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인천에 설립되었던 초등교원 양성학교. 1946년 5월 개성(開城)에 설치되었던 개성공립사범학교가 1952년 6월에 인천에서 국립인천사범학교로 재출발함으로써 인천사범학교가 출범되었다.
1946년 5월 23일에 도립으로 설립인가를 받은 개성공립사범학교는 우선 속성과를 개설하여 4개월과정으로 초등교원 양성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9월 1일에 사범 본과, 강습과(1년), 초급중학교 등이 개설되었다.
1946년 9월 23일에 속성과 제1회 수료자 97명이 배출되고, 1947년에 제2회로 103명의 수료자를 배출시킨 후 속성과는 폐지되었다. 강습과는 1947년 7월 1일에 111명의 수료자를 배출시키고, 1948년에 39명의 수료자를 배출시킨 후 폐지되었다.
1950년 3월 1일 병설중학교가 개설되고, 같은 해 4월 1일 공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되었다. 개성사범학교는 6·25전쟁으로 1951년 9월 1일 부산에서 춘천(春川)사범학교와 연합하여 연합사범학교로 개교하여 사범교육을 실시한 결과 1951년 12월과 1952년 3월에 각각 본과생 제3, 4회 졸업자 22명을 배출시켰다.
개성사범학교는 1952년 4월 1일에 인천으로 옮겨와 신흥국민학교의 교사를 빌어 사범과, 병설중학교, 연수과의 신입생을 모집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8일 국립인천사범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설치 위치도 인천으로 변경되었다. 개성사범학교는 1952년 3월까지 모두 267명(남자 177, 여자 90)의 본과 졸업자를 배출하였다.
1952년 6월 28일 개성사범학교를 승계한 인천사범학교는 본과, 병설중학교, 연수과(1년제)등을 개설하였는바, 연수과는 1957년도까지 존속되어 5회에 걸쳐 모두 602명(남자 521, 여자 81)의 졸업자를 배출하였다.
1957년 4월 1일에 부속국민학교가 설치되고, 같은 해 7월 6일에 사범학교와 병설중학교의 기구 분리로 병설중학교에 전임교감을 두기 시작하였다. 1958년에 문교부 연구학교로 지정받아 〈남녀공학의 실험적 연구〉를 주제로 연구가 수행되었다.
인천사범학교는 1961년 4월 1일 교육대학 설치에 대비하여 사범학교 본과생의 신입생 모집을 중지하는 한편 병설고등학교를 설치하여 1학년 5개 학급(남녀)을 모집하였다. 인천사범학교는 1962년 2월 17일 인천교육대학으로 승격,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병설고등학교 재학생은 인천고등학교(남)와 인천여자고등학교(여)로 편입되고, 1963년 2월에 사범학교의 본과와 병설중학교의 마지막 졸업식을 거행함으로써 인천사범학교는 폐지되었다. 인천사범학교는 1953년부터 1963년 2월까지 11회에 걸쳐 모두 2,142명(남자 1,197, 여자 945)의 본과 졸업자를 배출하였다.
첫댓글 우리가 남녀공학의 실험대상이었다는 얘기네... 결과가 어떻게 나왔나 궁금하구만... 생각컨대 긍정적이었을 듯...
그래, 그거야 그때 선생님이란 이미지가 남녀의 구분이 없을테니까그랬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미래의 학교 환경을 예지하는 어떤 교육자의 발상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
지금은 거의가 다 남녀공학이 아닌가 ? 특히 이곳은.
조금은 늦게 따라가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는 한국 시정이 아닌가 생각하네.
교육뿐만이 아니고 예능 예술 사업 문제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되는데 ? 안그런가 ?
그렇다고 우리 세대가 그의 발판이 됐다는 얘기는 아니고,
선생님이란 변화하는 사회의 모범이 되는 인간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군.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그 한 몫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라는 것이겠지.
비록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때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하고 서로가 자랑스러운 친구들로 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네만, 모르지, 친구들의 생각은 어떨지..........
kwondo씨는 어디서 이렇게 자세하게 인천사범학교에 대해서 잘 조사를 하였당가
우리 중학교 3학년때 교대로 승격되었을때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교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여자 선배 한사람은 교대로 진학하여 다녀서 참 괜찮다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나도 우리 친정아버지가 장차 넌 선생이 되어야한다고 병중을 보냈는데 학교가 페지되어 포기를 하셨었지. 그런데 난 포기를 할 수가 없어 인천여고에 진학하였다가 다시 인천교대에 합격을 하여 결국에는 교장까지 하게 되었네.
68년 3월 1일자로 첫발령을 받고 교사생활을 하며 개성사범 졸업 선배들과도 같이 근무한적도 있었지
정말 옛날 이야기네 그려
늘씬이 아버님이나 내 아버님이나 똑 같으시구먼.
근데 난 자네처럼 못했지.사실은 자신이 없었거든.남 앞에 서는 것이 떨려서.
신선희가 그리 한 것이 많이 존경스럽고 부러우이. 잘 했어 ! 자랑스러워 !
졸업 후 인하공대에 다닐 때, 얼마나 많이 교대에 들려 모교의 모습을 바라보았었는지......
옛날 칭구들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다 큰 체니들만 오가는 그 곳이 참 낯설기도 했네만......
1985년경 되 찾아갔을 때는 교문까지 잠겨 있어서 밖에서 들여다 보는 신세가 다 되었었지.
얼마나 그리운 내 모교인데......인천사범병설중학교 !!!!!!
어머나 Kwondo 씨가 남앞에 서는 것이 떨렸다고?
나도 그 옛날에는 남앞에 서면 무척이나 떨었지 그런데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꾸만 변해 가더라
초등학교 동창 이성은을 졸업후 오랫만에 만나ㅆ는데 얌전하던 내모습이 변한 모습을 보고 놀랬던 생각이 나는군
숭의동 우리가 다니던 자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리 친정에 가는길에 계산동으로 옮겨진 경인교대에 잠시 둘러보곤했는데 이제는 두분다 안게시니 갈일도 없네
난 어려서 일 다 잃어버리고 살았는데 Kwondo씨가 자꾸 생각나게 하는구려