, 殞結思(死)效之, 資自是益, 自激厲, 備禦不少弛, 乙未秋, 興販魚鹽, 備粮至五百餘石, 統制使李舜臣歷擧陳達, 特陞差助防將, 登船五載, 經過海洋, 兄弟妻子, 不得相見, 然而, 王事靡盬, 焉得告私乎, 且聞, 古之人君, 賞賜有功授之, 弊袴尙云, 貴矣, 而況, 冬則豹皮耳掩, 夏則白絪布衣, 申勤內賜, 慰撫防戍之苦, 受言藏之, 澤洽肌骨, 欲報其殊, 昊天無極, 常自仰膽嘗之者萬一, 而矣身未盡職分, 賊不退縮, 徒自呼天而已, 丁酉六月二十二日, 差巨濟伏兵都將, 逢道莊浦倭船四隻, 諸船竝力齊進, 捕數至九十餘級, 矣身斬五級, 又於七月初六日, 多大浦前洋, 倭船十隻相逢, 亦盡撞破, 優(又)奪馬匹時, 矣身獨能撞破倭將騎船一隻, 探得秀吉歃血盟章朱封三顆, 銀甁一雙, 及軍粮無遺收聚後, 仍向釜山賊船六百餘隻, 跨海來渡次, 主將與諸將, 擧陣出戰, 風逆日暴(暮), 勢將未及, 還擣永登浦, 釜山進戰次, 啓聞次, 以統制使從事官竝議時, 矣身以秀吉盟章, 出袖示之, 統制使十分慰喜, 具由馳報後, 與賊相對, 曠日掎角, 同月十五日, 風勢不利, 將移陣溫川, 十六日五更初, 賊徒雲集, 放砲夜驚, 我師蒼黃擧碇, 疾者先出溫川, 鈍者未及出也, 賊已回圍矣, 全羅左水營軍粮已先被奪, 主將失措, 諸船崩潰, 一半北于鎭海, 一半奔于巨濟, 矣身獨捍後船, 鼓角促旗, 而矣身管下, 南渡(桃)浦萬戶姜應彪, 會寧浦萬戶閔廷鵬, 助羅浦萬戶鄭公淸, 海南代將, 江(康)津代將等, 各從水使已走遠洋, 無與倂力, 矣身獨與軍官射夫及奴子, 放砲齊射厮殺, 力戰揮旗馳進, 主將起謝曰, 噫, 令公不畏溝壑, 獨能殊死, 可謂王臣蹇蹇, 非躬之故者矣云云, 矣身曰, 賊急如此, 諸衛之將, 望風依違以走爲務, 其可乎哉, 直斬一將, 以威士衆也, 主將謂李億祺崔浩(湖)等曰, 走者已矣, 惟諸公戮力之功大, 是嘉尙, 聽訖回視, 賊船則先鋒二隻, 馳進百武之內, 矣身乃與裵楔, 共衝賊中, 楔已回船走脫矣, 矣身冒死突入, 左右諸軍, 無有來援, 與賊相迫, 放砲疾射次, 軍官劉英豪中丸卽斃, 奴子必連亦中丸, 軍官李春連次中丸, 時未至死, 矣身亦左脚中丸, 勢甚孤弱, 幾至於士張空拳, 矣身高聲揮手曰, 主將, 主將, 胡不出救, 時主將元均, 酗酒高枕, 罔有紀綱, 只令軍官金大福, 射片箭十餘箇, 促櫓漸退而已, 水使裵楔, 亦困於水瘴, 入臥船房, 不省人事, 一從軍官之指揮, 有何急難之機乎, 軍官射夫等, 齊立觀望, 無意放箭, 蛇島(渡)僉使金益貴亦如之, 矣身知不可逭, 欲斬一賊以決死, 奴子必連杖劒, 倚立防牌之內, 有紅衣着一賊, 引船攀上次, 衝突胸腋, 墜於水, 奴必連俟其又上次, 劒觸其額上, 炮手朴昆等, 持創伏於船尾, 擊其喉項, 三倭俱斃, 自水濱, 衆倭一時齊上, 荷劒突入次, 矣身倉卒投水之際, 賊刃森入左鬢, 矣身或沈或浮, 且溯且沿, 以死爲限, 適有草芚一葉, 如筏大浮來海洋, 矣身遂乃以手援之, 倚身姑息少頃, 艱辛接一絶島, 島名曰, 乃胥歧島於里島也, 商人云, 使令艮孫, 及炮手朴昆等, 已先到其處, 相與伏林藪望見, 舟師則一齊焚火, 烟焰漲天, 所見慘惔, 終夕痛哭相枕, 藤蘿之下, 奴傷於中丸, 不時直斃, 甚惡甚惡, 初更, 風雨暴作, 徹夜凍餒, 而賊船蔽海莫敢出頭, 天地茫茫, 無所控訴, 自分爲絶島之鬼, 十七日夕時, 賊聲稍息, 與艮孫等採葛, 編木共結一桴, 七人同乘, 直到鎭海洋前, 颶風連作, 狂濤盪漾, 葛索片斷, 桴木各散, 半皆溺死, 艮孫乃鮑作也, 長於漁獵, 大能水, 挽一木而渡, 矣身亦抱得一木, 隨後出沒十死九生, 乃至昌原前洋馬山浦, 曉平, 賊徒率我國鮑作四俘, 燒火板屋及諸船, 收取將以馳歸爲如可, 見矣身追後, 矣身乃浮沈水中累日, 鮮食氣力摧敗, 莫能逃避, 寧爲溺死, 決不見虜(擄), 投海以自處時, 鮑作隨入海, 以索結要(腰), 引曳載船, 賊又欲斬, 鮑作哀乞止之曰, 此人情狀, 不斬今日, 寒凍困厄, 未幾乃絶, 因俘歸于安骨浦, 納之於官廳時, 原州士族女子見俘於監官也, 堅囚獄中, 以白粥與之慰我, 垂涕者, 皆是我國之人, 如順天樂女寶城靈光晉州躬格射夫也, 過三日後, 賊將以不從命, 將斬之曰, 汝何爲者也, 元虎瑞傳言, 矣身曰, 我舟師先鋒將也, 賊徒曰, 此必太上官削髮獻于關白云云, 矣身以死誓曰, 不可削也, 有一賊曰, 削之爲僧則可得活, 矣身曰, 昨日討賊, 今日倒戈, 非余志也, 惟願速殺(死), 賊將大怒, 使厥子監而誅之, 乃盛張軍容, 創(槍)劒森列, 繫以鐵索, 以桎梏之, 左右毆打者, 三十餘酋, 矣身仰天疾號曰, 胡不遄殺, 元虎瑞尹德立從傍慘乞曰, 此人頗解文字, 願置之日本, 學得朝鮮之文, 可也, 如何, 厥子與元虎瑞有舊交密者也, 飛傳其言賊將曰, 然則姑勿殺之, 急送日本云云, 七月二十五日載船之時, 矣身北向痛泣, 虎瑞亦爲之拭淚脫衣衣之, 二十六日發船, 靈光兒童一名, 順天兒童一名, 樂安兒童一名, 聞我離聲, 相抱號哭如失父, 初更至對馬島, 八月初四日至日歧, 初七日至浪古也, 十日至梵前郡, 十四日至曲高羅, 小倉乃賊將所居也, 拘置于監官道山家, 城門四閉, 內鎖如斗, 甚於鬼獄, 永無生還之望, 矣身欲以結項自盡, 有頃, 我國人三十餘名來請見後, 數日邀歸城外, 乃我國人所居處也, 男女相問, 莫不流涕, 爭持酒肴而勸之, 摧不得下咽, 其中, 彦陽瓮匠金允必, 爲都戶主, 密陽李今尙, 爲色掌, 陶瓦賣衣食周足, 蔚山正兵仇莫先, 以木布一匹給之, 忠淸報恩人田希守, 脫衣與之, 相與慰恤, 因留于道山家, 其使喚之人, 金海鮑作李長春, 興海鮑作申守連, 常乘小舟, 捉魚者也, 矣身乘間密言曰, 汝等, 載我出朝鮮, 則厚莫甚焉, 長春等曰, 諾, 乃如其言, 八月三十日曉鷄, 潛逃乘船之時, 言泄賊徒覺知, 長春等走免, 矣身獨見被縛, 將斬之於橋頭, 我國人無遺聚集曰, 此人不解日語, 且病未能行步, 雖使逃爲不可得也, 若逃俺等自當云云, 賊乃止, 相與率歸其居, 輪回供饋, 三冬積雪如山, 凍寒經過, 區區犬馬之心, 惡可少弛於一刻也, 形影相弔常自號泣, 蔚山兵營鎭撫鄭世元, 每持粮餉辛勤來見, 謀欲率逃, 而牢在城中, 賊目四電, 有志未就, 乃以銀貨四兩遺之曰, 半爲船雇半爲行粮, 矣身得之甚喜, 今正月二十五日夜半, 與固城校生文大謨, 結約逃還, 恐其追後, 登山越險, 路梗粮絶, 投尋一小刹, 有一老禪, 靜掃竹床, 邀坐須臾進食曰, 黑飯雖甚, 王孫得無飢乎云云, 言語不能通書以示之, 矣身亦書示曰, 我是鮮人虜(擄)來他域, 義當一死, 苟且謀生, 有乖臣子之職, 其不愧天乎, 僧再拜以慰, 因引入禪房, 張燈夜分, 請一詩以記後日之不忘, 矣身曰, 余以困厄亡命, 何能有詩乎, 但言志則不辭矣, 乃口號四絶曰, 王國干城將, 漂流鴃舌留, 丹心照白日, 忠義凜淸秋, 身在南荒哭, 魂尋北闕遊, 此生雖萬死, 何忍戴天讐, 僧亦作詩以答曰, 賞子瓊琚句, 忠心字字新, 蒼天應有格, 不九見君親, 向曉仍遺銀一兩曰, 別無情信, 以此爲贐, 乃辭歸, 累日徒行艱苦莫甚, 二月初二日到梵前郡化大加船滄, 朝鮮出來之船皆已懸帆, 矣身擗地呼哭, 有老倭問曰, 何哭爲, 矣身欲渡朝鮮, 未及乘船, 玆以啜泣, 老倭曰, 今明間又有歸船, 不須哭之, 引歸其家, 適有金海人以賣魚, 行到其處, 矣身曰, 汝知我國人所乎, 其人卽先到指視固城鄭元生家, 鄭見卽垂淚, 而解衣衣之, 盡情以餽, 歸心苦促急, 問出歸之船, 人皆曰, 若乘行商之船, 則反賣於南蠻之人, 須俟可信之船可也, 矣身扼腕悶切, 踰月淹旬, 繼食亦艱, 將輪供於我國人, 蔚山朴慶澤, 金海朴末生, 昌原朴麻同, 彦陽豆里同, 密陽黃大福, 東萊丁順乞等家, 有唐人玄竗者, 聞奇委來書示曰, 我父自南京來虜(擄), 居于此, 萬里相遇, 同是知病, 其情可矜, 留于其家, 一朔餽遇甚勤, 矣身, 與鄭元生, 文大謨, 豆里同等, 密約省順風, 三月二十四日, 三人乘船亡歸, 二十七日, 到日歧島待風, 四月初九日, 到對馬島待風, 十八日, 到多大浦留宿, 十九日, 到釜山, 二十日, 到東萊仙巖寺, 僧人坦雄坦一等, 亦甚款接, 問道里于諸僧, 皆云, 天兵四襲, 日人倍加設伏, 變詐不測, 甚危矣, 必尋空虛之地, 可得其路, 因挽留三日也, 二十四日, 坦一等親自指揮之際, 有梁山郡偵賊軍官金百年者, 相逢因與同歸, 梁山仇法谷倭幕造作處, 漁店留三日, 相審賊勢四方動靜, 卄九日, 登東萊主山田圓積, 翌日午時, 到彦陽石南, 梁山郡守朴應昌, 探賊出來事爲有在果, 矣身自亂初, 奮不顧他, 前後獻馘, 多至四十餘級, 力戰受賞, 不止一再, 恩命至重, 感荷實深, 報國微忱, 自期益盡, 不幸統制使李舜臣見遞, 元均代領, 失其制度, 全勝舟師, 一夕見焚於賊火, 矣身虜(擄)去賊邦, 反貽君父之恥, 罪盈天地, 固難容貸, 規規餘命, 非不知一死爲義, 而含憤忍痛, 强爲生還者芹曝一念, 食息尙存, 竊期復覩天日之光, 重露殘生之寸, 悃更承不死之赦, 假師旅之任, 使守永川慶州要衝之路, 則當效一死, 欲雪前日之羞辱, 萬一是白乎旀, 日本賊勢及釜山東萊梁山賊情, 竝以別件上納爲臥乎所, 招辭是白有亦, 上年舟師敗軍時, 主將軍令不嚴, 不能下手諸將退避爲白去乙, 金浣段自變初, 冒死力戰, 獨能挺身, 終始如一, 與賊交鋒斬獲甚多, 不幸元戎左次, 中丸困虜(擄)投入海中, 寓命絶島, 越來鎭海, 爲賊所禽(擒), 不屈抗義, 辭甚激烈, 鯨波鰐浪, 尙未忘國, 偸逃潛船, 脫身生還爲臥乎所, 觀其情義, 極爲嘉尙爲白在果, 惟只同人久在賊鋒之中, 浮沈海波之上, 情摧膽落失性已甚爲白(昆), 姑置陣中討賊計料爲白旀, 竝以上納事, 旣聞褒以海東蘇武, 特除咸安郡守.
첫댓글 귀중하고 좋은자료입니다
사성당 완할배 초기 관직 사도첨사는 사도첨절제사로 종3품 관직이었습니다. 임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정3품으로 전라좌수사이고, 관할 수군 행정구역인 오포는 전라좌수영 본영을 바다 쪽에서 직접 엄호하기 위하여 종3품의 첨사가 지키는 방답진(防踏鎭)[현 여천군 돌산면 군내리 지역]과 사도진(蛇渡鎭)[현 고흥군 점암면 금사리 지역], 종4품의 만호가 지키는 여도진(呂島鎭)[현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지역]과 발포진(鉢浦鎭)[현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지역] 및 녹도진(鹿島鎭)[현 고흥군 도양읍 녹동 지역] 등 모두 다섯 진포입니다. 고흥군 점암면 금사리 할배께서 근무하셨던 사도진 지도입니다. 요즘 고흥군에서 이순신길 복원한답니다,
조상님의 업적이 대단하시네
상세한 내용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